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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설 Sep 12. 2020

첫 다툼

거대한 풍량계를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관령에 있는 양 떼 목장을 가기로 한 날이라 아침 일찍부터 서둘렀다. 


여느 주말처럼 차가 막혔고, 그는 내게 한참 더 가야 하니 눈 좀 붙이라고 했다. 

조수석에 앉으면 피곤해도 자지 않는 게 운전자에 대한 예의라는 생각 때문에 졸린 눈을 부릅뜨며 재승도 졸리지 않도록 계속 말을 걸었다.

휴게소에 들러 아이스커피와 알감자를 사서 그와 나누어 먹고 있는데 라디오에서 에릭남의 ‘괜찮아. 괜찮아’ 노래가 흘러나왔다. 대략 이별 후 괜찮다며 덤덤하게 되뇌는 내용이었다.

에릭남을 좋아할뿐더러, 멜로디가 중독성 있어 자주 듣던 노래였다.

좋아하는 곡이 라디오에서 나오자 반가운 마음에 내가 좋아하는 노래라고 이야기했다. 곡을 가만히 듣고 있던 그는 난데없이 전 남자 친구라도 생각나는 거냐며 쏘아붙였다. 질투 섞인 투정이라고 생각하기엔 그의 말투가 너무 차가웠다. 그의 논리대로라면 이 세상에 연애 중인 커플은 이별 노래를 좋아하면 안 되고, 이별 노래를 듣는 상대는 과거의 연인을 못 잊고, 그리워서 듣는다는 건가? 기분이 상한 나는 “노래가 좋은 거지. 거기서 전 남자 친구가 왜 나와?”라고 반박했다. 


차 안이라는 좁고, 밀폐된 공간에서 더는 말싸움하기 싫어 나는 입을 닫았고, 그도 입을 꾹 다문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감자 냄새와 커피 향이 뒤섞인 차 안의 묵직한 공기에 답답함이 밀려와 숨이 턱턱 막혔다.


그런 상태로 숙소에 도착했다. 냉랭한 그의 태도에 섭섭한 나머지 숙소에 들어가자마자 침대로 가서 이불을 덮고 웅크린 채 눈물로 베개를 적시고 있었다.

그는 그런 나를 달래주지 않고, 소파에 앉아서 한참 있다가 더는 안 되겠는지 방으로 들어와 내 등을 쓰다듬으며 입을 뗐다.


“그만하고 밥 먹으러 가자.”


나는 속상해서 대꾸하지 않았고, 재승은 진정성 없는 목소리로 “일단 미안하다”며 나를 달랬다. 

여행까지 왔는데 계속 울고만 있을 수도 없어서 못 이기는 척 나도 미안하다 했다.


토라져 있는 동안 너무 많은 시간이 흘러 잔뜩 기대하고 왔던 양 떼 목장에는 못 가게 되었다. 점심도 못 먹었던 우리는 근처 식당 아무 곳이나 들어가 점심 겸 저녁을 먹고, 바로 옆에 있는 카페로 갔다. 카페엔 낙서를 할 수 있게 메모지와 펜이 놓여있었고, 벽에는 손님들이 남긴 메모지들이 붙어있었다. 그의 기분이 풀렸으면 하는 마음에 쪽지에 ‘오빠, 아까는 미안해. 우리 이제 싸우지 말자’라고 적어 건넸다. 

재승은 그런 나를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우리는 카페에서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앉아있다, 바람의 언덕이라는 곳으로 드라이브를 갔다. 


매끄럽지 않은 길 위에서 차는 이리저리 흔들렸고, 

우리는 각자 창밖에 있는 거대한 풍량계를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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