틀린 삶이 아니라 다른 삶일 뿐.
노트북과 태블릿의 등장은 사람들을 사무실을 벗어나 카페, 벤치, 음식점 등 다양한 곳에서 일과 작업을 하는 '디지털 노매드'로 만들었고, 새로운 일하는 방식이 도래하게끔 만들었다. 덕분에 이제 우리에게는 노매드(Nomad, 유목민)라는 단어가 낯설지만은 않게 된 듯 보인다.
하지만 영화 <노매드 랜드>는 노매드식 삶이 아닌, 진짜 떠돌이로서 살기를 택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갑갑한 사무실에서 떠나 다른 다양한 곳에서 자유롭게, 행복하게 일하기를 선택한 디지털 노매드들과는 달리, 이들은 집이라는 안정적이고 편안한 생활방식을 버리고 힘들고 고되다 여겨지는 캠핑카와 트레일러에서의 삶, 즉 '도로 위에서의 삶'을 택한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디지털 노매드들과는 그 무게 자체가 다르다고도 할 수 있겠다.
영화의 주인공인 펀 역시 그런 사람들 중 한 명이다. 거주하던 도시의 경제적 붕괴, 남편의 사망 등으로 인한 복합적인 상황이 겹치며 낮에는 아마존의 물류창고에서 일하고, 밤에는 주차장의 캠핑카 속에서 삶을 이어가던 그녀는 직장 동료에게 노매드들의 성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 길로 그곳으로의 여행을 결심하게 된다.
수소문 끝에 도착한 '트레일러 촌'에 도착해서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펀과 마찬가지로 무언가 무거운 사연을 하나씩은 안고 있는 사람들이다. 병들고 지친 몸과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서, 누군가의 죽음을 이겨내기 위해서, 사업에 실패해서 등등, 인생을 뒤흔드는 사건을 계기로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통찰한 사람들이 이 자리에 모여있는 것이다.
그런데 심지어 이들의 리더 격인 인물 또한 그러한 상처를 갖고 있는 인물이기에, 여기까지의 내용으로만 따지자면 주인공인 펀을 포함한 노매드들은 모두 다 '상처 입은 인물'들이라는 데에서 공통점을 가지며, 불완전하고, 부족한, 그리고 불쌍한 떠돌이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굳은 각오를 하고 온 사람들조차 하나둘씩 저마다의 사정으로 캠프를 떠나고, 펀 역시 여러 가지로 위기를 맞기도 하며 그녀의 노매드로서의 삶은 점점 한계에 봉착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펀은 꿋꿋이 그 자리에 남아 누구보다 자유로이 떠도는 삶을 십분 활용하며 점점 그녀가 겪었던 상실감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함은 물론, 진정으로 노매드로서의 삶을 즐기는 '자의적 노매드'로서 거듭난다. 대자연과 호흡하며, 그리고 노매드로서의 삶의 방식을 배우며 그녀는 기존의 사회 시스템에서 완벽하게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당 부분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이다(영화 내에서 직접 언급이나 내포가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만 기존의 삶의 방식들에서, 특히 집이라는 공간에 대한 집착에서도 어느 정도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영화의 말미에 펀에게 집으로 대변되는 안정적인 삶, 새로운 동반자와 함께 마음 편하게 인생의 말년을 보낼 수 있는 편안함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만, 그녀는 그 모든 것들을 포기한 채 다시금 도로 위의 삶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이 선택이야말로, 이 영화를 의미 있게 만드는 한 수가 되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선택이야말로 병들고 지쳐 도로 위로 나선 노매드들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들이 단순히 사회의 낙오자가 되지 않도록 막아줬기 때문이다(자칫하면 떠돌이 생활을 하는 모든 이들이 불쌍하고 애처로운 떠돌이 취급을 받을 수도 있었지만, 이 선택 하나로 펀이 원해서 트레일러 생활을 하는 '진짜 노매드'로 진화할 수 있었고, 모든 노매드들의 삶에 의미와 가치를 더해준 것이나 다름없지 않겠는가).
보장된 듯 보이는 행복을 내박치고 다시금 고난의 길로 들어서는 이들의 선택은 언제나 우리에게 경이로운 광경이지만, 그중에서도 현대인들에게 있어 가장 소중하고도 간절할 가치, '안정'을 포기한 그녀의 선택은 관객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을 것이라 생각하며, 이 영화의 스토리적인 완성도에 더 힘을 실어주었다 생각한다(이 영화가 아카데미에서 작품상을 포함해 3관왕을 차지한 것은 그 좋은 증거일 것이다). 노매드 생활을 이어오며 기존의 안락하고 아늑한, 안정적이기만 한 삶의 방식 그 자체에 회의를 느끼게 된 펀의 표정은 많은 것을 현대인들에게 시사한다.
과연,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그저 다른 사람들이 사는 대로 그저 따라가기만 한 것은 아닐까?
2014년과 16년, 두 차례의 유럽여행을 통해서 필자는 삶의 방식은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가장 많이 느꼈더랬다. 남들을 따라서 4년제 대학을 나오고, 번듯한 직장에 들어가, 20년 할부로 아늑한 집을 사고, 가정을 꾸리는 일반적인 삶이 지극히 정상이자 '정도'라 여겨지는 나의 터전에서 떠나 다른 언어, 다른 문화,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행복하게 삶을 이어나가는 모습을 보며 큰 충격을 받았고, 덕분에 여행을 떠나기 이전과는 또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올 수 있었다. 지금도 물론 헤매고 있기는 하지만, 그런 경험이 없었다면 나의 인생은 지금쯤 어디로 향하고 있을지, 또 어디까지 잘못 이어져나갈지...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영화 <노매드 랜드>는 삶의 방식은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오랜만에, 그리고 다시금 상기시켜준 고마운 영화이다. 필자 역시 집이라는 공간에서의 삶에 익숙해져 있는 인간이기에 트레일러 위에서의 삶이 좋아 보인다거나 멋져 보이지는 않았지만, 도로 위에서의 삶을 꾸밈이나 부풀림 없이 담백하게 그려낸 이 작품을 통해서 2시간 남짓 그런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던 만큼, 이제는 그들의 삶이 이상하거나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을 것 같다(전에는 사실 별 생각이 없었다고 말하는 게 맞겠다. 애초에 이런 방식의 삶 자체를 고려해본 적 조차 없으니).
한 편의 영화를 통해 나와 다른 삶의 방식을 만나고, 그를 통해 배우는 기회를 얻기는 쉽지 않다 생각하기에 개인적으로 이 영화가 참 고맙고, 또 반갑다. 그래서 여러분께도 권해드리고 싶다. 그동안 인생을 사는 한 가지 방법 만을 정답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그리고 그를 기준으로 타인의 인생에 옳고 그름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있던 것은 아닌지, 종종 생각하고 반성하는 자세를 갖게 만들어줄 그런 영화가 되어드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