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권의 책을 쓴다면?
조금은 이른 아침, 집 앞 작은 산길을 조금은 빠른 걸음으로 달리고 있어요. 후 욱 후 욱 숨소리가 거칠어지고, 발걸음도 쿵쾅 무거워집니다. 그래도 숲내음은 기분을 좋게 해 줍니다. 헤드셋을 끼고 나와 신나는 음악까지 함께 합니다. 음악을 들으며 산길을 뛰고 있는데, 눈앞으로 제법 굵은 나뭇가지가 털썩 떨어집니다.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추고 헤드셋을 벗고는 나뭇가지가 떨어진 위쪽을 올려다봅니다. 나뭇가지 사이로 파란 하늘빛이 참 곱네요. 나뭇가지들 사이로 차르르 바람소리만 들립니다. 나무 위에 앉아있던 새가 내 인기척에 놀라 날아오르며 가지가 떨어졌던 모양입니다.
덕분에 속도를 늦추고 주변을 돌아봅니다. 주변에 소리에도 집중합니다. 바스락 낙엽소리, 간간이 들리는 다양한 새소리, 붉게 물들어가는 나뭇잎, 대롱대롱 작은 열매들도 보이는군요.
속도를 늦추니 보이는 것들이 많아집니다. 매일 아침 지나친 길인데 오늘따라 많은 것들이 새롭습니다.
아이들은 여기저기 흔적을 남깁니다. 문 뒤나 벽의 모서리, 커튼의 이면, 가구와 벽의 사이사이 잘 보이지 않는 그곳에 어느샌가 낙서가 되어있어요. 또 어느 날엔 그 낙서를 알록달록 색칠해 놓기도 합니다. 자신이 만든 작품을 치료실 벽에 붙여 전시공간을 만들기도 합니다. 그저 마구 자른 종이 같지만 아이들에겐 자신의 분신 같은 소중한 작품입니다. 슬라임을 조물거리다 내 옷에 쓱 닦고는 재미있다며 까르르 웃어버립니다. 열심히 완성한 클레이 작품을 내게 선물하기도 합니다. 그리고는 나에게 선물을 요구하기도 하지요. 어쩌다 맞교환이 되어버립니다. 아이들이 남기는 흔적은 나와의 관계에서 호감의 표현이기도 하고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키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글을 쓰며 기억을 되살립니다. 기억을 되살리는 시간은 나의 삶의 속도를 조금 늦추어야 합니다. 생각을 과거로 보내는 일은 서두르면 안 되는 것 같아요. 조금 천천히 되돌아간 그 과거의 어떤 시간에 잠시 멈추어 바라봅니다.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던 많은 것들이 느껴집니다. 생생하게 전해지기도, 안개처럼 뿌옇게 시아가 가려지기도 하지요. 그때 왜 그랬는지 좀 알 것 같기도 하고 당최 이해가 되지 않기도 합니다. 내 곁에 있던 이들에 대한 느낌도 시간이 지날수록 달라지기도 합니다. 그래도 늘 새로운 나를 만나게 됩니다. 잠시 머물면서 나의 흔적들을 모아봅니다. 나의 생각, 느낌, 기분, 메모, 그림... 무엇이라도 찾아보려 애써봅니다. 그 흔적들을 모아서 그 흔적들의 느낌을 다시 글로 남겨봅니다. 글이라는 흔적을 남겨봅니다.
단 한 권의 책을 쓴다면, 내 삶의 흔적을 남겨놓을 거예요. 나의 삶에 대한 나의 애정의 표현이기도 하고 내 존재에 대한 확인이기도 하겠지요. 그때그때의 기분과 감정을 달라지겠지요? 그 달라지는 모습들도 남겨놓고 싶어요. 나는 이런 마음으로 살아내었구나 나의 아이들에게도 슬쩍 알려주고 싶어요. 내 삶에 대한 이해와 애정이 담겨 있었으면 좋겠어요. 나의 글을 읽는 이들에 대한 애정도 전달되면 좋겠네요.
불현듯 종이에 인쇄된, 쉽게 수정할 수 없는 그런 종이책을 한 권 쓰고 싶습니다. 언젠가는 나의 흔적들이 모두 사라지겠지만 한 권의 종이책 안에는 조금 오랫동안 머물 수 있지 않을까요?
오늘도 흔적 남기기 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