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산 투어 #1. 자전거 타고 오오이시공원으로
여행 6일 차, 오전 7시. 다소 이른 시간이지만 출발이 사실 많이 늦었다. 이미 6시 45분 시부야 발(發) 고속버스를 타고 후지산이 잘 보인다는 명소인 '카와구치호수'(카와구치코)로 향하고 있어야 했건만...
오늘의 목적지, 후지산은 날씨가 좋아야 볼 수 있고 도착해서도 이동 거리가 길다. 그래서 일찍 움직이지 않으면 일정을 제대로 소화할 수 없어 빨리 움직이는 게 핵심인데, 하필 그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것이다(알람을 듣고 '조금만 더 자자'며 잠깐 눈만 안 감았어도...). 여튼 부랴부랴 티켓을 취소하고 버스를 다시 예매해 시부야로 향해본다.
※참고: 도쿄~카와구치코 행 고속버스는 인기가 많아 예매를 하지 않으면 자리가 없는데, 이날만큼은 다행히 남아있는 티켓이 하나 있었다. 가격은 편도 2100엔.
그렇게 도착한 시부야마크시티(시부야 고속버스 터미널).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카와구치코 행 8시 출발 버스를 타려고 티켓을 내미니 버스 기사님이 갑자기 한 말씀하신다.
이거, 신주쿠 발 티켓이군요.
여기는 시부야입니다.
그렇다. 이전에 예매했던 건 시부야 발이 맞지만, 새로 예매한 티켓은 신주쿠 발 티켓이었던 것이다. 와... 신주쿠랑 시부야를 착각하다니... 뭐 충분히 그럴 수도 있긴 하나(?) 하필 이 타이밍이라고? '어떻게 탈 수 없겠냐'라고 기사님께 사정해 보지만 어림도 없다. 뒤의 사무실에 달려가 다른 티켓이 없는지 확인해 보지만 이미 오늘 일자는 매진. 설상가상으로 이미 산 티켓도 취소 불가능.
돈은 돈대로 날렸고, 스마트폰으로 버스 예매표를 몇 번이나 새로고침 해보지만 자리도 날 기미가 없다. '하... 이렇게 미적거릴 시간이 없는데...' 아침부터 제대로 꼬인 일정. 떠나가는 버스와 함께 필자의 멘탈 역시 떠나간다.
하지만 이렇게 포기하면 다신 후지산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르지 않나. 어떻게든 정신을 부여잡고 구글맵으로 다시금 경로를 검색해 보니 '주오소부선 쾌속' 열차를 타면 오전 중에는 어떻게든 카와구치코 역에 도착할 수 있단다. 부랴부랴 열차를 타러 신주쿠 역으로 가 본다.
그렇게 잡아 탄 주오소부선. 알고 보니 미리 좌석을 예매하지 않으면 앉아서 갈 수 없는 시스템이라 어쩔 수 없이 통로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KTX와 비슷한 개념이로구나.
얼마 안 있으니 역무원께서 다가와 승차 요금을 계산하라신다. 큰 금액이 될 줄 알았는데 어라? 1880엔이면 버스 티켓보다 싸다. '이거 버스를 못 탔다고 아쉬워할 필요가 전혀 없었는데?' 하는 생각에 좋아지는 기분. 여유도 생겼겠다, 진즉에 사놓은 말차 바움쿠헨을 꺼내 허기를 달랜다.
그렇게 오전 11시 20여 분에 카와구치코역 도착. 개찰구에 스이카를 찍으니 추가로 돈이 붙어 편도 교통비로만 총 4383엔(날린 버스 티켓 값까지 더하면 6483엔)이 나갔다. 어쩐지... 사람들이 고속버스를 일찍부터 예매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어떻게든 오전 중에 도착했다는 안도감과, 그 과정에서 날린 돈에 대한 아쉬움으로 만감이 교차하는 지금.
그래도 저 너머에 어렴풋이 보이는 후지산을 보니 잘 왔다는 생각이 앞선다. 흐릿하게 보여 좀 아쉽긴 해도, '어떻게 오늘 중에는 구름이 좀 걷혀서 제 모습을 보여주지 않겠나'하는 기대를 품게 만드는 후지산의 모습.
일단 오늘 목적지를 다 돌아보려면 자전거 대여가 필수이므로 렌털샵을 찾는 게 급선무다. 인터넷에서 '일반 자전거로는 다 돌아보기가 힘들다'라는 후기가 많았던 만큼 전기 자전거를 대여하는 게 목표인데, 애석하게도 일반 자전거 대여소가 훨씬 많은 데다 늦게 도착해서인지 전기자전거 대여소도 전부 매진이란다.
그렇기에 어쩔 수 없이 일반 자전거를 빌렸다(가격은 짐 보관 300엔까지 합해 2800엔). 지금이 오후 12시 30분인데, 오후 5시까지 반납해야 하는 만큼 지체할 시간 따윈 없다. 첫 목적지는 넓은 카와구치코를 배경으로 후지산이 보인다는 오오이시공원(大石公園). 내 두 다리를 한 번 믿어보자.
간만의 자전거 라이딩이라서일까, 풍경이 너무 좋아서일까. 카와구치코는 없는 여유를 짜내서 사진을 찍게 만드는 매력이 있는 곳이다.
시간이 촉박해 점심 대신으로 먹는 오후의 홍차와 칼로리메이트(흔히들 알고 계신 칼로리바란스의 원조격). 오후에 마셔서 그런지 더욱 감미로운 오후의 홍차다.
정말 샛노랗게 피어있던 은행나무. '뭘 이런 것까지 찍고 앉았나' 싶으실 수도 있겠는데, 안 찍고 갔으면 후회할 뻔했다(왜인지는 곧 나온다).
은행나무 곁에서 화기애애하게 사진을 찍고 계신 노부부 커플. 먼 미래 나와 와이프의 모습이었으면.
오오이시공원로 향하는 길에 들른 '단풍회랑'(もみじ回廊). 단풍이 흐드러지게 피는 것으로 유명해 핵심 스팟으로 꼽히는 곳인데, 어디 보자...
어... 단풍이 있는데요, 단풍이 없습니다.
예.
아직 푸릇푸릇하기만 한 이곳, 아무래도 조금 이르게 온 듯하다. 다행히도 필자는 이것만 보기 위해 이곳을 찾은 건 아닌 만큼 아쉬움이 덜 하다만, 단풍을 보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면 그 시기를 정확하게 특정해야 할 듯하다. 분명한 건 단풍이 한창일 때에 여기만큼 멋진 곳을 찾기는 힘들 거라는 사실. (아무래도 이 기간에 비행기 티켓이 유독 쌌던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힘들지만 다시 힘을 내서 내달리는 자전거. 카메라에 담고 싶을 정도로 멋진 풍경들이 지천에 널렸다. 날리는 갈대와 푸른 물살, 반짝이는 윤슬.
그렇게 좀 더 가다 보면 넓은 주차장이 나온다. 아무래도 오오이시공원에 도착한 듯하다. 사진으로 보면 얼마 안 걸린 듯해도, 자전거 대여 이후 무려 1시간 반 가량이 소요됐다.
자전거를 주차하고 나면 바로 옆에 핑크뮬리가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생각 이상으로 강렬한 분홍색. 옛날 빗자루의 재료인 댑싸리와 흡사하게 생겼는데, 과연 둘이 무슨 관계일지. (알고 보니 이게 댑싸리였다...! 핑크뮬리는 더 하늘하늘하게 생겼고 색도 더 연하다.)
이외에도 잘 가꿔진 꽃과 정원이 보인다. 그 너머로 시계탑 같은 건물도 있고.
핑크뮬리(가 아니고 사실은 댑싸리)를 배경으로 찍어보는 후지산. 이 정도라도 보이는 게 어디인가 싶다. 처음에는 구름이 자욱해서 내가 알고 있는 '눈 덮인 후지산'이 잘 보이지 않는 건가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정상에 만년설이 아예 없어 보이는 게 맞구나 싶다.
나중에 찾아보니 그간 후지산의 첫눈 관측 평균일이 10월 2일이라고 하는데, 지난 2024년은 무려 130년 만에, 그러니까 기록이 시작된 1894년 이래 가장 늦은 11월 8일에야 첫눈이 왔다고 한다(필자가 여행 갔던 당시가 11월 4일이었다). 이미 만년설은 녹아 눈이 없는 상태라고. 지구온난화의 심각성이 피부에 와닿는 순간이다.
그래도 가을의 정취만큼은 완연한 이곳. 단풍 때문에도 그렇지만, 카와구치코는 이런 풍경들을 보기 위해서라도 가을에 방문하는 게 제일 좋은 곳이 아닐까 싶다.
큰 시계탑 건물에 도착하니 카페에서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판단다. 이래 봬도 카와구치코의 명물 중 하나.
생각보다 아이스크림 줄이 길게 늘어서 있지만, 기다리는 시간이 아깝진 않다. 무슨 맛으로 먹을지에 대한 고민은 진지할수록 좋기에.
고심 끝에 주문한 블루 로즈 & 라벤더 맛. 무난해 보이는 포도맛 같은 것도 있지만, 이건 여기서만 먹을 수 있는 맛일 것 같아 한 번 시켜봤다. 생각보다 꽃 맛이 강하지 않아 좋았는데, 꽃 맛을 시켜놓고 꽃 맛이 안 나서 좋았다는 게 무슨 말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으니 묻지 마시길(그냥 맛있었다고 받아들이시면 모두가 편합니다).
아무튼, 현재 시각 2시 39분. 마음 같아서는 여기서 이걸 먹으며 한 껏 여유를 부리고 싶지만, 가봐야 할 곳이 두 군데나 더 있는 만큼 주차장까지 걸어가며 아이스크림을 해치운다. 어우 이 시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