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불가능하겠지만.
나는 어떤 식으로든 상처받기 싫다.
그렇지만 여전히 상처를 받고, 메워지는 과정은 반복된다.
(이러한 과정을 겪으며 나는 불사신이 되었다!라고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내가 가장 크게 상처받는 이유 중 하나는 역시나 '인간관계'다.
'내가 당신을 배려하는 만큼, 당신은 나를 배려하지 않는군요'
'나는 당신을 이렇게 좋아하는데, 당신은 나를 그렇게까지 특별히 생각하지 않았군요'
라는 배신감이 문제다.
매번 반복되는 사이클. 나는 이것을 '마음 주기'라고 명했다.
좀 더 쉽게 설명해보자.
나는 누군가와 '친하다'라고 말할 수 있기까지가 굉장히 오래 걸린다.
친한 사람이라고 만들어 놓은 나의 마음속 경계는 아주 높고 좁아서, 나는 적어도 해가 넘기지 않는 이상 '친하다'는 범주를 함부로 풀어주지 않는다.
그런데 그 담은 생각보다 튼튼하지 않아서, 아주 천천히 쓰러져간다.
몇 번이나 겪었음에도 나는 그 무너져가는 담을 넘고 뛰어들어온 사람을 외면하지 못한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온갖 배려를 선물한다. 그리고 그 배려에 익숙해진 사람은 언젠가 나에게 상처를 준다.
이러한 반복된 사이클로 지금껏 학교에 이어 회사생활을 하고 있다. 내가.
"난 어떤 식으로든 상처받기 싫어"라고 크게 하소연을 했다.
그랬더니 전화 너머 내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엄마가 말했다.
"그건 불가능해, 나는 지금까지도 상처를 받아. 물론 너를 통해서도"
당황한 내가 다시 물었다. "엄마는 이제 70세를 바라보고 있는데, 아직까지도 일희일비라는 게 존재해?"
엄마는 나에게 '덜' 상처받는 법을 알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상처받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어. 그런데 엄마는 인정을 해. 예를 들어 딸이 보고 싶어 전화를 걸었는데 퉁명스럽게 답하는 너에게 나는 매번 상처를 받지만, 너에게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라 인정하면서 나중에 물어보면 정말 그럴만한 일이 있던 거야. 혹은 네가 나의 서운함에 바로 사과를 한다든가. 그러면 그 상처가 금방 사라지더라고."
나만의 덜 상처받는 법은 아직 발견해내지 못했다.
그렇지만 '상처받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은 인정하기로 했다.
어차피 '상처투성이'로 살아가야 한다면, 그 상처가 멋지게 자리 잡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