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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헨리포터 Dec 31. 2020

여전히 '국영수'

대학에서 우리가 필수 과목과 선택과목을 나눈 것처럼 아마도 국영수는 우리들 생각에 그리고 부모님 기준에서 진작부터 필수 과목이었을지 모른다. 필수와 선택을 분류하는 그 행위 어쩔 땐 부담으로 작용하기도 하겠지만 대개의 경우라면 올바른 방향일 수 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열심히 하며 살 수도 없을뿐더러 정해진 24 시간에서 살다 보니 조금 더 필수적으로 집중해야 할 것들을 누군가가 선별해준 것인데 그게 바로 '국영수'였다. 그 배경에는 통계학이 적용되었을 수 있고 아니면 누군가 이름 모를 공부 잘하던 선구자적 인물의 경험에 근거한 것일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라면 어느 비범한 도사가 고심 끝에 고른 그 세 과목이 국영수가 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덕분에 우리는 누구든 국영수 필수적으로 그리고 먼저 공부해야 될 과목 정도로 인지하고 다.


국어와 영어와 수학은 중요하다. 그렇다면 "어를 열심히 하거라. 물론 어도 잘해야지. 아차 수학은 필수란다"처럼 나누어 말하면 될 것을 굳이 국영수라는 순서를 부여하며 치 '꾸러미'처럼 부르는 이유는 무엇인가.


국, 영, 수의 조합을 떠올려보면 6가지로 순서를 부여할 수 있는데, 그 공식이라면 nx(n-1)x(n-2)=6 이 되고 나열해본다면 국영수, 국수영, 영국수, 영수국, 수국영, 수영국이 나올 수 있다. 쇼미 더 머니에서 나오는 래퍼가 오션월드에서 핫태핫태를 외치는 그 모습처럼 아마도 국영수가 가장 입에 촥촥 감기듯 라임이 살아있기는 하다(이것도 도사의 뜻이더냐). 별다른 고민 없이 받아들여왔지만 힙합이 아닌 보통의 사람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기가 막히게 정해진 이름 '국영수'다. 시험에서야 다 같은 100점 만점이었지만 어쩌면 졸업하고 수험생활과는 무관하게 살아가는 우리의 생활에서 수학보다 영어를 그리고 영어보다는 국어를 더 많이 사용하고 우리의 일상에서 더 필요하기 때문 아닐까.


국어를 배웠으면 주제를 알라는 말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국어를 열심히 공부하면 글의 주제를 알 수 있다. 주제를 명확하게 파악하면 '화자'의 뜻을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말하는 사람의 국어실력이 생각에 미치치 못하여 원하는 바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거나 그 의미를 반대로 전달할 때도 있는가 하면, 반대로 듣는 사람이 문맥을 파악하지 못하여 오해가 생길 수도 있는데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대다수의 싸움은 서로의 국어력 차이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상당하다. 물 국어는 우리의 모국어이므로 'ㅏ'와 'ㅓ'의 차이도 구분해가며 항상 주의 깊게 사용하고 공부해야 마땅하다.


국영수의 순서에서 알 수 있듯이 직업적으로 관련이 있거나 모국어로 영어가 필요하지 않은 경우라면 다행히도 국어보다는 조금 느슨(?)하게 학습해도 될 텐데 모든 단어의 용법을 구분 지어 쓸 필요는 없다. 중1 정도로 기억하는 그 옛날 옛적(20세기)의 일이 떠오르는데 부모님의 직업 특수성에 힘입어 유치원이 아닌 '킨더가든'을 나온 친구였고 국민학교(아뿔싸) 3학년 때 한국으로 다시 들어왔단다. 어느 날의 영어수업이고 선생님께서는 사람의 얼굴을 칠판에 큼지막하게 그리며 eye, mouth 등을 써넣으며 굳이 whisker를 함께 적으셨는데 그 친구는 거기서 피식거렸다. 너무 오래된 기억이라 실소였는지 조소였는지 아니면 반가움의 표현이었는지 정확히는 모른다. 쉬는 시간에 그 웃음 이유를 물어보니 보통 동물의 수염을 가리켜 whisker라고 하기 때문에 사람에 쓰면 어색하단다. 물론 나는 그 의미나 차이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으나(물론 지금도 별로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그다음 시간에 들어오신 영어회화 선생님(지금 기억으로는 캡틴 아메리카를 닮은)이 whisker와 사람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고개를 갸우뚱하는 미국인 특유의 그 제스처를 하는 덕에 그 단어의 용법이 저렇구나라는 점을 짚었을 뿐이다.


영어는 회의에서 말로써먹든 이메일로 주고받든 국어 다음으로 많이 쓰게 되는 언어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국어보다 편하게 대할 때가 있다. 영어는 우리의 모국어도 아니고 엄청나게 많은 세계인이 쓰는 어이므로 조금 틀리거나 단어를 한두 개 건너뛰어 말해도 서로의 의미가 통한다. 영어도 중요하지만 공부의 깊이에 있어서 국어만큼은 아니라는 것이다. 영어를 직업적으로나 이민 가서 살 입장이 아닌 내 경우에서는 말이다(그러고 보니 whisker의 7가지 뜻을 모두 다 안 외우길 잘했다). 물론 그럼에도 영어공부는 한순간도 쉬질 못했다. 안 쓰면 금방 어색해지니 말이다. 티비에 틀어진 디즈니 만화를 볼 때도 때론 구석에 혼자 앉아 중얼거리며 따라서 읽든 지긋이 눈을 감고 리스닝을 하든 무언가는 계속할 필요가 분명히 있다.


수학이라면 사람들의 일상에서 입지가 더 줄어들었다. 위에서처럼 '국영수' 대한 경우의 수가 정 궁금하면 손가락으로 세어보 금방 알 수 있면서 대부분의 '꾸러미'들은 이미 순서가 굳어져 있어서 저런 계산이 불필요할 때가 많다. 이렇듯 계산기와 손가락을 이용하면 못해낼 일상 속 수학은 없어 보인다. 어릴 적 그 1층에 있던 슈퍼 아저씨처럼.


그 아저씨는 굉장히 특이하게도 덧셈은 기가 막히게  암산을 잘하는데 뺄셈은 항상 계산기에 의존했다. 지금이야 과자의 바코드를 찍으면 스크린 가격이 표시되고 자동으로 더해지고 빼지니 계산이 편해졌다. 그리고 영수증(심지어는 핸드폰으로)이 발행되고 카드로 계산하니 설령 오차가 있었더라도 바로잡을 수 있겠지만 그 시대에 그런 최첨단이 어디 있겠나. 주인아저씨의 계산 실력에 오롯이 의존해야 한다. 물론 그날도 꼬깔콘과 새우깡 그리고 치토스 고래밥과 다이제스티브 등 각종 과자를 샀고 신들린 듯 덧셈을 이어나가던 때만 해도 주산왕을 꿈꾸던 사람 정도로 생각했다.


" 500원, 700원, 400원, 300원, 700원, 200원, ...."

"가만있어보자. 8700원이니깐."


"....?"

"....?"

"그래서요?"


"계산기가 어디 있더라?"


물론 주인아저씨 입에서 나오는 저 값들을 모두 순식간에 계산해낸다면 오차가 있었는지 동시에 검토를 할 수도 있고 그 자리에서 바로 잡으며 신뢰를 지켜나갈 수 있겠지만 지금은 이미 저런 단순 계산을 기계와 자동화라는 개념이 대체해버렸고 우리의 뇌는 더욱더 수학을 안 하는 쪽으로 향하고 있으니 어쩌면 그 도사님은 참으로 용하구나.


그럼에도 수학 공부해야 할 이유 있다. 여러 가지의 학자적인 이유가 있겠지만 그런 것을 차치하고라도 수학하고 관련 없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측면에서 보면 적당하게 이유 있는 추론과 검산을 해가며 살 수 있게 한다. 국영수처럼 n이 3개라면 별다른 수식 없이 손가락으로 해낼 수 있겠지만, 서연고서성한(무작위 순서)처럼  n이 6라면 약간은 화날 수도 있다. 물론 빵을 구울 때도 우리는 이미 수학적으로 계산하여 적당한 이유를 대입하며 살고 있다. 크루아상 생지 5개를 구울 때 180도로 15분 가열하라고 쓰여 있더라도 살다 보면 우리는 종종 7개를 한 번에 구워야 할 일이 생긴다. 단순 계산으로 빵 1개당 3분씩 필요하다는 가정을 세우고 6분을 추가할 수 있다. 물론 빵의 맛이나 빵의 모양을 위해서는 9추가가 되었어야 할 수도 있고 3분 30초가 되었어야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많은 시도 끝에 귀결되는 일종의 '최적화'이고 그 시작으로서 감을 잡기 위해 우리는 수학적인 접근을 먼저 시도할 수 있다. 마치 답정너가 정해주는 그것처럼 후련해진다. 나만의 근거를 스스로 정할 수 있다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개인의 역량이 되 이런 경험이 쌓일수록 자존감은 높아진다(빵은 태울 수록 자신감이 주춤할 수 있다).


여기서 더 확장하자 삶에서 많은 학문이 적용되고 응용되기 때문에 무수히 많은 과목을 더 공부해나가야 하겠지만 시간은 한정되어있고 필수 측면에서 본다면 위와 같이세 과목이 먼저 필요한 것이.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수험생이 아니므로 국영수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 마도 세 종류의 공부는 꾸준히 하라는 의미로 '국영수'꾸러미가 도입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개인의 취향에 따라 영어를 일어나 중국어처럼 다른 외국어로 변형해도 좋다. 수학 대신에 물리나 열역학 아니면 인공위성 궤도 역학(?) 같은 관심 있는 물리학의 한 분야를 공부해도 좋다(놀란 처럼). 사회나 역사 그리고 도덕으로 교체되어도 물론 바람직하다. 배우려는 그 행위는 우리의 삶에서 어떤 형태로든 쓰이게 마련이고 그 의미는 찾기 나름이다. 나도 최근에 공부를 다시 시작했는데 말은 거창하지만 조금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독서의 양을 늘린 것이고 가끔씩 글로 적는 일을 하는 중이다. 굳이 필수과목으로 표현한다면 '작문' 테지만 여전히 국어이기 때문에 없이 오늘도 '국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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