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철부지 유부남, 나 홀로 도쿄 일주일 #5

다소 사적이고 예스러운, 일드 '롱 베케이션'의 추억

by 김트루

도쿄 솔로 여행 3일 차, 조금 다른 이야기로 시작하려 한다.


여러분, 혹시 <롱 베케이션>이라는 고전 일본드라마를 아시는지? 도쿄에 사는 24살의 무명 피아니스트, '세나'(기무라 타쿠야)와 결혼 당일 남편이 도망간 32살의 전 모델, '미나미'(야마구치 토모코)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인데, 1996년 방영 당시 일본의 러브코미디 장르에 한 획을 그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xhtOQAYrkXDHLwQAio0QHBydYSAZSwMzuncQdpT4Nw1ABuZvv8ey90D3mY7JqQrFrYs6PgrjFK6P5gAaZ35UZ3J4xtzrNZ71C3vVpyAdecQxhSmAGjDz4GAYSH7E9g48FNjKTmW17GKVR0gNQU-TbA.jpg
duKULIQygB3-ULtQIoS6Btd2J9HiQFIJzp__tEBC4kGh5FDuhiiLYDWV9SlwP3DLotCXQyMDTXwwRQnEG_XcOlc_bNKSw0nameRGEIJoacjj8ITY0q-lHuUepkS41RqJ5w02wk_hSM_gJgABAOeaxw.jpg
일본 드라마 '롱 베케이션'의 오프닝(왼쪽). 오른쪽에는 두 주연배우인 야마구치 토모코와 기무라 타쿠야인데, 여주인공인 야마구치 토모코의 캐릭터가 굉장히 매력적이다.

필자 역시 대학생 때 일본어를 공부하며 가장 재미있게 봤던 작품이고(물론 1996년 당시에 대학생이었다는 건 아니다), OST도 종종 들을 정도로 제일 좋아하는 일본 드라마다. 드라마를 보지 않게 된 지금도 가끔씩 꺼내보곤 한다.


내가 이 드라마를 좋아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멋진 두 배우의 간질간질한 러브스토리가 진국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인생이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아 원치 않는 긴 휴가, '롱 베케이션'을 보내고 있던 두 사람이 서로를 알게 되면서 아픔을 치유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스토리가 어딘지 와닿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다소 낡긴 했지만, 본인이 '롱 베케이션'을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분들이 계시다면 한 번쯤은 보시기를 추천, 아니 강력 추천.


5.jpg
4407_20211015123513304.PNG.jpeg
드라마 '롱 베케이션'의 장면. 주인공 '세나'(기무라 타쿠야)가 사는 맨션(왼쪽)과 그 옥상에 있는 전광판(오른쪽).

오늘의 첫 일정은 바로 이 드라마의 주인공, '세나'가 사는 '세나 맨션'(일명 세나만)을 찾는 것이다. 사진처럼 작은 3층짜리 빌딩과 그 위에 'Don't worry, Be Happy'라고 쓰인 전광판이 인상적인데, 애석하게도 시간이 이미 많이 흘러 해당 건물을 허물고 다시 세워 그 흔적은 없는 상태라고.


하지만 뭐 어떤가. 막상 가면 당시의 흔적이 어느 정도 남아있을지도 모르고, 드라마를 보던 당시에 느꼈던 감성이 살아날 수도 있는 것 아니겠나. '갈까 말까 할 때는 가라'라는 말도 있으니까.


R0010708.JPG

숙소에서 도보로 10분, 신주쿠선 '스미요시' 역에서 두 정거장을 더 가면 나오는 '모리시타' 역에서 하차했다. A2번 출구로 나가서 도보로 10여분 정도 걸어가면 된다.



R0010710.JPG 세나 맨션으로 향하는 길에 보였던 재미있는 형태의 주택(맨 왼쪽). 여름에는 벌레가 많이 꼬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늦잠을 잔 탓에 어제에 이어 여행 시작이 늦은 게 사뭇 아쉽지만, 이제 곧 또 하나의 버킷리스트를 이루게 된다는 생각에 설렘이 앞선다. 지난 8월 여행 당시에도 정말 들르고 싶었지만 시간의 제약으로 지나쳐야 했던 곳인지라 더더욱 그렇다.


R0010712.JPG

걷다 보면 저 멀리 두 개의 노란색 기둥이 보이는데, 아무래도 오늘의 목적지 중 하나인 '신오오하시'인 듯하다. 하지만 저리로 가기 전에 우선 들러야 할 곳이 있다. 다리 우측으로 이어진 인도를 따라 조금 더 들어간다.


R0010717.JPG

거기에서 우측을 보면 이런 풍경이 나온다. 맨션숲과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전선들이 특징이라면 특징인, 정말 평범한 사람 사는 곳. 이 가운데에 바로 '세나 맨션'이 있다.


R0010721.JPG

얼마 안 들어가서 마주한 '세나 맨션'(이 있던 자리에 새로 지어진 주택), '아르체 신 오오하시'. 사실 한 번 지나치고 나서야 겨우 발견했는데, 아무래도 드라마 특유의 뭔가가 전혀 느껴지지 않다 보니 머리에서 한 차례 부정이 이뤄졌던 것 같다. '설마 이곳이 그곳이겠어?' 하고.


R0010724.JPG

너무 많이 변해서일까, 하도 예전 작품이라서일까. 이곳을 찾은 사람도 필자 한 명뿐이지만 이 순간을 기념하며 사진을 찍어본다. 드라마 속 허름하고 낡은 빌딩과 비교도 안 될 만큼 멀끔하고 세련되게 바뀌었지만, 그 당시의 흔적은 그 어디에도 없다. 그 세련됨이 사뭇 원망스러워지는 지금.


R0010728.JPG
R0010727.JPG

이리보고 저리 봐도 영락없는 '보통 맨션'이지만 열심히 둘러보고 또 둘러본다. 남의 집을 대놓고 찍고 있어 이상하게 보일 순 있겠지만, 그런 시선에 대한 걱정보다 그 당시의 흔적을 조금이라도 찾아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큰 지금이다.


R0010732.JPG
R0010733.JPG

발길이 좀체 떨어지지 않긴 하지만, 추후의 스케줄을 고려해 점심을 먹긴 해야 한다. 주변이 완전 주택가라 식당 자체가 적은 데다 그마저도 2시가 넘어 브레이크 타임에 들어간 상황이었는데, 다행히 구글맵에서 쉬는 시간이 없는 돈카츠집, '미요시야(三好弥)'가 눈에 띄었다.


R0010735.JPG
R0010736.JPG

그렇게 들어온 미요시야의 내부. 실내는 작고 지저분한 느낌도 있지만, 입구 쪽 벽을 뒤덮고 있는 만화책들을 포함해 곳곳에 느껴지는 세월의 흔적이 나름 친근하기도 하다. 여러 가지 메뉴도 많았는데, 그래도 돈카츠 전문점이니만큼 따뜻한 커피가 포함된 800엔짜리 가츠동 세트를 주문.


R0010738.JPG
R0010739.JPG

먼저 나온 카츠동. 따뜻한 미소시루로 먼저 속을 풀어보자. 일반적으로 깔끔한 미소시루들과 달리 약간 쿰쿰한 맛에, 미역국 대신 먹어도 될 정도로 미역이 한가득 풀어져 있는 게 특징이다.


사실 메인인 카츠동은 큰 특별함 없는 맛이다. 바삭한 걸 좋아하는 필자 입장에서는 간장 베이스 국물에 푹 젖은 돈카츠가 마이너스 요소이기도 했고. 하지만 런치 타임이 한참 지난 조용한 주택가에서, 간편하면서도 든든하게 한 끼 식사를 할 수 있어 좋다는 인상이 더 강했다. 아마 이 식당이 1996년 당시에도 있었다면, 세나 역시 이곳에서 한 번쯤은 식사를 하진 않았을지.


R0010743.JPG

식사가 끝나기 약간 전에 나온 진한 커피. 주인장께서 여러 종류의 곁들임용 과자도 주셨는데, 일본에서, 그렇게 칼 같은 나라라는 일본에서 이런 푸근한 인심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 있긴 하구나 싶다. 간식을 한 번에 많이 먹는 편은 아니라 주머니에 감사히 챙겨놓는다(추후 지친 여행길에 정말 큰 도움이 됐다). 아무튼, 겉보기에만 친근한 곳이 아니어서 좋았던 돈카츠 전문 식당 '미요시야'였다. 잘 먹고 갑니다.


R0010745-1.JPG
R0010746.JPG

식당에서 나와서 만난 이름 모를 열매. 그냥 지나칠 법도 했건만 워낙 색이 화려하고 잘 익었다 보니 셔터에 손이 절로 간다. 예전에는 이런 것들이 사소해 보이기만 했는데, 이제 보니 도시에 색을 덧칠해 생기를 불어넣는 효과가 확실히 있구나 싶다.


R0010750-1.JPG

십여분 정도를 걸어 도착한 다음 행선지는 큰 다리인 '신오오하시'. 한국어로도 '새로 지은 큰 다리'라는 뜻인데, 이 또한 롱베케이션 주인공 일행이 종종 지나다니던 다리로 유명한 곳이다. 사실 드라마에서 본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이 또한 나름 의미 있는 장소이니 팬 입장에서는 지나칠 수 없는 곳. 그리고 다리에 올라 뒤를 돌아보는데...


R0010759.JPG

아, 있다. 그 당시의 풍경이.


어딘지 소박하면서도 슴슴했던 그 모습이 여전하다 보니 그 당시의 감정도 얼핏 되살아난다. 그래, 내가 이런 걸 느끼려고 이번 여행을 왔었지. 그도 그럴 것이, 앞에 보이는 '멘타이코 카네후쿠'(明太子 かねふく, 명란 카네후쿠라는 뜻) 간판이 보이는 빌딩을 비롯해 세나 맨션 이외의 빌딩들은 많이 남아있는 상태라고.


R0010756.JPG
스크린샷 2025-01-11 오후 7.27.27.png

다리 기둥의 동판에는 머언 과거 이 다리가 지어지던 당시의 모습이 새겨져 있는 듯하다. 오른쪽 사진에 보시면 아시겠지만 드라마에서도 이를 배경으로 한 장면이 있을 정도.


R0010754.JPG

신오오하시를 끼고 흐르는 널찍한 '스미다 강'. 사람들의 왕래도 적고, 생각보다 조용하다 보니 이래저래 분위기에 취하기 좋은 조건이다. OST를 귀에 꽂고 주욱 들으니 더욱 강해지는 드라마의 여운.


R0010770.JPG 혼자서 카메라 삼각대를 들고 한 시간 여를 씨름하다가 건진 한 컷. 남들이 보기엔 별 것 아니어 보여도 나에게는 더없이 특별해 보이는, 그런 풍경이다.

날씨도 흐리고, 이전의 그 모습도 아니지만 이번 여행을 통틀어서 가장 오래 머물렀던 스팟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처음에는 이곳저곳 사진을 찍을 요량이긴 했지만, 있으면 있을수록 점점 나 자신이 위로를 받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에 생각 이상으로 오래 발길이 머물었다. 아마도 나 역시 일을 그만두고 다시금 '롱 베케이션'을 보내고 있는 상태였기에 더더욱 그랬던 것이겠지.


영원한 건 절대 없다지만, 그 와중에도 변하지 않는 것들 덕분에 이런 추억들을 이어갈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함을 느끼는 지금이다. 내가 소중히 여겼던 과거의 한 순간에 머물면서 위로를 받는 기쁨을 알 수 있었던, 그렇기에 이번 여행에서 가장 특별했던 곳 중 하나로 꼽고 싶다. 역시, 와 보길 잘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