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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트루 Jan 05. 2025

철부지 유부남, 나 홀로 도쿄 일주일 #4

쇼난, '슬램덩크'의 낭만 그 이상이 담긴 곳

가마쿠라의 '하세' 역에서 에노덴 전철을 타고 15분을 이동하면 도착하는 '가마쿠라코코마에'(가마쿠라고등학교 앞) 역. 별 볼일 없어 보이실 수도 있겠으나, 이 곳에는 무려 추억의 애니메이션 '슬램덩크'의 한 장면이 살아 숨 쉬고 있다. 만화 팬들에게는 그야말로 '성지' 같은 곳.


바로 이 풍경, 주인공인 '강백호'가 철길을 사이로 짝사랑하는 여주인공 '채소연'과 마주 보는 오프닝 씬의 모티브가 된 곳이 가마쿠라코코마에역이다. 사실 만화책으로 슬램덩크를 읽은 필자에게는 큰 감흥이 없을 법도 하지만, 이 곳에 오는 것만으로 만화책을 읽던 어린 시절의 낭만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어느 정도 기대를 품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도착한 역 앞의 풍경. 상상하고 기대했던 그것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애초에 해가 지고 난 이후에 도착한 터라 감흥이 덜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이것 외에는 정말 볼 게 없다는 점이 크리티컬하다. 제 아무리 사람들이 많다곤 하나 그게 허한 풍경을 달리 보이게 만들어 주는 것도 아니고.


아쉬움에 좀 더 멀리서 찍어보는 풍경. 생각 이상으로 날씨와 시간이 받쳐줘야 하는 스팟인 만큼 혹시나 오실 예정인 분들은 날씨를 잘 체크해서 무조건 이른 오전 시간에 오시기를. 필자처럼 저녁에 오시면 말짱 꽝.


사실 이 이후에 슬램덩크 만화책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해변가에 다녀와볼까 했지만, 너무 어두워진 마당에 그런 풍경 역시 감흥이 올리가 있나. 둘째 날 여행, 사실상 끝이다 이 걸로.


하지만 생각을 거듭할 수록 여기까지 날아와놓고 그대로 돌아서긴 아쉬워도 너무 아쉽다는 생각이 샘솟는다. 마침 도보로 20분 거리에 에노시마 역이 있으니, 거기까지 걸어갔다가 전철을 타고 도쿄에 복귀하자.


도심지보다 훨씬 어두컴컴하고 조용한 쇼난(상남)의 해안도로. 그래도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 나오는 슬램덩크 OST 덕분에 가는 길이 적적하지만은 않다. 카메라 사용이 익숙지 않은 필자에게는 좋은 사진 연습 시간이기도 했는데, 셔터 속도를 늦춰서 빠르게 지나가는 자동차들의 속도감을 포착해 본다.


해안도로가 끝나고 마을에 들어서니 얼핏 느껴지는 슬램덩크의 향기. 애초에 이곳 쇼난 자체가 강백호의 팀, 쇼호쿠(상북)의 모티브가 된 곳이라고 하니 이런 곳이 한 두 군데 정도는 있는게 자연스럽긴 하겠구나. (작중에서 강백호 등이 다니는 상북고등학교는 실제로 존재하는 상남고등학교를 모티브로 만들어진 가상의 것.)


쇼난 지역은 '슬램덩크', '상남 2인조' 등의 만화가 나오던 1990년대 초반에는 오토바이 폭주족들이 대거 몰려있던 우범지대였다고도 하는데, 지금은 그런 것 같지 않아 보인다. 하염없이 조용하기만 하다.


도로 가운데를 따라 이어진 철로를 달리는 에노덴. 다소 위험해 보이지만 속도가 그리 빠르지 않기도 하고, 서울에서는 볼 수 없는 광경이니만큼 마냥 즐겁기만 하다.


가게들이 많이 닫아서 그런지 열려있는 두부집도 마냥 반갑고 정겹기만.


20여분을 걸어 결국 도착한 최종 목적지, 에노덴 '에노시마' 역. 막상 열차를 타려니 발이 또 떨어지지 않는다. 기왕 온 김에 좀 더 돌아보고 저녁이라도 먹고 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다시 앞으로 앞으로.


쇼난 지역의 외딴섬, '에노시마'로 향하는 길목에서 찰칵. 인기 있는 관광지라 그런지 사람들이 꽤 많다. 유난히 아이들과 함께 나온 가족 단위 관광객이 많은데, 알고 보니 오늘(10월 31일)이 할로윈 당일이라 이를 즐기기 위해 나온 모양이다. 사진에는 보이지 않지만 인형옷을 입은 아이들도 종종 있고, 아이들에게 사탕을 무료로 주는 이벤트를 하는  가게들도 많다.


배가 조금씩 고파지던 찰나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는 가게를 발견. 카레빵으로 유명한 곳인 듯한데, 밥을 먹기 직전이지만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치기엔 아쉽다.


10여 분간의 기다림 끝에 카레빵(450엔)을 사서 점내로. 고구마 모양의 소보로 같은 형태인데, 흘러나올 정도로 많은 모짜렐라 치즈와 카레 소스가 들어있다. 맛도 좋지만 그 훌륭한 내용물에 기분도 좋았던 음식. 역에서 에노시마로 향하는 길에 드셔보시면 좋을 듯하다.

 

하지만 간식은 어디까지나 간식. 이제 슬슬 저녁을 먹어야겠다 싶던 찰나 저 멀리 화려한 중국집(?)이 보인다.


가까이 가보니 이런, '가타세에노시마'(片瀬江ノ島) 역이란다. 아니 무슨 역을 이렇게 삐까뻔쩍하게 만들어서 사람을 헷갈리게 하는지 원(사실 일본식 짜장짬뽕을 맛볼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뭐 됐다. 오던 와중 거리에 잔멸치(시라스)를 쪄서 만들어 얹은 덮밥인 '시라스동'을 파는 곳이 종종 보였는데, 아무래도 이곳 에노시마의 향토 음식인 듯 하니 그쪽으로 노선을 틀기로.


구글맵을 뒤져 에노시마로 넘어가는 다리 근처의, '에노시마 코야'(江ノ島小屋)에 왔다. 겉으로 보면 작은 식당인데, 들어가니 꽤 넓고 깔끔한 인테리어에 깜짝 놀란다. 인기 메뉴인 생멸치를 그대로 올린 시라스동은 진즉에 품절됐다고 하니 기본 메뉴인 일반 시라스동에 만족하기로. 아참, 맥주도.


먼저 도착한 맥주, 삿포로 시로호노카(白穂乃香). 얇은 잔인데도 가격이 일반 생맥주보다 2배가량 비싼 1000엔이라 좀 비싸다 싶은데, 한 모금 먹어보니 깔끔하면서도 풍부한 맛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삿포로 중에서도 프리미엄 라인이라는데, 일반 맥주와 달리 살아있는 효소가 들어있어 캔이나 병으로 판매하지 않는 제품이라고. 국내에서 접할 수 있는 맥주 중에서는 블루문과 가장 흡사한 느낌이다.


이후 바로 차려진 한상차림. 간장(쇼유)과 야채절임(쯔케모노), 국물(다시)을 시라스동에 곁들여 취향껏 먹으면 된다. 하루동안 열심히 돌아다니며 고생한 나 자신에게 선사하는 더할 나위 없는 선물이다.


찐 멸치가 가득 올라가 있는 시라스동의 모습. 일단 조금 떼서 먹어본다.


말린 멸치 특유의 짭조름함, 혹은 비린 맛을 예상했는데 웬걸, 은은한 담백함과 단맛이 일품이다. 이렇게 맛날 수가... 포슬포슬 부드럽게 넘어가는 느낌도 참 좋은데, 아주 신선한 멸치를 정말 적당한 정도로 알맞게 쪄내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식감이다. 작은 쪽파와 적양파채도 입맛을 돋우는데, 같이 나온 쇼유와 함께 먹으니 더 맛이 좋아진다.


그렇게 한참을 먹다가 같이 나온 국물에 오챠즈케(차에 밥을 말아먹는) 식으로 밥을 말았는데, 차가 아니어서였는지 시라스의 섬세한 맛이 가려져서 오히려 마이너스였다. 국밥 먹는 느낌. 개인적으로 제일 좋았던 조합은 쇼유와 함께 곁들여 먹는 방식이 아니었나 싶다.


바닥까지 싹싹 긁어먹고 추가로 내주신 뜨거운 호지차로 입가심까지. 일반 녹차보다 훨씬 진하고 독특한 맛이다. 마무리까지 완벽한 한 끼.


정말 이곳 하나만을 위해서 에노시마를 찾는다 해도 후회스럽지 않을 법한 식당이었다. 그간 도쿄와 오사카, 교토 등을 여행하며 먹었던 음식들 중 탑 3에 충분히 든다(나머지 2개는 교토의 우동집인 '야마모토 멘조우'와 오사카에서 먹었던 게 요릿집 '카니도라쿠'를 꼽겠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나중에는 생멸치 시라스동을 먹으러 이곳에 다시 올 수 있게 되길.


맛있게 식사도 잘했고, 에노시마로 넘어가기에는 밤이 너무 늦은 관계로 이제는 도쿄로 돌아가야 할 듯하다. 다시 에노시마 역으로.


가는 길에 끼고 걸었던 '사카이 강'. 고요해 보이지만 시커먼 물속에서 물고기가 퍼덕거리는 소리가 엄청나게 들려온다. 바다와 강이 이어지는 곳이라서인지, 물고기가 본디 야행성이라 그런 것인지 잘은 모르지만 이곳이 생명력이 넘치는 곳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원래대로라면 에노시마 역에서 에노덴을 타야 하지만, 모노레일이 있다고 하길래 고민 끝에 탑승하기로 했다. 철로에 얹혀 달리는 일반 전철과 달리 매달려있는 형태인 구조라 타면 어떤 느낌일지 심히 궁금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궁금한 건 뭐든 직접 해봐야 직성이 풀린다. 매우 피곤한 스타일.)


근데 이게 웬걸... 14분 거리의 환승역, 'JR 오후나' 역까지 무려 에노덴의 4배가량인 929엔이나 든 데다, 이른 시간이 아니라 바깥에도 볼 게 없어 손해만 크게 봤다(공중에 떠서 가는 구조라 낮에는 밑에 자리한 도심이 보이는 형태다). 어쩐지 탑승할 때 이용객이 많이 없더라니... 역시 사람들이 많이 이용을 안 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굳이 이 노선을 이용해야 하는 이유가 없다면, 에노덴을 타는 것이 훨씬 저렴하니 참고하시길.


다시 도착한 긴시쵸역. 에노시마에서와 달리 할로윈을 챙기는 어른이(?)들이 종종 보인다. 약간 상기된 거리의 분위기 탓일까, 몸이 고되고 힘들지만 아직 들어가기는 아쉬운 밤. 저 멀리 보이는 스카이트리를 향해 무작정 걷는다.


비록 그 수가 많지는 않아도, 시부야나 신주쿠 같은 중심가가 아닌 곳에서도 할로윈을 즐기는 사람들이 종종 보인다는 점에서 일본이 남들 눈을 신경 쓰지 않고 즐기는 문화가 좀 더 잘 정착돼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스카이트리는 가까워질수록 그 밑동이 드러나는데, 멀리에서는 빌딩에 가려 볼 수 없었던 화려한 조명이 더 잘 보이기 시작한다. 아까 쇼난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 또한 일부만 보고 돌아섰더라면 알 수 없는 풍경이었겠지. 한 곳을 오래, 또 깊게 여행하는 이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총천연색으로 빛나는 스카이트리를 끝으로 마무리해 보는 둘째 날. 비록 슬램덩크의 낭만을 찾진 못했지만, 하세데라와 고토쿠인, 의도치 않게 방문했던 쇼난이 기대 이상이었기에 숙소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다. 가마쿠라코코마에 역의 허전함에 실망해 그대로 돌아서지 않은 스스로를 칭찬하면서, 내일 있을 일정에 대한 기대감도 한 껏 부풀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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