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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부지 유부남, 나 홀로 도쿄 일주일 #12

후지산 투어 #2. 아쉬움과 분노의 자전거 라이딩

by 김트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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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솔로 여행 여섯째 날, 후지산 투어 제2탄이다.


지금은 오오이시공원에서 자전거를 타고 '아라쿠라야마 센겐 공원'으로 가고 있다. 클룩(Klook) 같은 유명 여행 예약 사이트에서 파는 후지산 투어 프로그램 중 한 코스로 꼭 끼어있는 명소 중 하나인데, 필자는 해당 프로그램에 따라가면 혹여 시간에 쫓겨 여유 없는 여행이 될까 걱정돼 셀프 투어를 택했다(원래 고생을 사서 하는 편). 대체 왜 차가 쌩쌩 달리는 터널 속을 달리고 있냐 물으신다면 '구글맵이 이리로 가는 게 가장 빠르다고 했다'라고 답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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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다시피 왼쪽 위의 오이시공원에서 우측 하단의 아라쿠라야마 센겐공원까지는 도보로 1시간 45분 여가 걸린다(자전거 경로 예상 시간은 나오지 않는다). 필자가 달리는 터널은 중앙부 상단의 도로가 끊기는 지점에서 지도 하단에 다시 이어지는 부분까지로, 그 길이가 상당하다. 그나마 터널에서는 내리막이 있어 신나게 달릴 수 있는데, 터널에 도달하기까지가 꽤나 고달픈 코스이니 셀프 투어를 하고 싶으신 분들께서는 참고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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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널에서의 미친듯한 내리막에 탄력을 받아 50분 만에 도착한 아라쿠라야마 센겐 공원. 투어를 온 외국인들도 많지만, 일본인 관광객들도 꽤나 많이 찾는 곳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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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객들을 맞는 큰 도리이(일본 신사 입구의 문). 이곳은 그나마 단풍이 잘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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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쿠야 히메(공주) 계단이라는데, 사실 중요한 것은 이름이 아니라 계단이 무려 398개나 된다는 것이다. 별것 아닌 숫자처럼 보이지만, 자전거를 두 시간가량 타며 피로가 쌓인 상태로 오르기에는 결코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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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 출몰 주의'라는데... 한 번 나와줘도 재미있지 않을까 싶다. 내 옆 사람보다 빠르기만 하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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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오르면 멋진 붉은 탑이 하나 보인다. 나중에 조사해 보니 메이지 시대(1868년~1912년) 이후 전쟁 도중에 사망한 지역 사람들의 유해를 모시는 '충령탑'이라는데, 만약 세계 2차 대전 전사자도 포함돼 있다고 하면 전범이 잠든, 그러니까 피해국인 우리 입장에서는 씁쓸한 곳이겠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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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탁 트인 마을 전경을 감상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오를만한 보람은 있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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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이렇게 좋은데도 흐릿하게만 보이는 후지산이다. '날씨가 좀만 더 좋았더라면 절경이었을 텐데...'라는 생각에 하늘이 조금은 원망스럽기도 하지만, 오늘 중으로 날씨가 좀 더 좋아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으며 마지막 스팟으로 이동하기로 한다. 최종 목적지는 역시 후지산 투어 코스 중 하나인 '히카와 시계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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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로 십여분을 달리면 이런 곳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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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너를 돌아나가면 사람들이 몰려 사진을 찍고 있다. 왜 저렇게들 모여있는고 하니...


후지산인터넷유명명소,텐티타운,오시노핫카이,가와구치호수,로손편의점당일여행(도쿄역또는신주쿠역출발).jpg 히카와 시계점에서 찍은 사진. /출처: 클룩

바로 이런 로맨틱한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 사이트에 올라온 사진이라 보정이 많이 돼 있는 것 같긴 한데, 과연 실제로는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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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잔~~~~~



이라고 하기엔 뭔가 좀... 필자의 사진 솜씨 및 장비도 아쉽지만, 워낙 날씨 자체가 좋지 못해 멋진 사진을 건지기에는 한계가 많은 환경이었다(심지어 이것도 보정을 상당히 많이 한 결과물). 아쉬운 마음에 저 앞에 텅텅 빈 곳에서 찍어보고 싶기도 했으나, 교통경찰 두 분이 대기를 하시면서 돌발행동을 저지하고 계셨던 만큼 이 이상의 뭔가를 하기는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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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우실까 봐 위의 사진에 보정을 왕창 해봤다. 이렇게 보니 분위기가 좀 더 살긴 한다. 여성분들이 이래서 인스타 할 때 보정을 그렇게 열심히들 하시는 구ㄴ...


아무튼... 이렇게 후지산 명소 투어가 끝났다. 어딜 가도 뭔가 20~30% 부족한 풍경 밖엔 없었지만, 포토샵으로 그려 넣은 듯 비현실적인 후지산의 정경을 볼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만족스럽다. 혹여 가이드나 셀프 투어를 고민하고 계신다면 일기예보를 보고 날을 잘, 정말 잘 골라서 와 보시길. 그래도 못 보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하니 마음의 준비 단단히 하시고. (셀프 투어를 하고 싶으시다면 튼튼한 두 다리, 그리고 전기자전거를 준비하시라. 혹여 필자처럼 일반 자전거를 빌리셨다면, 그리고 장거리 코스를 계획하셨다면 각오하시길...)


R0011727.JPG 히카와 시계점 근처에 있었던 분위기 있는 고택. 알고 보니 국가등록유형문화재인 '카쿠다오모야'라는 식당이었는데, 지금은 영업하지 않는다고.

이제 시간은 어느덧 4시 15분. 반납 예정 시간인 5시까지 45분가량이 남은 가운데 아까 터널에서의 긴 내리막만큼 긴 오르막이 필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 이젠 페달 밟을 힘도 없다. 결국 내려서 걷기 시작. 하지만 이대로 가면 제시간에 반납이 어려울 듯해 음악의 힘을 빌려보기로 한다.


그런데 케이스에서 꺼낸 에어팟 한 짝이 손에서 떨어지더니 자전거 프레임과 바퀴, 돌부리에 차례로 튕긴 후 도랑의 구멍으로 쏙 빠지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뚜껑이 한국처럼 얇은 철로 된 것이 아니라 묵직한 돌이라 들리지도 않는다. 분노로 인해 끊어진 이성의 끈, 너무 열이 받은 나머지 고성이 터져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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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 한참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도 전진, 또 전진(이런 말하면 좀 없어 보이지만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한 행동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렇게 분노를 연료 삼으니 발에 다시 힘이 돌아와 자전거 페달을 밟을 정도가 됐고, 덕분에 마감을 10분 남기고 자전거를 반납할 수 있었다. 과태료는 면했지만, 그 하나를 위해 치른 희생이 너무 컸다. 참고로 에어팟 프로 2 한 짝의 가격은 15만 원.


우측의 사진은 '혹시 이야기에 MSG를 친 거 아니냐?'는 의심을 살까 첨부한 증거 자료다. 마지막 사용 위치(오오이시공원)가 표시된 것이다 보니 떨어뜨린 곳과는 거리 차이가 다소 있다만, 지금도 시즈오카현 도랑 어딘가에 필자의 왼쪽 에어팟이 떨어져 있음은 확실하다. 시간이 다소 흐른 지금 봐도 개떡같음이 몰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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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모로 쓰린 속을 부여잡고 먹는 컵 쇼유라멘과 계란샌드위치(타마고산도). 라멘은 무난한 '컵 쇼유라멘 맛'으로, 기대했던 만큼의 뭔가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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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먹고 나니 이미 어두컴컴해진 카와구치코 역. 19시 20분 버스를 기다리며 역내의 기념품샵도 둘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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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쿠행 버스에 그려져 있는 유명 아동 만화, '토마스와 친구들'의 주인공 토마스. 에어팟을 잃어버리고 심기가 불편한 터라 저 표정이 상당히 기분 나쁘게 느껴진다. 저걸 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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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탑승한 버스. 내일 뭘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 옆 사람의 코 고는 소리가 안쓰럽다는 생각 등을 하고 있자니 눈이 절로 감긴다. 시부야 마크시티(버스터미널)에 도착하니 10시 40분이 좀 넘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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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먹었던 라멘으론 아쉬워 숙소 근처의 편의점을 다시 찾았다. '컵라면의 원조'라 일컬어지는 닛신의 치킨라멘과 함께 맛나 보이는 흑임자빵, 그리고 최근 전 이종격투기 선수 추성훈의 유튜브에서 등장해 유명해진 직접 만드는 스무디를 샀다. 가격은 총 합 766엔. 일단 스무디는 생각보다 맛이 진한데, 스무디 가게에서 먹는 것보다 가성비 면에서 꽤 메리트가 커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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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에 들어와서 마저 먹는 라멘과 흑임자빵. 워낙 맛이 보장된 친구들이다 보니 아까 느꼈던 상실의 아픔마저 사르르 녹는 느낌이다. 생각해 보니 내일모레, 그러니까 8일 차 일정은 오전에 공항에 가는 것 말고는 크게 없는 만큼 사실상 내일이 마지막 일정이로구나. 사실 쇼핑 말고는 크게 도드라지는 일정이 없어 걱정은 되지만, 마지막까지 꽉 채워 보내보겠노라 다짐해 본다. 내 에어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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