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elenEd Mar 16. 2019

넌 이기적이야

어느 부모 자식의 이야기 <유리동물원>

희곡 <유리동물원>은 <욕망이란 이름의 전차>로 유명한 테네시 윌리엄스의 작품이다. 사실 테네시 윌리엄스 희곡에 등장하는 병적인 인물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주 조금이지만) 조금 더 나이를 먹고, 나도 비슷하게 아파보니 그들을 더 이해할 수 있게 됐다. 희곡 <유리동물원>의 배경은 1920년대 미국 대공황 시기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웠으나 이내 경제적 어려움에 빠졌고, 그로 인해 모두가 절망에 빠진 시대였다. 어쩌면 지금의 대한민국과 유사할지도 모르겠다.


아만다는 평범한 어머니다. 아들 톰이 직장에서 잘 되기를 바라고, 딸 로라가 어서 시집가기를 바란다. 항상 시끄럽고, 유난스러운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해서 가정을 꾸려나간다. 톰은 공장에서 일을 한다. 하지만 공장 일을 좋아하진 않는다. 진짜 꿈은 시인, 즉 문학 쪽이다. 당연히 문학을 공부하고, 문학 방향으로 커리어를 펼쳐 볼 여유는 없다. 그래서 항상 현실이 괴롭고, 이 지긋지긋한 집구석과 절망스러운 시대 상황에서 도망가고 싶어한다. 로라는 현실을 회피하며 사는 사람이다. 집 밖으로 나가지 않고, 무언가 시작하는 것을 두려워 한다. 스스로에게 자신도 없고 자신의 방에서 유리로 된 동물만 만지작거리며 산다.


명동예술극장에서 2014년 공연했던 <유리동물원>의 포스터. 당시 나도 이 공연을 관람했다.


이 불안한 가정의 끝은 어디일까. 결국 언제나 자유를 꿈꿨던 톰이 꿈을 찾아 직장과 엄마, 누이를 등지고 떠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내가 기억에 남는 것은 바로 이 마지막 장면이다. 아만다는 톰을 '이기적'이라 말하고, 톰은 아만다를 '이기적'이라 생각한다.


아만다의 생각은 이렇다. 자신도 힘들지만 딸과 아들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고 열심히 살았다. 바라는 것은 딸이 '남들처럼' 적절한 곳에 시집가고, 아들이 '남들처럼' 자리잡고, 부족하지 않은 월급을 받으며 가족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다. 다들 그렇게 산다. 이걸 바라는게 사치인가? 내가 이만큼 노력했는데 자기 하고 싶은 것만 생각하는 톰이 '이기적이다.'


톰도 할 말은 있다. 나도 꿈이 있는데 가족들을 위해서 돈 버는 기계처럼 일만 하며 살아야 하나? 엄마가 생각하는 기준, 엄마가 만족하고 싶어하는 남의 시선을 맞추기 위해 내 인생을 희생할 순 없다. 그동안 충분히 가족을 위해 적성에도 안 맞는 공장에서 인생을 허비하며 살았다. 내가 이만큼 노력했는데 자신의 기준에 날 맞추려고 하는 엄마가 '이기적이다.'


2014년 명동예술극장 <유리동물원> 공연의 톰과 아만다


나는 이 장면이 너무 평범한 가정의 모습을 그리는 것 같았다. 시간적·공간적 배경은 1920년대 미국이지만 이 장면은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너가 우리 집에서 잘 돼야 해. 그러니까 좋은 대학에 가야 한다. '사'자 붙은 직업을 가져야 해. 아니면 남들 다 아는 대기업에 들어가라. 널 그 대학에 보내기 위해 엄마, 아빠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널 이 자리에 오게 하기 위해 엄마, 아빠가 얼마나 노력했는데. 어디서 많이 본 장면들이 <유리동물원>을 보며 겹쳐졌다.


아무래도 자식 입장이다 보니, 아만다보단 톰의 감정에 더 이입하게 된다. 그래도 아만다를 이해하지 못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시대 평범한 부모의 모습 아닌가. 어쩌면 우리 아빠와도 많이 닮았다. 나도 한 때는 로라처럼, 한 때는 톰처럼 살았다. 톰과 로라의 공통점은 이 절망과도 같은 세상에서 도망치고 회피하고 싶어한다는 사실이다. 정말 너무 그러고 싶다. 톰과 로라도 우리 시대 청년의 모습이다. <유리동물원>은 90년의 세월과 태평양을 건너 지금 여기에서도 유효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릴리트의 오싹한 반격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