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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혁진 Nov 14. 2020

2차원 평면, 연극, 세상을 넘어

<정년이>

     

  현 시점에서 <정년이>를 주목하지 않기란 힘들어 보인다. <정년이>는 젠더 전복성을 갖는 여성국극이라는 소재를 택하고 이를 통해 다채로운 여성 캐릭터를 선보이며 페미니즘이라는 동시대성을 재현한다. 많이 이들이 여성서사로 언급하는 것도, 이른 시기에 <2019 오늘의 만화>를 수상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처럼 <정년이>를 여성서사로 지칭하는 건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정년이>를 논의하는 건 또 다른 문제다. 그것은 매번 되풀이되지만 여전히 명확하지 않은 여성서사 논쟁과도 맞닿아 있다. 

 <정년이>는 여성서사인가. 그렇다. 그러면 질문을 바꿔 <정년이>는 또한 근성의 주인공이 경쟁에서 승리하는 소년 만화 달리말해 성별이 반전된 소년만화이기도 하지 않을까. 이에 누군가는 이렇게 반론할지 모른다. <정년이>는 소년만화와 달리 매력적인 다수의 여성 캐릭터가 존재한다고. 시원한 눈과 함께 경쾌하게 몸짓하는 정년이와 가지런히 자른 앞머리에 차분하지만 한편으로 단호한 표정의 주란이 그리고 아픔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것에 짓눌리기보다 씨익하고 웃어넘기는 도앵이 같은 캐릭터는 분명 매력적이다. 그럼에도 여성 캐릭터가 다수이기 때문에 여성서사라고 말하는 건 어딘가 허망하다. 그것은 이 주장이 결함이 있어서가 아니라 <정년이>에 대해 충분히 말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여성 서사를 지칭하는 것을 넘어 무엇이 여성 서사를 구성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답해야 할 때다. <정년이>는 여성 국극을 다룬 작품이다. 그러니 다시 질문을 던져보겠다. <정년이>는 연극이라는 매체를 어떻게 만화적으로 재현하는가 또한 이를 통해 여성서사라는 의미를 어떻게 생성하는가.     


세상, 연극이라는 무대 

 <정년이>는 연극 만화다. <정년이>가 단순히 여성 국극을 다루고 있음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을 이렇게 이야기하는 건, <정년이>가 연극 무대를 생산하고 연극적 경험의 장을 구축하기 때문이다. <정년이>의 배경을 보자. 그것은 어딘가 현실에서  벗어난 느낌이다. <정년이>의 세계가 비록 음영을 덜어낸 세계이긴 하지만, 거리의 배경은 무게감 없이 텅 빈 공간처럼 느껴진다. 여기에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작가가 밝혔듯, 배경 작화의 숙련도 문제이며 여기에 더해 3D 모델링의 이미지가 차가운 인상을 더 했을 뿐이다. 하지만 사실과 무관하게 <정년이>의 배경은 이미 연극이라는 주제론적 체계에 포섭되어 있다. 이 무게감 없는 수직의 이미지는 연극 무대의 세트처럼 보이며 그래서 <정년이>의 현실 세계는 또 하나의 연극 무대로 등장한다. 어쩌면 정년이가 무대가 아닌 현실에서도 그렇게 연극적인 표정과 동작을 취하는 건 이 때문일지 모른다. 게다가 <정년이>에서 반복되는 두 시선, ‘내려다보는 시선’과 ‘올려다보는 시선’은 작품에 내재한 연극의 구조를 무엇보다 선명히 제시한다. 두 시선은 다름 아닌 상층 객석에서 무대를 내려다보는 시선과 무대 아래 객석에서 배우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남장 여장을 하고 살아가는 ‘고 사장’ 역시 연극적 속성으로 계열화된 인물이다. 서사적 측면에서 고 사장은 초반에 정년이가 남성 연기를 하는데 도움을 주는 조력자로 이 후에는 정년이의 연기를 설명하는 해설자로 기능한다. 특히 주제적 측면에서 고 사장은 젠더 전복성을 갖는 장르인 국극으로 상징화 된다. 국극의 경우 성별교차 연기에서 몸의 현존성이 실제(여배우)와 재현(남역)의 긴장을 전경화하기 때문에 복장전환 공연은 남성과 여성뿐만 아니라 이성애와 동성애의 이분법적 경계를 탈안정화시킨다1). 엄밀히 말해 <정년이>는 국극의 젠더 전복성의 잠재력을 끝까지 밀어붙이지는 않는다. 실제 국극의 배우들은 짙은 눈썹과 구레나룻와 같은 남성적 기표를 적극 차용하며 젠더 역할을 교란하지만, <정년이>의 배우들은 중성적으로 조형된 몇몇 캐릭터를 제외하고는 탁월한 미형의 캐릭터를 온전히 유지하는데 집중한다. 따라서 <정년이>는 대신 이야기 초반부 고사장을 여성 국극단의 관계에 배치하여 국극의 성별 정치학을 분명하게 제시하려 한다. 


 그런데 여기서 고 사장이 보다 흥미로운 지점은 그가 젠더의 구성 문제를 기어코 연극이라는 주제론적 체계로 확장시켜 나간다는 사실이다. 고 사장은 말한다. “세상은 거대한 여성국극 무대 같아. 이성적이고, 용감하고 근육질인 남자와 상냥하고 사랑스럽고 가녀린 여자. 사람들은 여자와 남자를 연기하며 살지. 국극 배우처럼.” 이어 젠더 역할을 교란하는 자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아가씨가 그러시더군. 우리를 괴물이라고 부르면 괴물이 되자고. 괴물이 돼서 이 역할극을 망치자고.” <정년이>의 가장 인상적인 대사 또한 고 사장의 몫이다. “고작 어깨를 떡 벌리고 목소리를 깔았을 뿐인데 말이야. 남자됨과 여자됨이 참 가소로워.” 사실 이 대사의 내용 자체는 현 시점에서 놀라움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남자됨’, ‘여자됨’, ‘가소로워’라는 어절이 순차적으로 이어져 연극적 언어로 발화될 때 그것은 비로소 우리에게 아니 관객인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유리가면과 대비하면 선명해지는 것들

 <정년이>가 연극 만화라는 사실은 작가와 독자 모두에게 원하든 원치 않든 <유리가면>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유리 만화>는 연극 만화라는 장르 자체는 아닐지라도 그 만큼의 영향력을 현재까지도 지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정년이>와 <유리가면>을 비교하는 작업은 <정년이>를 이해하는 데 있어 유효한 방법론이 될 수 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비교해야 할까. 재현된 연극 이미지와 그 이미지를 실어 나르는 칸의 배치를 분석해야겠지만 그러기 위해선 이전에 어느 정도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이 필요하다. 기준으로는 무대, 희곡, 관객, 배우 등 연극의 4대 요소 모두 가능하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우선 배우를 비교의 기준으로 택하고자 한다. 배우는 연극의 필수적인 요소로서 특히 배우의 존재론적 사유는 연극의 본질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배우는 부인할 수 없는 현존과 별개로 존재론적으로 모호한 존재다. 그들은 기호의 생산자인 동시에 기호의 영역 안에서의 생산물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배우는 언어학적 ,음성적, 움직임의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는 담화의 발화자이지만 동시에 허구 안에서 기능하는 극작가와 연출가를 대행하는 이중적 발화자다2). 그렇다면 이 같은 배우의 이중적인 존재를 <정년이>와 <유리가면>은 각각 어떻게 재현할까. 


 먼저 <유리가면>의 연극을 살펴보자. <유리가면>의 연극은 하나의 전조로 시작된다. 그 전조는 주인공 ‘마야’가 자신을 벗어던지고 텅 빈 눈을 가진 차가운 얼굴 즉 유리가면을 쓰는 행위다. 이 후 자아가 해체된 그녀는 중첩된 이미지와 상징적 표현과 함께 강박적인 칸으로 연쇄되는데 그 결과 전면적인 환각주의가 <유리가면>의 무대를 지배한다. 만약 <유리 가면>의 특정 연극 장면을 때어낸다면 우리는 그것을 더 이상 무대에서 벌어진 연극이라 인식할 수 없으며 심지어 전체 페이지를 펼쳐내 연극 무대의 실체를 드러낼 때조차도 그것은 이미 자기완결적인 소우주의 형태를 띤다. 다음으로 <유리가면>에 이어 <정년이>의 연극 무대다. <정년이>에서 유리가면에 상응하는 전조는 연극하기에 앞서 앞으로 내딛는 발이다. 이전에 언급한 배우의 존재론으로 두 작품의 전조를 해석한다면 ‘유리가면’은 연극의 환영적 세계의 일부로서 배우의 인격을 제거한 극중 배역을 의미하고, 인간의 신체인 ‘발’은 연극 무대라는 공간을 점유하며 물리적 몸으로 연기를 수행하는 배우를 의미한다. 게다가 다소 비약적일지라도 배우의 이중적 존재론은 연극의 연기스타일의 개념으로까지 확장 가능하다. 가령 전자는 삶을 재현하려는 시도로서 관객에게 특정한 시간, 장소 또는 특정한 종류의 삶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는 환영을 일으키는 재현적 연기 스타일로, 후자는 무대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을 연극으로 보아주기로 관객과 약속하는 것을 전제하고 삶의 환영을 일으킬만한 장치를 최소화하는 제시적 연기 스타일로 연계 된다3). 



  


 이러한 연극적 층위에서 <정년이>는 비록 재현적 연기 스타일을 전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유리가면>과 비교해 제시적 연기가 우세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정년이>는 제시적 연기를 구현하기 위해 연극적 시점인 내려다보기와 올려다보기를 다시금 도입한다. 내려다 보는 시점은 무대라는 공간, 무대장치라는 물질 그리고 연기를 수행하는 배우의 몸이라는 연극의 전체상을 조망함으로써, 이것은 연극이다라는 진실을 지속적으로 환기한다. 더욱이 올려다보는 시점의 경우 관객 앞에서 배우가 공연하는 연극의 본질적 특성을 시각적으로 재현한다. 그것은 한 인물만을 온전히 전념하는 직사각형 칸을 통해, 이미지를 연장하는 스크롤의 운동을 통해 실제 연극 무대를 보는 관객의 경험을 체험케 한다. 그들은 지금, 여기 우리 앞에 있다. 그러니까 화면 전체를 꽉 채우는 감각적인 이미지 즉 화면에서 튀어나올 것만 같은 배우의 형상이 시야에 떠오르면 그들의 현전은 우리를 완전히 사로잡는다. 다만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배우와 연결되는 이 강렬한 감각은 영화처럼 카메라가 배우에게 가까이 다가가서가 아니라 정반대의 방향으로 연극처럼 배우가 관객을 향해 다가서기 때문에 발생한다는 점이다. 이 같이 <정년이>의 배우들은 2차원 평면을 그리고 무대와 관객 사이에 있다고 가정된 ‘제4의 벽’을 뚫어내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그 욕망은 앞서 다른 차원으로 들어서기 위해 앞으로 내딛는 발에서 예고된 것이며 특히 화면의 표면을 향해 손을 뻗는 일련의 이미지에 의해 보다 분명해진다. 구체적으로 ‘자명고’ 무대의 정년이의 연기를 보자. 정년이의 손은 칸의 경계를 넘어서며 심지어 그 신체가 화면 밖으로 확장됐음을 암시하기 위해 화면의 물리적 경계에 잘려나가기까지 한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렇게 잘려나간 손이 기이하게도 다음 장면에 재차 등장해 화면을 뚫어내려 하면, 우린 무대를 현존으로 채우려는 그 절박한 순간을 숨죽여 지켜볼 수밖에 없다.   


연극 다시 세상이다 되다

 <정년이>의 무대 행위는 연극 연출만으로 환원될 수 없는 무언가다. 정년이를 포함한 여러 배우들은 손에 닿을 것만 같은 생생한 감각과 함께 마치 2차원적으로 규정된 존재를 넘어서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재현되기보다 자신을 현시하려 한다. 우리는 이러한 <정년이>의 연극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 지점에서 존재로 충만한 이미지는 여성 서사의 관점에서 독해가 가능하지 않을까. 남자 극작가 앞에서 대본에 이의를 제기한 도앵의 에피소드를 보자. 도앵은 “대본을 수백 번 읽었지만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청의 왕자는 왜 공주가 됩니까? 왕자끼리는 혼인할 수 없으니까요? 그럼. 청의 공주는 왜 왕비가 됩니까? 여자가 왕이 될 수 없으니까?”라고 말하며 극작가의 대본과는 다른 자신만의 연기를 펼친다. 이 에피소드는 단순히 대본의 해석 문제가 아니다. 이는 존재론적 모색으로 배우는 더 이상 작가의 텍스트나 연출가의 담론을 옮기는 대리인으로서만이 아닌, 내가 고민하는 문제를 어떻게 무대 위에 현존시킬 것인가를 고민하고, 오직 자신의 말과 행동의 진정성을 통해 타자와 교감할 수 있는 방법을 탐색 한다4). <정년이>가 연극을 재현할 때 전체 서사를 전경화하지 않는 것 역시 그래서다. 그것은 <정년이>의 배우와 나몬, 서이레 작가의 일종의 공모로서, <정년이>의 배우가 연극 배역을 넘어서는 과잉의 이미지를 분출하며 <정년이>의 작가는 극작가의 의도와는 어느 정도 벗어난 연극을 제안한다. 이러한 이유로 연극 ‘춘향전’, ‘자명고’에서 극중 주인공은 더 이상 원작과 같이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 주인공은 때론 배경으로 사라지고, 대신 이보다 중요치 않은 하지만 재해석된 방자, 고미걸, 구슬아기와 같은 배역들이 배우의 욕망과 반향을 일으키며 전면으로 등장한다. 

  다시 말해 <정년이>의 연극이미지를 여성서사의 원근법으로 구축하면, 소실점으로부터 방사된 투시선엔 2차원 평면, 연극 무대와 대본, 극작가와 연출가의 담론 그리고 남성중심의 세계가 점진적으로 배치된다. 여성 국극의 형식과 역사가 암시하듯 <정년이>의 배우들에게 있어 이 모든 것은 거주하는 공간이면서 동시에 넘어서야하는 매체, 제도, 세계다. 결국 연극 무대란 예술의 장 이전에 그들의 삶을 펼쳐 내야할 터전이다. 세상이 거대한 연극 무대라면 역으로 연극은 축소된 세상의 무대인 것이다. 그러니 <정년이>는 여성이 연극 하는 이야기 이상의 의미를 가진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이는 돈을 벌기 위해 또 다른 이는 인정을 받기 위해 연극을 시작한다. 그리고 어떤 이는 고정된 이미지에 사로잡혀 타인의 연기를 따라하고, 또 다른 이는 내제된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의 연기를 옥죈다. <정년이>를 여성서사로 주목하는 것은 바로 그 여성들이 연극이라는 무대를 중심으로 욕망을 발산하며 자신의 주체를 모색하기 때문에 더 나아가 여성국극의 미완의 기획마저도 상상하기 때문이다.     


  끝으로 연극적 시선을 암시하는 장면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겠다. <정년이>의 많은 인물들은 화면에 존재감을 가득 채운 채 정면을 응시한다. 그들이 응시하는 대상은 일차적으로는 극 중 인물이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바라보는 대상은 연극을 보는 만화 속 관객이며 이어 2차원 평면을 넘어서 <정년이>를 바라보는 우리 자신이다. 이처럼 정면을 바라보는 시선은 관객의 위치를 드러내긴 하지만, 마네의 회화처럼 관음증을 폭로하는 기능으로 작동하진 않는다. 정년이의 그 커다란 눈망울과 마주할 땐, 우리는 정년이의 연기에 환호하고 설사 엇나갈지라도 정년이의 욕망을 이해하고 또한 정년이와 다른 여성들과 연대를 지지하게 된다. 더욱이 댓글 창으로 정년이의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로 최종 응답할 때 <정년이>를 둘러싼 세계는 진정으로 여성 국극이 되는 것이다. 연극 연출가 피터 브룩의 말을 빌리겠다. 2차원 평면의 빈 무대가 있다. 누군가가 이 빈 공간을 가로질러 흔적을 남기고 다른 누군가가 이를 지켜본다면, 그것만으로 이미 연극은 시작된다.            




1) 김지혜, 1950년대 여성국극의 공연과 수용의 성별 정치학

2) 안 웨브르스펠트, 관객의 학교

3) 이신영, 셰익스피어 인 러브에 나타난 연기 스타

4) 김기란,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연기 개념과 배우의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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