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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설 Aug 05. 2020

저 진짜 괜찮은 사람인데 만나봐요

왜 그렇게 사람을 못 믿지?


그날도 여느 때와 같이 피곤한 몸을 이끌고 출근해 컴퓨터를 켜자마자 탕비실로 향했다.

커피머신의 버튼을 누르고, 텀블러로 떨어지는 커피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희주 언니가 들어왔다.


“온설아, 재승 오빠가 나 밥 사주기로 해서 점심에 회사로 온다는데 같이 먹자.”

“저는 괜찮아요. 언니 먹고 와요.”

“같이 가자, 오빠가 너도 같이 오랬어. 팟타이 먹으러 가자.”

괜찮으니 다녀오라고 몇 번 이야기했는데도 계속 같이 가자는 희주 언니의 말에 알겠다 하고 탕비실을 나왔다.  


커피를 마시며 오전 근무를 하다 보니 어느새 희주 언니가 다가와 이제 나가자고 했다. 시간을 보니 12시였다. 우리는 회사 근처 태국 음식점으로 향했고, 그는 먼저 와 자리에 앉아있었다. 이야기해보니 재승의 회사는 우리 회사에서 차로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식사 후, 자주 가는 카페에 들려 커피까지 사 들고 나온 우리는 후딱 지나버린 점심시간을 아쉬워하며 회사로 복귀했다.


볼링장 이후로 또 만날 일은 없을 줄 알았고, 이때까지 그의 나이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얼핏 들은 것 같았지만, 기억나지 않았다. 희주 언니가 나보다 3살이 많았는데 그녀에게 오빠고, 동기니까 대략 언니보다 4~5살 많겠거니 하고 신경 쓰지 않았다.

한마디로, 크게 관심이 없었다.


오후 근무를 하고 있는데 희주 언니에게 카톡이 왔다.


-온설아, 오빠가 너 연락처 알려달라고 해서 알려줬어.

-잉?

-오빠가 나보다 업무 관련해서 아는 것도 많으니까 일하다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봐.

  알아두면 좋을 거야.

-아… 응.


내 연락처는 아까 만났을 때 나한테 직접 물어봐도 됐을 텐데, 굳이 희주 언니를 통해 알아냈다는 게 조금 마음에 걸렸다. 그렇지만 얼마 전 사수가 퇴사를 해서 궁금한 것이 생겨도 주변에 물어볼 사람이 없었는데 같은 직종에 있는 그를 알아두면 언니의 말대로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조금 뒤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희주 언니에게 연락처를 받았다며, ‘주말에 보드 타러 가는 거죠?’라고 묻는 재승의 물음에 당황했다. 술에 취해 한 말이겠거니 했는데 진짜로 가자고 할 줄이야. 적당히 다른 약속이 있어 어려울 것 같다며 거절했다. 그 후로 그는 이따금씩 점심시간과 퇴근 후 내가 일하는 회사 근처로 왔다.

희주 언니와 함께 셋이 또는 재승과 나, 둘이서 저녁을 먹기도 하며 자주 어울렸다.

간헐적 만남을 이어오던 어느 날, 그와 저녁을 먹고 집으로 가는 방향이 같아 함께 지하철을 탔다.


그날따라 그는 ‘어두워서 걱정된다, 집 앞까지 바래다주겠다’하며 나를 따라 내리려 했다.

바래다준 뒤 그가 다시 역으로 돌아와 지하철을 타고 가야 하는 상황이라, 괜히 그를 번거롭게 하는 것만 같아 부담스러워 극구 거절했다. 하지만 재승은 기필코 나를 따라 내렸다. 나는 그러면 역 앞 편의점까지만 같이 가자했고, 재승은 본인이 집 앞까지 가는 게 불편하냐며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온설씨, 나 어때요?”

“네?”

“나 진짜 괜찮은 사람인데. 나 온설씨 마음에 드는데, 만나 볼 생각 없어요?”

“네? 서로 잘 모르고, 몇 번 보지도 않았는데요...?”

“만나면서 알아가는 거죠. 왜 그렇게 사람을 못 믿어요? 이전에 이상한 남자들만 만났었나 보다.”

"오빠. 저 궁금한 게 있는데 오빠  34살 맞죠?

희주 언니한테 그렇게 들은 것 같아서요.”

“나 36살이에요. 원래 다른 일 하다가 시험 준비를 늦게 해서 동기들보다 나이가 좀 있어요. 왜 그렇게 사람을 못 믿지? 나 진짜 괜찮은 사람이에요. 잘 생각해봐요. 온설씨가 불편해하니까 오늘은 여기서 이만 갈게요. 걱정되니까 집에 들어가면 도착했다고 연락 줘요.”


혼자 걸어가며 생각했다.


‘세상에… 나보다 9살 많네?’


다음 날 회사에 가자마자 희주 언니에게 오빠 나이에 대해 물어봤고 “만 나이로 말해준 건데? 나이가 뭐가 중요해.”라며 대수롭지 않게 웃어 보였다.

딱히 나이 차이에 대한 거부감이 있던 건 아니었지만, 어쩐지 물어보기 전까지 나이를 제대로 대답해 주지 않은 점이 조금 의뭉스러웠다. 자신을 만나 볼 생각 없냐는 말에 내가 선뜻 대답하지 못하자 재승은 몇 번 더 만나보며 생각해 보라 했고, 그는 주말에도 자신과 함께 시간을 보내자 했다.

그럴 때마다 항상 자신의 차를 끌고 나를 집 앞까지 데리러 왔다. 도로 위에서 깜빡이를 켜지 않고 다른 차가 끼어드는 순간이나 운전 중 짜증 날 만한 상황에서, 재승은 “그럴 수 있지”라고 혼자 중얼거렸다. 그 모습이 여유롭고, 매력적으로 보였다. 본인 입으로 괜찮다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옅은 호기심이 올라왔다.




나는 점점 그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다.


그는 주말마다 차가 있어야 갈 수 있는 서울 근교의 맛집과 산책로로 나를 데려갔다. 이전 연애에서는 목적지에서 만나 북적거리는 서울 중심지에서만 데이트하곤 했었는데, 그와 만나며 집 앞까지 차로 데리러 오고 데려다주는 데이트를 하다 보니 어쩐지 진짜 ‘어른 같은’ 데이트를 하는 것 같아 신기하고, 재밌었다. 또 치아교정 중이라 식사를 하고 나면 교정기에 음식물이 끼어 바로바로 양치해야 했는데 그때마다 그는 수돗물 대신 생수로 헹구라면서 한 병씩 챙겨주었다.

이런 사소한 배려들로 그에게 좋은 인상을 받았고,

그날 저녁 정식으로 만나보자는 재승의 고백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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