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온설 Aug 02. 2020

나의 친할머니

나는 이따금 할머니가 안쓰럽기도 밉기도 하다.


가족이란 단어는 희한하다.


미워서 욕하고 성내다가도 남이 욕하면 화나고, 그러다가도 힘든 일이 있으면 다시 결속되는 이상한 집단이다.


나는 어렸을 때 친할머니와 같이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리만치 애착이 없다.

아마 그건 내가 할머니에게 사랑받은 기억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한 번은 언니가 아파서 수술을 받느라 밤새도록 할머니와 둘이 있던 적이 있다.

종교가 없는데도 그때는 혼자 끅끅 울면서 언니의 수술이 무사히 끝날 수 있기를 불특정 다수의 신에게 빌었다. 당시에 울고 있는 나를 할머니가 다독여줬던 기억이 난다. 할머니와 둘만 남은 상황이 불편하면서도 할머니라도 의지할 어른이 있다는 게 든든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엄마에게 시집살이를 시키고, 아들만 바라는 할머니가 미웠다.

툭하면 나에게 고추 하나 달고 나오지 라고 말할 때마다 속에서부터 화가 치밀어 오르기도 했다. 


결국 작은엄마가 셋째로 아들을 낳았고, 할머니는 본인의 제사를 지내 줄 손자가 생겼다며

엄청나게 좋아하셨다. 우리 집이 큰집이어서 명절이면 친척들이 모였는데,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우리 장손 왔다며 손뼉을 짝짝 치며 반겼다. 부엌에서 엄마와 나 언니 셋이 모여 음식을 만들면서, 나는 할머니한테 인정받지 못하는 우리 엄마가 가여웠고, 아들을 못 낳았다고 구박하는 할머니에 대한 반감이 더 커졌다.

그 많던 제사를 합쳐서 일 년에 한 번만 지내기로 하면서 한바탕 폭풍이 휩쓸고 지나갔다. 

할머니는 더는 제사가 있는 날이나 명절에 우리 집에 오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아빠는 속상하셨겠지만 나는 이 일련의 갈등이 반가웠다.


할머니와 꽤 오랫동안 왕래 없이 지냈다.


그 후 언니가 결혼을 하게 되어 지금의 형부와 인사를 가던 날 나도 같이 갔다.

그날 할머니는 다 큰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언니 친구가 같이 왔냐고 했다.

“할머니. 나 온설이잖아”라고 내 이름을 말하는 순간, 할머니를 포함한 우리는 화들짝 놀랐다. 

내가 다 커서 할머니가 알아보지 못할 만큼의 시간이 흘러있었다. 


지금은 갈등이 풀렸지만, 할머니는 명절 때면 이제는 몸이 아프셔서 오시지 못하신다.


예전보다 늙고, 거칠어진 할머니의 손을 잡고, 잔뜩 마른 모습을 보면 

한편으로 짠하고, 속상하면서도 어렸을 때 기억이 떠올라 미워지기도 한다.




이런 양가감정 속에서 나는 이따금 할머니가 안쓰럽기도 밉기도 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곰돌이 인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