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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엉경퀸 Jul 31. 2023

어지러운 여름의 허리춤에 일정을 달았다

여름 첫만남을 놓치고, 가장 뜨거운 뙤약볕에서 그를 마주했을 때

시작, 처음, 초 라는 말이 주는 설렘이란 것이 있다. 지금껏 지나가온 시간들도 언젠가는 처음이었을 것들. 해가 바뀌어도 첫 봄, 첫 사계절은 언제든 마주한다. 먼 세월 전과의 계절과 명칭은 같지만 속은 다른 시간을 보내게 될 때마다 '작년에는 무엇을 했던가.' 하면서 기억의 궁전을 걷는다. 또렷하게 형체를 보여주는 기억들도 있지만, 무너진 레고탑처럼 흔적만 남아 있는 기억들이 다수였다. 그럴 때 일기장을 살피는데 그 일기장 마저 공백으로 남아 있으면 허무한 느낌이 몸을 사로잡는다. 

낱장 월간 달력, 사진작가가 찍은 계절과 어울리는 계절 사진과 리스트를 체크할 수 있는 공간이 분리되어 있다 달력 외에 덩치가 큰 스케쥴을 적을 때에 요긴하게 쓰고 있다.


아직도 글로써, 손으로써 무언가를 적어 내려간다고 하면 대단하다고 하는 사람들을 자주 마주할 수 있다. 습관처럼 써 온 일기와 기록하는 취미일 뿐인데 추켜새워지는 것 같아 가끔 민망할 때도 있다. 일기를 십 오년 가량 썼다고 하기엔 반년만 쓴 해도 있었고, 일기장을 계속 바꿔가며 쓴 8개월 간의 기록이 전부인 해도 있다. '대단하다'라는 말을 듣기가 스스로 민망해지는 이유이다. 


깨끗하게 비어있는 4월과 7월의 월페이퍼,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일기장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기록하는 것이 없다면 기억나지 않는 뇌의 노화가 조금은 섭섭했다.

한가로이 월요일 오전을 보내고, 바쁜 주말 속에 곰팡이처럼 쌓여있던 집안일을 해치우고 나니 늦은 오후가 되어 있었다. 해는 날것의 본연을 보여주기 싫은 탓인가 구름속에 얼굴을 감추고 있는데. 허연 에이포지같은 텅빈 하늘과 살랑거리는 백색 커튼의 유려한 춤사위가 잊고 있었던 브런치를 기억나게 했다. 시간을 브런치에 녹여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에 실수로 우유를 의자에 쏟았다. 보통이라면 큰 일이 아니겠지만, 앉는 부분이 붙어있는 쿠션으로 된 의자에 무언가를 쏟는 것은 꽤나 큰 사건이다. 떨어지는 눈꺼풀을 강하게 끌어올려준 사건이었다. 졸지에 책상만 덩그러니 남게 되어 버린 채로, 먼지가 조금은 묻어 있는 흰 원형 앉은뱅이 상을 폈다. 깨끗한 상 위에 노트북과 월페이퍼를 올려 놓으니 8월, 여름의 허리춤에 무언가 일정을 달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입이 없으니까 일정을 잡는 것도 꽤 부담스러운 일이겠지만, 그럼에도 불러주는 고마운 이들이 있었다. 누군가의 부름을 받는다는 것은 내가 그래도 꽤 괜찮은 사람이 아닐까 하는 자만에 빠지게 해 주는 장치와도 같다. 그럴때일수록 자만이라는 옹달샘같은 감각을 경계해야 내가 그 사람에게 괜찮은 사람으로서 계속 남아있을 수 있지 않을까. 


텅 빈 8월, 아직 오지 않은 그 시기를 보며 흰 펜으로 한글자씩 가볍게 눌러 적었다. 꾹꾹 눌러 쓰는 습관이 예전에 있었던 것 같기도 한데.


4월, 7월을 제외한 앞선 7개월간의 월페이퍼 기록들. LIST가 끝까지 채워진 것도 있었고, 중간에 끝난 것도 있었다. 기록과 끈기의 근육을 키워야겠다.


8월의 일정을 적으려 하다 보니 7월이나 6월만큼 빡빡하지는 않았다. 여름에 결혼을 하는 이들은 없었고, 휴가 일정을 맞추기에는 모두가 원하는 날을 잡기 어려우니까. 생각해보니 작년에는 여름휴가를 가지 않았다. 남들이 말하는 그런 일반적인 여름휴가. 바다를 가거나, 해외를 가거나, 또는 국내 어딘가로 훌쩍 떠나는 '여행'에 초점이 맞추어진 휴가는 없었다. 


대신 마음의 여름휴가는 깊게 가졌었지. 한 공간에서 다른 일을 해도 어색하거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이와. 얼마전 TV 프로그램인 결혼지옥에 나온 서로를 투명인간 취급하는 부부와는 매섭게 다른 행태였다. 서로가 무얼 해도, 의미가 있겠지. 필요하니까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갈 수 있는 사람. 오랜 시간을 알았기에 더 예민하게 변화를 눈치채고, 이미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일상에 대해 어떻게 타파해야하나 궁리를 안 해도 되는 편안한 사람. 그 친구의 집에서 3일을 머물렀던 것이 작년 최고의 수확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시간이었다. 이 역시 며칠 뒤 서술하겠지만. 그 시간이 무척이나 좋았더랬다. 

곧 올 8월 이후의 4개월. 종이로 보니 정말 얼마 남지 않은 것이 상기되었다. 

2023년의 시작을 적었던 때가 얼마 전 같은데 벌써 뜨거운 작열이 진동하는 여름을 보내고 있다. 일상을 열심히 살다보면 어느순간 '당신의 올해가 이정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하는 때가 오는데 내게 오늘이 그랬다. 7월 31일. 첫 여름의 끄트머리에서 냅다 허리춤으로 다이빙 한 기분으로 앞으로를 생각한다. 내년의 나는, 미래에서 이 글을 볼 나의 여름은 어떠할까. 축축한 습기로 가득한 방 안에서 물 한잔을 마시며 똑같이 글을 쓰고 있을까. 아니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얼굴을 밝게 내보인 태양 아래에서 피부가 따갑다며 울상을 짓고 있을까. 모르기 때문에 기대를 하고, 기대를 하기 때문에 궁금해지는 미래의 시간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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