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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헨리포터 Jan 09. 2021

24절기와 동파

과거의 많은 공상과학(SF)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2000년대 이후가 주를 이루는데 아마도 그 시대의 생각으로 세기가 바뀌면 과학기술(시술 말고 기술)이 비약적 발전을 할 것으로 생각했나 보다. 물론 그때 상상하던 그 이미지에는 한참도 못 미치긴 해도 소달구지 타고 다니던 옛날과 비교한다면 대단하게 진화한 세상인 것은 맞다. 나도 80년대 후반이던 어릴 적 비슷한 꿈을 꾸며 성장했고 그 시대의 여느 집 애들처럼 그런 장르의 볼 것과 읽을 것을 역시 좋아했다. 그 시대 공상과학을 지금 알고 있는 과학적 이론이나 법칙과 비교하여 본다면 다소 허무맹랑한 발상이긴 해도 꿈을 꾼다는 그 사실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권리 아니던가.


어린이 대공원에 있는 과학관이란 그 시절의 어린이들에게는 그런 꿈을 실현해보던 장소기도 했는데, 지금이라면야 주변에서 접하고 만지는 온갖 종류의 기기들이 최신 기술의 집약이기 때문에 굳이 멀리 나갈 필요도 없을 것 같다. 물론 이제는 더 이상 미래 기술에 집착하며 직접 가서 보고 느끼는 과학관도 찾기 어려울뿐더러 이미 스마트폰을 만져본 아이들이 그보다 더 위대한 기술을 몸소 받아들이고 느끼기도 어렵고 실제로 그보다 더 뛰어난 기술을 전시할 만한 것도 세상에는 없어 보인다.


지금의 아이들이라면 그때의 우리들처럼 대단한(?) 기술에 놀랄 일이 적어 보이지만 한편으로 그들은 새롭게 진화한 세상을 살고 있기 때문에 아마도 놀라는 관점이 다를 것이다. 최근에 코딩에 부쩍 재미를 붙이며 다양한 로직을 짜고 놀라며 즐거워하는 아이의 모습을 보며 그야말로 격세지감을 느낀다. 약간은 허접한 그래픽으로 구현한 그 코딩 프로그램 안에서 세상을 만들고 제한 없이 상상하는 대로 구현할 수 있는 이 시대는 무언가를 직접 움직이는 물리적인 것에 경탄하던 우리 시대와는 너무 다르다. 물론 좋은 쪽으로 말이지.


하지만 그렇게나 대단한 과학의 발전과 함께하며 지금처럼 미래시대를 살고 있는 입장에서도 때론 과학이란 개념 자체가 없었을 시절 선조들의 지혜에 여전히 놀랄 때가 있는데 24절기가 그렇다. 우리는 설이나 추석처럼 명절은 음력으로 쇠는데 음력이란 태음력의 줄임말로서 달이 지구를 한 바퀴 완전히 도는 시간을 한 달로 기준하는 달력을 말한다. 여러 문제가 있긴 해도 오랜 세월 사용한 개념이고 보정을 위해 윤달의 개념을 사용한 그 발상도 물론 놀랍다. 125년 전 1월 1일부로 고종의 명으로 우리나라에는 태양력이 도입되었는데, 우리가 흔히 양력이라고 부르는 이 달력은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완전히 도는 시간을 1년으로 기준 삼는다. 사실 양력이든 음력이든 달력이라면야 매일같이 보는 것이고 집에 걸려있든 사무실 책상 위에 올려져 있든 아니면 내 핸드폰이나 랩탑에 들어가 있든 그 자체는 별로 놀라울 일이 없겠지만 태양력을 기준으로 나뉘는 '24절기'라면 사실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계절의 변화란 우리 삶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데 이 변화를 미리 예측하는 자의 삶이 더 수월해야 하는 점은 지극히 당연하다. 태양력의 1년을 4개의 계절을 나누고 4개의 계절을 각각 6개의 절기로 다시 나누면 24개의 절기가 만들어지는데, 네이버 지식백과에 나오는 '태양의 황도상 위치에 따라 계절적 구분을 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황도에서 춘분점을 기점으로 15° 간격으로 점을 찍어 총 24개의 절기로 나타낸다'는 정의가 이것을 말한다.


물론 오래도록 농경사회였던 우리 문화를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지금의 사람들이라면 각각의 관심사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24절기가 갖는 의미는 어쩌면 더욱 클 수밖에 없다. 마라톤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야 한여름에 뛰다가 어느 순간 어지러움을 느껴본 사람들은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구나 싶어서 달력을 보면 그즈음이 '소서'나 '대서'일 수도 있다. 한겨울에 달리다가 미끄러워서 역시나 달력을 보면 '입동'을 지나 '대한'일 수도 있는데 괜히 나가서 뛰다가 심장마비나 눈길에 미끄러져 뒤통수가 깨질 걱정하지 말고 '입춘'을 기다리는 삶이 더욱 효율적일 것이다. 2020은 코로나라는 역병 탓에 모임이 전면 금지되었지만 눈꽃축제부터 강원도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행사를 즐겨온 사람들이라면야 '입동'을 기다리며 겨울준비를 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63 빌딩 뷔페의 '개구리 뒷다리'요리를 즐기던 사람이라면야 '경칩'에 유독 관심을 가질 수도 있다. 이 개념이 24절기에 근거한 생활이다.


금번에 내가 새삼 24절기에 관심을 가진 이유라면 소한(小寒)과 대한(大寒)인데 가장 추운 시기를 말하는 1월 5~6일 그리고 1월 20일~21일이다. 옛날이라면 우물물 길어 올리던 시절이었으니 '소한'과 '대한' 부근에 물을 뜨러 갈려면 얼음을 깨기 위해 커다란 돌덩이를 가지고 가야 하는 시기 정도로 기억했을 수도 있다. 물론 그 옛날이나 공상과학에서 미래로 지칭했던 지금이나 별반 차이는 없다. 여전히 우리네 수도관 안에 들어간 물은 온수관이든 냉수관이든 구분하지 않고 얼어붙기 때문에 애초에 계절의 변화를 예측하려 24절기라는 그 개념이 도입된 사실에 비춘다면 지금은 한겨울에 온전히 집중하고 소한의 강추위에 대비해야 할 시기가 분명히 맞다. 그렇기 때문에 농경사회와는 상관없이 도시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도 24절기를 무시한다면 맞이할 그 결과는 참혹할 것이다.


살다 보면 가끔 큰 공부를 했다고 느낄 때가 있는데 보통 그 어감이 좋지 않은 결과에 대해 애써 웃으며 아쉬움을 털어내려고 할 때 주로 쓰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런 큰 공부하기 전에 작은 공부 즉, 미리 준비하고 예측하며 대비하는 삶이 필요할 때도 있는데 이 경우가 딱 그 꼴이다. 동파를 경험하고 '큰 공부'했다며 위안 삼지 말고, 절기를 미리 파악하여 예측하고 '작은 공부'로 끝내도록 하자.


그런 배경에서 오늘이 24절기 중 '소한'이나 '대한'에 근접하고 있다면 우리는 동파 방지에 더욱 힘써야 한다. 물론 어렵거나 대단한 장비가 필요하지도 않다. 그저 한 방울씩 흘려보내면 되는데 흐르는 물은 얼지 않기 때문이다. 이 대단할 것 없는 행위에도 이렇듯 과학이 숨어있고 배울 것이 있다. 하지만 엄청나게 추울 때는 얼어붙기도 한다. 그렇다고 포기하거나 자책하지 말고 반면교사 삼아 최적화의 과정을 거쳐나가야 한다. 유속과 온도의 관계에서 한두 방울 틀어놓았음에도 얼어붙었다면 서너 방울로 증가시켜 역시 예방할 수 있다. 물의 어는점은 0'C 이기 때문에 기온이 영하로 떨어진다면 물은 얼게 되는데 그 배관이 외부에 완전히 노출되는지 아니면 실내에 위치하는지에 따라 온도의 차이가 생기고 한두 방울이 될지 서너 방울로 할지를 정하면 될 일이다.


문제는 얼어붙은 다음인데 일단 물이 얼어서 고체가 된다면 부피가 증가한다. 물이 갖는 특이한 성질로 분자가 육각의 형태를 갖고 규칙적으로 배열하며 빈 공간이 많아지기 때문이고 분자 사이의 평균 거리는 멀어져 부피가 증가한다고 우리는 20년 전 과학시간에  배웠다. 하지만 굳이 분자의 구조를 그려가며 이해하고 암기하거나 증명할 필요도 없이 물이 얼어붙어 부피가 증가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한여름에 놀러 갈 준비를 하며 얼음물을 만드는 와중에 이미 알고 있는 현상인데 수도관이라고 다르기를 기대한다면 우리의 '근거 없는 욕심'아니겠나.


수도관이 얼어붙으면 그때부터는 시간차 공격이 시작된다. 수도관에 잔존한 물의 양이 얼마나 되는지 가늠할 수가 없고 정확히 어느 부위가 얼어붙었는지를 파악할 길도 없다. 수도관 안쪽에서 얼음에 물이 계속 들러붙어 얼음의 양이 커질수록 그 부피는 더욱 증가할 것이고 수도관이 동파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즉, 집에서 아침에 일어나서 씻으려고 수도꼭지를 틀었는데 물이 안 나온다면 얼어붙은 배관이 녹기를 기다리며 방치하지 말고 어떠한 방법으로 녹일지 빠르게 결정해야 옳은 사고처리 방법이 된다.


물론 나도 5년 전에 수도관이 얼어붙어서 녹이느라 고생을 제대로 하며 '큰 공부'를 한 경험이 있었는데 그럼에도 수도관이 어제 다시 얼어붙었다. '소한'을 무시한 내 탓 아니었겠나. 절기를 무시하고 그저 괜찮겠거니 안일하게 생각한 결과는 역시 가혹하다. 아침에 일어나서 씻으려는데 물이 안 나온다. 기온은 영하 20도에 육박했고, 물은 0도가 어는점이라는 사실 그리고 물이 얼어붙으면 부피는 커지고 대처가 늦으면 수도관이 동파되는데 돈을 떠나서 그 경험이란 '생지옥'과 동일하다는 점을 알고 있으므로 굉장히 기민하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는데, 바로 팀 동료와 팀장께 '월차'를 통보하고 양해를 구했으며 수도관을 녹이는 작업에 돌입했다. 물론 예방에 실패한 내가 별다른 장비 없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상당히 제한적이었다.


수도관 안에 들어있는 얼음을 녹이려면 외부의 열이 얼음에 전달되어야 하는데, 그 방법이라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대류, 전도, 복사가 되겠다. 어디 구멍이라도 나있어서 뜨거운 물을 직접 집어넣거나 수도관 안에 있는 그 얼음을 끓여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나는 전도와 복사의 방법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 '수도관'에게 복사열을 주기 위해 가장 먼저 준비한 것은 열선으로 이루어진 선풍기 모양의 히터와 헤어드라이어였는데 출근을 안 하기로 했으니 어차피 오늘은 헤어드라이어를 쓸 일도 없고 잠도 완전히 깬 이 마당에 더 이상 히터를 끼고 있을 이유가 없다. 하지만 30분간 복사열을 쬐어 주었는데도 여전히 물 한 방울 안 나온다. 더욱이 수도관 앞에 쪼그려 고생스럽게 앉아 있는 내 모습이 어쩐지 처량해 보인다. 이 앞에서 벗어날 방법을 궁리해보자. 과학을 배운 우리들이 여기서 헤어드라이어에만 의존하며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 


복사열보다 강한 전도열로 시도해보자. 전도열과 복사열의 효율을 직접 계산하거나 당장 비교하지는 못하지만 라면을 끓이는 냄비 손잡이에 전달되는 '전도열'이 물집을 일으킬 만큼 꽤나 강렬하다는 점은 경험을 통해 이미 알고 있다. 집 앞에 있는 편의점으로 냉큼 달려가 1500원짜리 핫팩을 다섯 개 준비했는데 지난번 겨울산에 오르며 경험한 그 따스함을 기억하니 수도관을 녹이기에는 제격이다 싶었다. 작아서 못 입는 패딩으로 찬 공기가 들어앉을 틈도 없이 꾹꾹 눌러 덮어두니 이제야 안심하고 자리를 뜰 수 있겠다. 포장지 겉면을 읽어보면 핫팩의 온도가 70'c에 육박한다고 하는데 수건을 뜨겁게 삶아서 여러 번 반복하는 그 행위보다 더욱 간편하고 온도는 유지되니 훨씬 좋은 방법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15분마다 가서 수도계량기함을 열어 손을 집어넣고 온도를 체크했는데도 여전히 뜨겁다. 다행히도 온도는 유지가 되니 금방 온수가 나왔..으면 좋겠지만 일이 쉽게 안 풀리려나 보다. 물론 그럼에도 과학을 배운 우리들이 여기서 쉽게 포기할 순 없다. 얼음이 녹기까지는 일정 시간이 필요하다. 수도관 안에 들어있는 얼음의 양을 모르기 때문에 정확한 시간을 구해낼 순 없어도 대강 1시간은 반드시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30분을 더 기다려서 1시간 30분 동안 열을 가했는데도 꿈쩍 않고 한 방울 토해내지 못하는 수도꼭지를 보며 잘못돼도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결국 도움을 청할 목적으로 관리소에 전화를 걸어버렸다(물론 포기는 아니다).


"관리소지요? 혹시 수도관을 어떻게 녹이는 것이 좋을까요?"


"XXX동인 가요? 거기 옥상에 물탱크가 터졌어요. 지금 고치고 있고, 4시부터 나올 거예요."


"(아뿔싸), 고맙습니다."


물이 안 나와서 불편하긴 해도 불필요하게 쓴 월차 덕에 하루를 재밌게(?) 보냈는데 물론 느끼고 배운 점도 상당하다. 나 혼자 겪는 고통은 괴롭지만 모두가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동질감이나 공감으로부터 얻는 위로와 안도감이 굉장하다는 점과 절기에 따른 계절의 변화를 예측하고 준비하던 선조들의 지혜처럼 무언가를 미리 준비하는 그 자세와 마음가짐은 시대나 농경사회와는 무관하게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이 되겠다. 역시 우리 인생은 배움의 연속이고 그러면서 대단한(?) 발견을 해대며 발전하는 그 삶이 바로 우리의 일상이다. 그럼에도 오늘의 가장 큰 배움이라면 단정 짓거나 고집부리지 말고 주변에 먼저 물어보고 도움을 요청하는 그 자세 역시 중요하다는 사실이 되겠다.


혹시라도 가능하다면 25 절기로 바꾸어 '소한'과 '대한' 사이에 '동파'라는 절기를 추가하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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