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후 쉬던 나, 싸게 나온 항공권에 용기를 내다
하지만 퇴사한 유부남이, 그것도 혼자 여행을 떠나겠다고 와이프에게 말하는 데에는 더욱 큰 용기가 필요하다. 심지어 그 행선지가 두 달 전 아내와 함께 다녀왔던 곳이라면 더더욱.
대체 왜, 얼마 전 갔던 곳으로 여행을 또 떠나냐는 물음이 드실 법도 하겠다. 내가 생각해도 그렇다. 마침 저렴하게 나온 도쿄 왕복 항공권이 이번 여행의 유일한 계기였다면 '철부지'라는 소릴 들어도 싸겠지만, 필자는 나름 그곳으로 다시 떠나야만 할 이유가 꽤 많이 쌓여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비행기 값이 단돈 13만 원으로 몹시 저렴하긴 했다. 비록 퇴사 이후 자금 면에서 여유가 있는 상황은 결코 아니었지만, 워낙 저렴해서였는지 아내도 '이번이 아니면 언제 가보겠냐'라며 흔쾌히 허락을 해줬다. 하지만 여행 일정이 7박 8일이라 배보다 배꼽이 더 컸다는 점이 함정...)
첫 번째로는 도쿄라는 곳을 조금 더 깊게 알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다. 지난 8월 다녀왔던 도쿄가 기대 이상으로 멋진 도시였기 때문이다. 다양하면서도 풍부한 매력을 품고 있는, 도심의 향기 속 사람 사는 냄새가 배어 있는 그런 곳. 비록 오사카나 교토 대비 여행지로는 아쉽다는 평가도 있지만, 일본이라는 나라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그 어떤 곳보다 도쿄로 깊숙이 들어가야만 한다는 생각이 나를 다시금 그곳으로 향하게 만들었다.
두 번째로는 아내와 함께 했던 4박 5일 일정이 사실 '남자의 로망'을 해소하기에는 조금 부족했다는 점도 이야기해야겠다.
함께했던 여행도 물론 즐겁고 행복했지만, 어릴 적 TV에 나오는 수많은 일본 애니메이션들(특히 로봇 만화를 좋아한다)을 접하며 자랐던 만큼 유년기의 추억들이 보다 생생할 그곳에 좀 더 푹 잠겨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각 이상으로 간절했던 것 같다(자랑은 아니지만 고등학교 때 일찍이 JLPT 1급을 따고, 대학교를 일본어 학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 역시 어릴 적부터 다양한 문화를 접하며 좋은 추억을 쌓았던 영향 덕분이었다고 생각한다).
단지 그곳에 발을 디딘 것 만으로는 해묵은 갈증이 가시지 않음을 깨달았으니, 이제는 그 속에 나 홀로 더 깊이 빠져볼 수밖에.
그리고 마지막 한 가지가 더 있다면, 이번 여행이 답답한 작금의 상황을 딛고 일어날 원동력 혹은 돌파구가 되어줄 수도 있다는 막연한 기대 때문이었다고 하겠다.
결혼 한지 이제 겨우 9개월, 30대 중반의 나이. 하루빨리 자녀 계획을 꾸려도 모자랄 판에 2년 반 가량 다니던 첫 직장을 박차고 나와 다시금 야인(野人)이 된 이후 나 자신을 돌아볼 시간이 절실했다. 여행이 삶의 터닝포인트가 돼 줄 거라는 확신이었는지, 지금 이 상황에서 잠시 눈을 돌리고 싶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그 누구도 아닌 스스로와 마주 보는, 현재의 나를 돌아보고 환기할 수 있는 시간만큼은 무조건 필요했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이 다음 스텝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말이다.
그렇게 지난 10월 30일 오전 7시 15분, 내 몸을 실은 도쿄행 비행기가 공중에 떴다.
저 멀리 멀어지는 공항을 보면서도 사실 설렘보다는 찝찝한 마음이 앞섰다. 지금 당장 마주해야 할 것들을 내박치고, 잠시잠깐의 위안을 얻고자 비행기에 몸을 실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에. 그래도 뭐 어쩌겠나. 여행을 떠난 것을 후회하기는 이미 늦은 시점, 이제 손에 쥐어진 것은 앞으로 펼쳐질 7박 8일간의 시간을 정말 후회 없이, 꽉 채워서 만끽하고 와야 한다는 새로운 과제뿐이다.
비행기를 타 보신 분들이라면 알겠지만, 제 아무리 구름이 끼고 비가 오더라도 그 위로 올라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파란 하늘이 펼쳐진다. 덕분에 '지금 내 힘든 시간들 역시 먼발치에서 보면 아무것도 아닐지도 몰라'하는 생각이 들지만 그것도 잠시. 이번 여행에서 반드시 뭔갈 얻고 돌아가야 한다는 중압감이 다른 생각들을 밀어내고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비행기가 떴다 하면 감겼던 눈도 좀체 감기질 않는다.
어느새 도착한 나리타 공항 2 터미널.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세븐 일레븐 ATM 기계를 찾는 것이다. 모 카드사의 여행용 체크카드를 쓴다면 친하게 지내게 되는 물건인데, 온라인으로 환전만 미리 해놓으면 카드로 현지에서 수수료 없이 돈을 뽑을 수 있어 좋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이렇게 간편하지는 않았는데...'라는 생각이 잠시 머리를 스치지만 빨리 잊어 본다. 내가 나이가 들고 있다는 증거니까...)
JR 동일본 여행 센터에 들러서 2000엔을 내고 일본의 티머니, 스이카의 여행자용 '웰컴 스이카'도 끊었다. 많이들 알고 계신 초록색 스이카는 이곳에서는 더 이상 판매하지 않는다고(아무래도 현지인 대상으로만 판매하고자 시내에서 구입하게끔 만든 듯 보였다). 웰컴 스이카의 경우 이용 시작일(카드 구입일)을 포함해 28일간 밖에 사용할 수 없지만, 기존 대비 보증금 500엔을 내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이 있다. 디자인도 예뻐서 단기 여행자에게는 좋은 기념품이기도.
도쿄 도심으로 이동하기까지 아직 시간이 좀 남아 이른 점심을 먹기로 한다.
여행에서 첫 끼의 중요성은 상당하다. 그래서 도쿄 도심으로 이동하기 전에 잇푸도에서 라멘을 먹으려 했으나 눈에 띄지 않았기에, 애석하게도 결국 일본의 유명 카페 체인, '도토루'에 들어와 끼니를 때운다(한 때 국내에서도 페트병 커피를 출시했던 그 DOTORU 맞다). 샌드위치 안에는 작은 칵테일 새우와 약간의 말린 연어가 들어가 있는데, 연어가 너무 적은 것이 슬프나 새우만큼은 적당히 들어있어 위로가 된다. 가성비는 그냥저냥.
도심으로 가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열차 종류 중 하나인 스카이 액세스. 배차간격이 3~40분 대로 매우 길고 여러 곳에 정차해 도착 시간이 약간 늦다는 단점은 있으나 다른 교통수단 대비 가격이 매우 싼 편이다. 도쿄 중심부인 아사쿠사, 우에노 까지라면 1200엔 정도로 저렴하게 갈 수 있다(다른 교통수단들에 비하면 시간 손해가 큰 편이라는 평가가 많지만, 저렴하게 다녀오겠다는 말로 와이프를 안심시킨 터라 이런 데서라도 아껴야 한다는 생각 밖에는 없었다).
아직 푸릇푸릇함을 유지하고 있는 창밖. 들판과 논밭을 지나며 점차 도쿄다운 풍경을 갖추기 시작한다.
두 번 정도를 갈아타고 긴시쵸(Kinshicho) 역에 내렸다. 뒤에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는 것은 도쿄의 랜드마크 중 하나이자 이번 여행에서 꽤 자주 등장할 친구인 '스카이 트리'(Sky Tree).
어디에서나 자판기를 찾아볼 수 있는 '자판기 천국' 일본. 다시 여행을 오면 꼭 먹고 싶었던 음료수를 찾는데 좀체 보이질 않는다. 이제 보니 각 브랜드의 음료들이 다양하게 들어있는 우리나라와 달리 브랜드들마다 각각 자판기를 설치해 특정 브랜드의 음료만이 들어있는 경우가 꽤 많은 것 같다. 일본에 온 것이 벌써 세 차례인데 이제야 발견하다니, 역시 세상에는 그냥 지나치면 볼 수 없는 것들이 꽤 많은 것 같다.
결국 자판기 탐방을 포기하고 들어간 편의점에서 그리고 그리던 그 음료수, 기린(KIRIN) 사의 '오후의 홍차'를 손에 넣었다. 워낙 유명한 음료수이긴 하나 안 드셔본 분들을 위해 설명을 잠깐 하자면 밀크티인데 '약간 더 진한 데자와'같은 느낌이라고 하면 적절할 듯하다. 하지만 한 번 맛을 들이면 이름과는 다르게 오후건 오전이건 새까만 밤이건 찾게 되는, 그야말로 마성의 음료라고 할 수 있겠다(섭취에 주의를 요한다).
여하튼 목도 축이고, 숙소에 짐도 맡겼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남자의 로망'을 찾는 첫 행선지, 아키하바라로 향할 차례다. 오늘의 목적은 딱 한 가지, 정말 딱 한 가지뿐. 바로 '프라모델' 찾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