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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경희 Feb 29. 2024

유난히도 열심히

생의 마지막이어도 아쉽지 않게

이상하리만치 오늘 만큼은 더 열심히 살고 싶었다. 계획처럼 되지 않은 것도 있었고, 빠뜨린 일도 있었지만, 어쨌든 하루에 최대한 충실했다.


아침에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서 씻고, 고양이의 코딱지를 떼주었다. 속이 안 좋았는지 구토를 해서 닦아주고, 마실 물도 채워주었다.


온라인 중고마켓에서 한참 안 팔리던 물건을 사시겠다는 연락이 왔다. 외근길에 우체국에 들리려고 재빠르게 포장을 했다.


두 시간 걸리는 장거리 외근을 가는 날. 계약서에 찍을 인감도 챙기고, 도면도 뽑아서 현장으로 향했다.


다행히 아침 지하철은 붐비지 않았다. 9호선 급행에서 1호선으로 갈아타고 영등포역에 도착. 영등포역 앞 우체국에도 사전접수를 해서 금방 보냈다. 배송비로 받은 5천 원보다 저렴한 요금이 나와서 소소하게 기분이 좋았다. 판매대금으로 용돈이 들어올 생각을 하니 신이 났다.


무궁화호를 타고 수원으로 가는 일정을 잡았는데 여유 있게 나왔더니 기차 시간이 45분 정도가 남았다. 책도 노트북도 없어서 어쩔까 하다가 배민 커넥트를 켰다. 가까운 곳에서 역 앞으로 돌아오는 건.


버스 환승요금 100원을 내고 파스타를 픽업해서 배송지로 향했다. 지도에서 위치만 보고 주소를 안 봤는데 모텔이었다. 숙박 업소 배달은 처음이라 어색했다. 입구에서 태연한 척 배달이요~ 하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다시 역으로 올라가서 제시간에 기차를 탔다. 기차를 탄 20여 분 사이에 영업 중인 고객사에서 연락도 오고, 영재교육원 자문도 부탁받았다.


수원에서 다시 1호선을 타고 고객사인 대학교 근처로 가는데 지하철이 연착되었다. 잠시 시간이 비었다. 현장에 작업자 분들에게 드릴 비타민 음료를 구매했다. 비타 500도 제로가 나오다니.


느지막이 도착한 지하철을 타고 현장 근처 역에 내렸다. 버스도 거의 없는 조용한 동네. 택시비 기본료도 비쌌다. 개강하면 활기가 생기려나.


현장에 도착해 작업 중이신 에어컨 수량을 체크했다. 13년 만에 처음 열교환기 세척이라 상태가 아주 안 좋았다. 내부 부품이 엉겨 붙어서 칼로 긁어내서 겨우 분리를 하고 계셨다.


먼지가 가득 낀 열 교환기를 보면서 저기서 실내 열을 빼내봤자 얼마나 시원했을까 싶었다. 이번 관리만 해도 에너지 효율이 15프로는 좋아질 것이다. 송풍팬까지 달았으니 냉방도 난방도 효율이 더 좋을 거라 기대해 본다. 탄소배출도 줄이고 돈도 버는 것 - 처음 회사를 만들 때 하고 싶었던 일이라 뿌듯했다. 민자 사업이 아니고 정부지원사업인데 그나마도 3년짜리 사업이 2년으로 줄어서 우리도 3분의 2 예산으로 진행했다. 일회성 사업이지만 이익이 괜찮아 참여를 결정했다.


현장에 가니 몸이 근질근질했다. 폐기물 정리도 하고 전동드릴로 볼트를 박는 송풍팬 조립도 도왔다. 영업할 때는 비즈니스 캐주얼을 입고 현장에서는 작업복처럼 입는다. 누가 보면 현장 청소를 돕는 젊은 이모님처럼 보였으려나. 쨌든 몸을 움직여 일하는 것은 즐거웠다.


점심식사를 대접하고 담당자 분과 계약서를 작성한 후 기숙사로 이동. 좁은 공간에서 진행하니 착착 손을 맞추어 진행하시는 게 더 잘 보였다. 외주를 맡겼지만 다들 열심히 하시는데 팔짱만 끼고 기다리기는 지루했다. 빗자루를 들고 바닥을 쓸면서 분해된 에어컨 구조를 살폈다. 협력사에서 설치하신 IoT 장치도 확인하고 세척된 필터와 드레인(배수판)도 날랐다. 보고서용 사진과 찍고 우리 과실이 아닌 파손된 부분도 사진을 찍어 보고했다.


작업이 일찍 끝났다. 우리 회사에서 나는 박수 담당이라 와~ 하며 박수를 쳤는데 다 같이 유쾌하게 박수를 쳐주셨다. 나름 부지런을 떨었으니 좀 태워달라고 부탁드렸다. 작업 총괄하신 대표님 차를 얻어 타고 편하게 집 근처로 왔다. 작업 팀의 상세 구성과 인건비 원가도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지하철 두 정거장 사이에 토스를 켰는데 주변에 사람이 많아서 포인트를 주워 담았다. 길에 100원, 30원 동전이 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


귀갓길에 남편을 만나 회전초밥 집에 갔다. 몸을 움직여 배가 고팠는지 꽤나 먹어치웠다. 내가 좋아하는 장어 초밥이 너무 비쌌는데 그래도 한 접시 집을 걸 그랬나.


현장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와서 사우나에 다녀왔다. 따뜻한 물에 들어가니 노곤노곤 몸이 녹았다. 40도의 물이 으, 시원했다.


집에 돌아와 문을 여니 고양이가 튀어나왔다. 요즘 엘리베이터 앞까지 밤마실 나가기에 재미를 붙였는데 내가 돌아오는 발소리를 듣고 나온 모양이다. 귀여운 고양이를 적당히 놀아주고 어르고 달래어 집으로 데리고 왔다.


현관 앞에서 계속 야옹거려서 감기 걸린 고양이니까 옷을 입혀버릴 거야~ 그건 싫지?라고 했더니 서류작업을 하는 내 옆에서 한숨 자고 혼자 거실에 놀러 나갔다.


남편이 세미나에 공부하러 간 사이 홀로 오늘 하루를 돌아본다. 물 샐 틈 없이 촘촘했다.


내일 할 일도 몽글몽글 떠오른다.

3월에 개강인데 겸임교수 임용 건은 아직 계약이 진행되지 않았다. 내일 전화해서 여쭤봐야지. 학생들은 수강신청을 했을 텐데 아직 나는 수업 시간도 모른다. 오늘 작업한 계약서에 첨부해야 하는 서류도 빨리 만들어야지. 신규 고객이 요청한 공급계약서 초안도 얼른 써서 보내야지. 연휴에 시공하는 시공처 자재가 잘 도착했나 확인해야지.


아직 돈을 많이 벌지는 못 하지만 그래도 내가 만든 사업체가 이렇게 굴러가고, 팀원들의 급여가 되고, 밥이 되고, 가족을 부양할 의료비가 되고, 고객들이 사고 싶은 무언가를 만들어 낸다는 게 신기하다.


작정하고 영업을 하려도 했을 때는 생각도 못 했던 일들이 건너 건너 소개로 들어온다.


이게 팔린다고? 이산화탄소 포집기 프로토타입이 계약을 앞두고 있다. 와 이건 진짜 쓸만한데? 원어민 여사친 앱이 완성도가 높아지고 있다.


토요일 오전에 세미나도 가야 하고 저녁 약속도 있는데 그전에 빌려온 책을 다 읽어야겠다!


짧은 2월, 그래도 내일 하루는 덤이다. 내일은 회사 동료들이랑 얼굴 보는 날. 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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