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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트루 Mar 28. 2021

영화 리뷰 - <중경삼림(1994)>

왕가위식 '일상 판타지'의 정점.

※스포일러 및 주관 주의!

강력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기에 원하지 않는 분들께서는 영화를 먼저 보고 오셔도 무방하며, 오로지 필자 개인의 주관으로만 작성된 글인 만큼 영화 본연의 내용과는 거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왕가위 식 '일상 판타지'의 정점, <중경삼림>!


<해피투게더>와 <타락천사>에 이어 드디어...! 어쩌다 보니 가장 유명하면서도 인기 있는 이 작품을 꽤나 늦게 보게 되었는데, 오래전부터 꼭 봐야지, 봐야지 하며 벼르고 별러왔기에 '아, 결국 인연이라면 언젠가는 만나게 되는 법인가...' 하는 생각을 했더랬다.


그런데 생각을 해보니, 오늘의 영화인 중경삼림의 메인 주제가 그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존재하는 것도 같다.



'운명론'



인연이 아니면 스칠 뿐 결코 닿을 수 없으며,

인연이라면 스치지 않더라도 결국 어디에서든 만나게 된다.



후속 편 급인 <타락천사>가 '관계'에 대해 이야기했다면, 전작인 <중경삼림> '인연'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야기의 구성이나, 스토리 전개 등의 여러 가지 면에서 후속작 느낌의 <타락천사>보다는 다소 '날 것'이라 느껴지기는 부분이 존재하지만, 해피엔딩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특성상 보다 밝고, 희망찬 결말을 제시하는 <중경삼림>이 더 많은 매니아층을 확보할 수 있지 않았나 한다. 감히 왕가위 식 일상 판타지의 정점이라 표현하고 싶.


(영화의 연출적 구성에 대해 좀 더 깊이 이야기해보자면, <중경삼림>의 경우 타락천사에 비해서 더 적은 수의 인물들을 조명하며 이야기 구성이 단순하기에 연출자 입장에서도 스토리 하나하나를 좀 더 잘 조명할 수 있음은 물론 관객에게 있어서도 더 집중이 잘 되는 환경이 조성될 수 있었고, 한 이야기에서 다음 이야기로 자연스레 바톤터치가 되는 느낌이었다면, <타락천사>의 경우 전혀 다른 각각의 이야기들이 번갈아 등장하면서 상대적으로 집중도가 떨어지기에 중경삼림 비교해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가' 싶은 느낌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작품이  생각한다.)






Episode 01 - 스쳐갈 뿐, 이어질 수는 없는.



마약 밀매상으로 출연한 임청하. 그녀는 이 영화에서 누구보다 강렬하다. 대단한 것은 눈동자 한 번 비추지 않고 그걸 해낸다는 것...!


노란 머리와 선글라스, 베이지 색 트렌치코트.


어딘지 범상치 않은 모습의 그녀는 홍콩 뒷골목에서 외국인 노동자를 시켜 마약을 밀매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런데 외국인 노동자들을 공항에서 출국시키려는 찰나, 그들이 마약이 든 가방을 들고 집단으로 사라져 버리는 사건이 발생하고, 그녀는 그런 일을 사주한 사람을 찾아 홍콩 뒷골목을 이 잡듯 뒤지기 시작한다. 만일 사라진 마약을 찾지 못한다면, 그녀는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금성무는 경찰 하지무 역으로 등장하는데, <타락천사>에서는 이름은 동일하되, 불우한 사고로 벙어리가 된 인물로 등장한다. 이것 또한 왕가위의 영화를 보는 재미 중 하나.


그리고 이 남자, 경찰관 하지무(코드네임 223).


4월 1일, 만우절에 이별을 선고받은 그는 떠난 그녀의 연락을 기다리며 유통기한이 5월 1일인 파인애플 통조림을 모으고 있다. 5월 1일까지 그녀가 좋아했던 파인애플 통조림을 30개 모으면, 그녀가 돌아올 거라는 헛된 기대를 품고서. 하지만 그도 알고 있다. 파인애플 통조림을 아무리 모은다 한들 그녀의 연락은 오지 않기에, 그런 자신의 행동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그래서 그는 5월 1일이 되기 하루 전, 그가 모아두었던 통조림을 모두 먹어치운 채 새 사랑을 찾아 술집으로 향한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듯 보이는 투 샷. 왕가위가 이 둘을 붙여놓은 것은 결코 우연은 아닐 것이다.


'이제부터 술집에서 가장 먼저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겠어!'라 생각한 223의 눈 앞에 들어온 노란 머리의 그녀(하필이면...). 어떻게든 말을 이어가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의 벽은 좀체 허물어지지 않고, 술만 연거푸 마시던 그들은 결국 한 방에 묵게 된다. 하지만 지무는 그녀와 한 방에 머물면서도 그녀가 침대에서 잠에 든 사이 혼자 음식을 먹고, 티비를 보며 새벽녘을 맞이하고, 그렇게 조용히 그녀의 곁을 떠난다.


그가 이 이상 그녀 곁에 있다 한들, 그녀와 자신은 결코 이어질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이 사람, 나랑 운명은 아닌가 보다...



어떻게든 닿고 싶어도 손 끝에만 스치고 지나가는, 그런 인연이 한 번쯤은 찾아온다. 그렇게 노력하고 애쓰는 데도 닿지 않았던 그 사람을, 우리는 그저 흑역사, 혹은 상처로만 남겨야 할까? 그 사람을 생각하며 투자했던 그 시간들은 그저 무가치한 것일까?




경찰범죄자.


평생을 함께할 누군가를 찾고 있던 남자잠시 쉴 곳이 필요했던 여자.


애초에 이 둘이 이어지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무는 목숨을 위협받고 있던 그녀에게 잠시 기대 안전하게 쉴 수 있는 쉼터이자 복수를 이행할 수 있는 힘을 되찾게 해 주었고, 그녀는 지무에게 실연의 아픔을 딛고 한 층 더 성숙한 사람이 되는 발판이 되어주었다. 이 정도면, 두 사람은 서로에게 충분히 가치 있는 관계였다고 해도 괜찮지 않을까. 그게 하룻밤의 관계이건, 서로가 이어질 운명이 아니었다 한들 뭐 어떤가. 그저 나랑 인연이 아니었겠거니 생각하고 다른 인연을 찾아 나설 수밖에.


지무가 에피소드의 마지막에 새로 등장하는 인물인 페이와 스쳐가면서도 '그녀는 곧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진다'며 쿨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 역시 그런 성숙의 단계를 가치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예전의 지무였다면 아마 그녀에게 또다시 작업을 걸었다는 데에 필자의 피 같은 돈, 오백 원을 걸겠다.






Episode 02 - 인연이라면, 결국 언젠가는.


영화 <영웅>을 보고 팬이 된 양조위 따거. 눈빛 하나로 연기를 다 하려 하는, 아주 이기적인 양반이다. 그런 눈빛으로 쳐다보는 건 반칙이죠 형...


경찰 번호 663(양조위)은 여느 때처럼 주변 순찰을 돌다 허기를 달래러 단골 가게에 들어온다.


그도 지무와 마찬가지로 자기에게서 점점 멀어지는 여자 친구와의 관계 속에서 괴로워하고 있는 인물인데, 다른 점이 있다면 그는 유통기한이 5월 1일인 통조림을 모으는 대신, 그녀와 함께 했던 흔적이 남아있는 방에서 비누와 인형에게 말을 걸며 외로움을 달래고, 그녀가 좋아했던 샐러드를 먹으며 그녀를 추억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신입 점원, 페이(왕페이)는 (필자가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어마어마한 눈빛을 가진 663의 매력에 넘어가버린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가게를 찾은 663의 여자 친구로부터 그의 앞으로 된 편지를 맡아서 보관하게 되고, 그 안에는 663에게 완전히 이별을 통보하는 편지, 그리고 663의 방 열쇠가 함께 들어있는데...


이 영화를 통해 처음 본(사실 2046에서도 봤지만 기억을 못 했던) 왕페이. 그녀는 시종일관 어수룩하면서도 소탈한, 사랑스러운 캐릭터를 완벽하게 소화해냈다.


결국 페이는 그 열쇠를 가지고 663의 집으로 들어가 그녀의 흔적을 하나하나 지워나가는, 일명 '우렁각시'가 된다. 하나씩 그녀의 흔적을 자신의 것으로 바꿔놓는 과정 속에서 그녀는 그를 향한 마음을 키워나간다. 하지만,



내가 그에게 잘 어울리는 사람일까...?



하는 의구심과 고민 역시 점점 커지게 된다. 미인인 데다 대부분의 남자들이 좋아할 만한 여성스러운 스타일에, 스튜어디스라는 잘 나가는 직업까지 갖고 있는 그녀에 비해, 다소 보이시한 스타일에 그저 가게 점원에 불과한 자신이 과연 그의 여자로 어울릴지에 대한 고민도 싹터버린 것이다.


점점 자신의 주변 환경이 바뀌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기 시작하는 663.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흰색 인형을 주황색 가필드로 바꿔놓으면...


하지만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길어도 너무 길었다). 그녀는 결국 우연히 집에 들어와 있던 663과 마주치게 되고, 그전까지 그녀가 했던 일들과, 그동안 남몰래 키워왔던 마음을 그에게 발각당한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얼핏 눈치채고 있던 663 역시 그녀가 싫지 않았기에 가게 앞의 '캘리포니아'라는 이름의 바에서 만나자며 데이트 신청을 하지만, 약속 당일,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기다려도 그녀는 오지 않고, 그는 그녀가 이 곳이 아닌 진짜 '캘리포니아'로 떠났음을 예감한다.


이후 그는 그 앞으로 쓰인 페이의 편지를 받지만 이별 편지라는 사실을 직감하고는 쓰레기통에 버린다. 그의 전 여자 친구 역시 편지로 그에게 이별을 고했기에, 똑같은 방식으로 버림받는 것은 그에게 있어 굉장한 고통이었으므로.


하지만 그녀를 놓칠 수 없었던 그는 과거의 고통과 정면으로 마주하기로 결심하고 다시 그 편지를 줍는다. 안에는 비행기 티켓이 그려진 그림과 1년 후에 만나자는 그녀의 메시지가 담겨있지만, 아쉽게도 행선지가 빗물에 젖어 지워진 상태. 그들은 결국, 그렇게 이별하고야 만다.









1년 , 스튜어디스가 되어 홍콩으로 돌아온 페이. 오랜만에 자신이 일하던 가게를 다시 찾은 그녀는 그곳에서 가게의 주인이 되어 오픈을 준비하고 있는 663과 마주친다.



하지만 여기에서 관객들은 묘한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 페이는 분명 663에게 어울리는 여자가 되기 위해 스튜어디스가 되어 돌아왔지만, 이는 그녀 역시 그를 떠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관객들에게 왠지 모를 불안감을 조성하기 때문이다. 마치 그의 전 여자 친구가 그랬던 것처럼.


'역시 왕가위... 해피엔딩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는 바로 이때, 663이 가게 한 편에 고이 모셔두었던 그녀의 편지를 꺼내 보여주고, 장소가 지워져서 보이지 않지만, 그 출발일이 바로 오늘이라며, 그는 그에게 도착지가 어디냐며 묻는다. 그는 그녀를 기다리기 위해, 이 순간을 위해 경찰을 그만두면서까지 이 가게를 산 것이다.


참... 이 때 양조위의 표정과 눈빛은 정말...


그리고 페이가 티켓을 다시 만들어주겠다고 말하며 영화의 마지막 신이 이어진다.





"어디로 가고 싶어요?"

"...아무데나! 당신이 원하는 곳으로..."






그리고 이 영화의 백미 중 백미인 OST, 몽중인(夢中人)이 흐르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아...! 필자는 여기서 마음을 놓았다. 이들의 미래는 알 수 없지만, 청량하고 시원시원한 그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도 관객들은 예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들의 미래가 해피엔딩일 거라고, 그럴 수밖에 없을 거라고 말이다(혹시나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이라면 한 번 검색해서 들어보시라. 필자의 왜 그리 예감할 수 밖에 없었는지 이해하되리라.)








이 영화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투 샷.


첫 번째 에피소드와 비교했을 때, 두 번째 에피소드는 자칫 '결국 만날 사람은 언젠가 만난다'는 식으로 해석될 여지가 농후하다. 우리가 굳이 애쓰지 않아도, 만나게 될 인연이라면 언젠가 만나게 될 거라고, 그러니 그저 그 자리에서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고 말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만일 페이가 그대로 그에게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캘리포니아에 있기를 선택했다면,


663이 경찰일을 포기하고 그녀와 함께했던 가게의 주인이 되기를 선택하지 않았다면,


그들이 다시 만나는 '기적'은 과연 일어날 수 있었을까?




멀리 돌아오기는 했지만, 페이는 결국 자신이 그를 오랜 기간 스토킹(?)해왔다는 부끄러움을 이겨내고 그의 앞에 당당한 모습으로 다시 서기를 '선택'했고,


663 역시 경찰을 그만두고 함께한 추억이 깃든 가게의 주인이 되어 그녀가 돌아올 보금자리를 마련해둔 채 그녀를 기다리기로 '선택'했다.


스튜어디스가 되어 그에게 돌아간다 한들 그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지 않을지도 모르고, 가게를 사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한들 그녀가 돌아올 거라는 보장도 없음에도, 그들은 그 낮은 확률에 자신의 적지 않은 시간, 즉 삶의 일부를 건 것이다. 생각해보면 참 용기 있는 결정인 것이다.



영화와 마찬가지로 포스터 역시 리마스터링 되었다. 영화만큼이나 좋은 느낌.


이런 두 사람의 만남을 '운명'이라는 사탕발림 같은 말로 표현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 방식일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이건 아닌 것 같아서, 필자 역시 리뷰를 고치고 또 고쳐야만 했다.



우리 모두 무의식적으로 이미 알고 있지 않던가.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으면 정해진 운명조차 우리를 비껴간다는 사실을. 어쩌면 그들 역시 첫 번째 에피소드의 두 사람처럼 서로 만날 수 없는 운명이었지만, 서로의 노력을 통해 그 운명을 거슬러 다시 만날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운명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정해나가는 것. 이것이 왕가위 감독이 우리에게 이 영화를 통해 던지는 진정한 메시지가 아닐지. 그리고 이런 메시지를 관객들 역시 어렴풋하게 느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아직까지 사랑하고 있는 것 아닐까? 그저 이 영화를 영화관에서 볼 수 있었음에 감사할 따름인, 오랜만에 설레고 흐뭇한 마음으로 영화관을 나올 수 있었던 멋진 영화, <중경삼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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