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르는돌 Feb 28. 2019

그래서 이번엔 잘 될까요.

얄팍한 꼼수는 금세 휘발됐다.

실패를 추스르고 새로운 사업을 시작해야지 마음먹었을 때 처음 든 생각은 '이번엔 돈이 될만한 일을 하고 싶어.'였다. 핀테크니 빅데이터니 인공지능이니 하는 것들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그런 업을 하고 있는 회사에 잠깐 취업을 해볼까 기웃기웃거렸다.


단순했다. 관심사를 옮겨보고 싶었다. 아주 유망해 보이는 분야로.


정치외교학을 전공했지만 희한하게 졸업 후 내 커리어의 모든 발자취는 '문화예술' 분야에 있었다. 월급이 반으로 깎이고 산업의 꽤 어두운 단면을 봐가면서도 이상하게 생각은 그쪽으로만 흘렀다. 이쪽에 발 디디면서 "왜 하필 이 어려운 곳에..."란 말 참 많이도 듣고 다녔다.


그래. 생각해보면 꼭 이 필드에 얽매여있을 필요가 없지 않은가. 잘 돌아가지도 않는 비즈니스를 붙잡고 고생했던 지난날의 내 영혼을 쓰다듬으며, 기획자로서의 역량을 다른 분야에서 꽃 피워보자 싶었다.


결심은 좋았지만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4차 산업혁명과 관련한 책들을 끼고 지식 흡수 모드로 차분하게 잘 읽어가고 있었다. 관련 회사들 중 꽤 흥미로워 보이는 곳들도 스크랩해뒀다. 그런데 어쩌다 마주하게 된 창업 뉴스에서 일전에 나도 한번 생각해봤던 아이템으로 잘 나가는 스타트업의 기사가 뜨자 그때부터 주체할 수 없이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이 뛴다. 평화가 깨지고 쏘울이 팔팔 튀는 느낌이다. 생각 해본적은 있지만 '잘 안될 거야.' 하고 지지부진 가슴속에 담아줬던 것들을 누군가는 일찍이 실행해서 멋지게 운영하고 있는 거다.


-'일상예술화'는 오래된 내 개인 미션이었다. 크리에이터 마켓 플랫폼도 만들어보고, 플리마켓도 열어보고, 콘텐츠도 만들어보고 자체제작상품도 만들어봤지만 수익모델 생각 없이 하고 싶은 일만 한 우리의 말로는 폐업이었다. 하지만 누군가는 계속해서 사업으로 일궈내고 있다. 취미생활키트 하비박스, 그림대여서비스 오픈갤러리, 그림정기배송서비스 핀즐, 재능마켓 탈잉 등 누군가는 일상에 문화를 불어넣는 일을 새로운 방식으로 해내고 있었다.


게다가 환기를 위해 방문한 독립책방은 또 한 번 외면하고 싶은 내 관심사를 여지없이 드러내버린다. 유독 한 섹션에 내가 읽었던 책들이, 익숙한 저자들이 우후죽순 모여있는 것이다. 도시문화, 골목문화, 예술경영, 일상문화, 크리에이터와 같은 것들이다. 퇴근 후 많은 날들을 그 책들을 읽으면서 두근거려 했었다. 내 책장을, 지난 날들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그 섹션 앞에서 조용히 한숨을 몰아 쉰다.



"4차 산업혁명은 개나 줘버려."


아무래도 난 아닌가 보다. 마치 내 이상형은 댄디한 도시남인데 자꾸만 밭에서 오이농사짓는 시골남자에게 끌리는 그런 기분이다.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차분히 정리해본다. 졸업 이후 계속 공부하고 발 담았던 분야니 산업 이해도도 높은 편이고 네트워킹도 잘 형성돼있다. 게다가 시대가 변해가는 것이 느껴진다. 착실히 회사 일만 묵묵히 하던 시대가 가고 사람들은 다른 무엇인가를 찾는다. 내가 기획만 잘 해내면 시기가 적절할 것 같다.


그렇게 억지로 만들어보려한 미래산업이란 관심사는 순식간에 나를 떠났고, 나는 새로운 서비스를 기획했다.




2013년, 내 모든 결정들이 의심스러웠던 어느 날 페이스북에 남긴 글이 있었다. 이때의 결심이 떠올랐다.


2013.12.10
오늘 회의 중에 든 생각이다.
 엔젤은 남자친구와 함께 더 오래 있고 싶어서 귀국을 미루고 대학원에 진학했었다. 이성으로 모든 판단을 내리던 당시의 나에게는 그녀의 선택이 무모하다 느껴졌다. 하지만 몇 년 뒤 메이가 결혼을 하고 남자의 직업을 쫒아 미국으로 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진심으로 아름답다 생각했고 잘 된 일이라 축복했다. 가치관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 사람과 사랑은 인생의 수많은 선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다. 또 우연은 기회가 되고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래. 이성으로 도출하려는 선택보다 본능에 의지한 판단이 훨씬 더 행복한 결말을 가져다줄지도 모른다. 여행이 좋아서 양치는 쉐퍼드가 된 어느 소년처럼, 내가 좋아하는 그것 나를 가슴 뛰게 하는 그것에 많은 이유를 붙일 필요는 없을 거다. 우연이 계획 밖이라고 몰아낼 필요도 없고 감정이 이성 밖이라고 쫓아낼 필요도 없다. 유연하고 과감하게 가보자.

 

그때도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고 같은 결심을 했었다. 가슴이 뛰는 방향이 내 이성과 혹은 세상이 가리키는 방향과 다르다고 무시하지 말기로. 많은 부분을 경험하고 취향과 지식과 관계가 생겨난 후에도 여전히 마음이 같은 곳으로 향하고 있다. 어떤 업이 내 커리어에 약이 될지 하는 식의 피상적 계산들은 유보하기로 했다.


올해는 아주 뜨거운 해가 될 것 같다. 레벨업 시킨 더 날카로워진 창을 가지고 전쟁터로 나갈 준비를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창업 정부지원금 꼭 받아야 할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