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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르는돌 Jun 02. 2019

지원자도 회사를 고릅니다.

아무데서나 일하고 싶지 않거든요.

 

이번 구직활동의 내 컨셉은 '기고 기면, 아이면 아니다'였다. 마음에 들지 않는 회사에서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고, 실력 있는 구성원들과 부대끼고 싶었다. 그런데 역시는 역시. 구직활동은 사람을 몹시 작게 만들어 나갔다.



2번의 최종면접이 있었다.


첫 번째 회사는 생각보다 규모가 있는 곳이었다. 실무진들은 나를 몹시 좋게 봐 주었고 나 또한 실무진과 잘 맞을 것 같은 느낌었다. 대표님은 웬 만치 실무단의 의사를 존중한다고 하니 '아, 이 회사에 다니게 되겠구나' 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대표 면접을 본 날. 대혼란이 시작됐다. 대표라는 사람의 알 수 없는 매너 때문이었다. 그는 회의실로 들어오며 기다리게 해서 죄송하다고, 업무상 급한 메일이 있었다고 설명하며 누차 사과했고, 억양과 얼굴 표정도 적절히 친절했다. 겉으로 보여지는 매너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면접이 시작되자 그는 한 시간 반 동안 내 인생 전반에 대한 질문들을 구석구석 하기 시작했는데 그 깊이가 무례하다 느낄 만큼 깊었다.


"그러니까. 중, 고등학교 때 뮤지컬을 자주 보러 다녔고, 공연에 대한 관심으로 문화계 커리어를 시작하게 됐다는 건데. 그럼 왜 CJ E&M 같은 회사에는 가지 않았어요? 언제든 쓰면 붙을 거라 생각했나요? 하하하하"


이런 걸 농담이라고 하고 있는 걸까. 그는 내가 왜 좋은 학교 나와 '이런' 선택들을 했는지 지나치게 많은 설명을 원했다. 내 인생 모든 단면의 퍼즐 조각을 맞추고 싶어 했다. 미소를 희미하게 드러내며 다 꿰뚫고 있다는 듯한 오만한 태도를 비췄다. 그도 지금은 IT회사 대표지만 한 때는 문화계의 큰 손이었기에 내가 걸어온 길에 대한 권위를 드러내고 싶었던 걸까.


학교 동아리 선배가 텃세를 부리는 듯한 태도로 내내 팔짱을 끼고 있는 것도 잊지 않았다.



구직자는 왜 '을'이 되는가.


그런데 더 혼란스러운 것은, 내 감정이었다. 처음 문을 나오면서는 그저 '헤헤' 웃고만 나온 내 자신이 너무나 한심하고 싫었다. 그런데 점점 그 면접 자리를 기분 나빠하고 있는 나를, 입사 거절을 고민하는 나를, 내 스스로가 묘하게 꾸짖고 있는 게 아닌가.


"아직 배가 덜 고프구만?"

"이렇게 부족한데도 뽑아줬으면 감지덕지지!"

"그깟 면접장에서 대표 인상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욕을 한 것도 아니고!"


신중하게 지원서를 써냈던 것처럼, 면접도 신중하게 고민하고 거절하면 그만인데. 거절하면 루저가 될 것 같은 처절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거절했다가 다른 회사들에 끝내 합격하지 못하면 어쩌지 싶은 불안감도 엄습했다. 구직활동이 너무 오랜만이라서 일까. 모든 게 불확실했다.



'쎄이다'를 무시하지 말라.


안 되겠다 싶어, 나와 비슷한 별종의 길을 걸어온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도 스타트업 창업을 했다가 말아먹고 현재는 회사에 들어가 있었다. 그런 그녀가 자신의 경험을 설파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런 걸 우리는 쎄이다(쎄하다+레이다)라고해. 직감은 틀리지 않아. 얼른 도망가!"


더 좋은 회사, 잘 맞는 회사가 분명히 있을테니 걱정 말라고 다독이며, '을'이라는 구렁텅이에 빠진 나를 빼내 주었다.


그렇게 그녀의 도움을 받아 어렵게 어렵게, 입사를 거절했다.


결과적으로 그 '거절'의 선택은 내 인생 최고의 선택 TOP5에 드는 일이 되었다. 두 번째로 만난 회사가 정말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규모가 더 작았고, 더 성장 가능성이 열려있었으며, 구성원들은 더 능력 있었고, 면접 질문은 핵심을 관통했다.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내가 찾던 회사는 이런 회사라고.


나는 이 회사에 입사하기로 했다.

 


직감이 안내한 길로.


'언제 어떤 사람들을 만나는가'가 인생의 방향성을 바꾸곤 한다.


그래서 우리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 나와 함께 성장할,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 줄, 나에게 꼭 맞는 회사를 고르고 골라야 한다. 이때, 나에 대한 정확한 메타 인지 + 내가 가고자 하는 정확한 목표점을 알게 되면 회사를 고를 때 어느 정도 기준이 생긴다. 나의 경우는 그랬다. 역량이 매우 부족한데 좋은 회사만 고집하며 당당해서도 안 될 일이고, 나를 낮추기만 하며 엉뚱한 비전을 가진 회사에 기웃거려도 안 될 일인 것이다.


특히나 스타트업은 정말 별의 별 회사가 다 있다. 그래서 더 조심하고 신중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인지, 회사의 비전은 어떤지, 대표는 믿을만한 사람인지 꼼꼼히 재고 따져봐야한다. 먼저 붙는 회사에 간다던지, 월급이 조금 더 많은 곳에 간다던지 하는 근시안적인 판단으로는 다음 스텝도 순탄치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선택은 어려웠지만 마음에 든다. 성장가능성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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