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razy Kat>의 본격적 논의에 앞서 <Mouse> 작가 아트 슈피겔만의 일화를 소개하겠다. 아트 슈피겔만은 중고등학교 시절 시와 문학작품을 비교하는 숙제를 한 적이 있다. 그때 그는 문학작품으로 조지 헤리먼(George herriman)(1884~1944)의 <Krazy Kat>을 택했다. 이후 그래픽노블 작가의 경력을 생각하면 적실한 선택으로 보이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만화를 저급예술로 간주한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다소 무모해 보인다. 하지만 아트 슈피겔만의 선택은 결코 무모한 선택이 아니었다. <Krazy Kat>은 부정적 시선에서 비껴간 우회적인 작품으로 다른 만화가 누리지 못한 높은 문학적 평판을 얻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Krazay Kat>은 연재 당시 많은 동시대 지식인과 예술인을 매혹시켰으며 이를 열거하자면 시인 E.E 커밍스(Edward Estlin Cummings), 작가 엘윈 브룩스 화이트(E. B. White), 작곡가 존 앨든 카펜터(John Alden Carpenter), 영화 감독 프랭크 카프라(Frank Capra),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Thomas Woodrow Wilso) 등을 꼽을 수 있다. 특히 <Krazy Kat>의 강력한 옹호자 길버트 셀대스(Gilbert Seldes)는 <The Seven Lively Arts>에서 다음의 논평을 남긴다. 재즈, 찰리 채플린의 영화, 브로드웨이의 보드빌과 뮤지컬을 주목하면서 <Krazy Kat>을 “오늘날 미국에서 제작된 작품 중 가장 재미있고 환상적이며 만족스러운 작품”이라 말한다.
그런데 길버트 셀대스의 이 열정적 상찬은 예사롭지가 않다. 위대한 작품을 언급할 때 의례적으로 따라붙는 수사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이 단순한 문장은 뜻밖에 <Krazy Kat>을 본질을 정확히 포착한 듯하다. 그러니 이번에는 한 세대를 넘어 비트 제너레이션(beat generation) 작가 잭 케루악(Jack Kerouac)의 진술을 주목해보자. 그는 <Krazy Kat>을 비트 제너레이션의 직계 조상이라 언급하며 자신의 뿌리가 미국의 환희, 미국의 정직성 그리고 야생적이며 자기 신념적인 개인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주장한다. 물론 길버트 셀대스와 잭 케루악이 동일한 층위의 지평선에 서 있다 말할 수 없다. 다만 두 사람은 어찌하였든 <Krazy Kat>에서 미국적 시정을 감지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따라서 이렇게 질문을 제기할 수 있겠다. 미국 만화계가 <Krazy Kat>을 찬양한 이유는 오직 작품의 내적인 예술적 성취 때문일까? 생각해보면 <Krazy Kat>의 형식은 다른 걸 모두 제쳐두고라도 미국의 독특한 산물인 신문 산업과 때어놓고 생각하는 게 애당초 가능한 일인가. 끊임없이 변화하는 칸과 배경은 변덕스러운 시장 상황에 따라 임의적으로 배정된 페이지의 대응일 것이며, 미국 남서부 풍경에 경의를 표한 수평의 직사각형 칸들은 앞선 경우보다 더 틀림없이 신문지면의 넓은 전면성에 기인한 것일 테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지점에서 반드시 짚고 가야 할 인물이 있는데 그는 허스트 신문제국의 경영자이자 또한 조지 헤리먼의 시대착오적 후원자인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William Randolph Hearst)다. 옐로우 저널리즘을 촉발한 이 냉혹한 자본가는 조지 헤리먼에게 이상하리만치 관대했다. 심지어 신문 사업의 불이익을 감수하고서라도 말이다. 허스트는 편집자의 반대, 독자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Krazy Kat>에 평생 연재를 허락했으며 이에 조지 헤리먼은 경제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의 극심한 혼란 속에서도 고요한 미적 세계를 지속할 수 있었다.
결국 길버트 샐대스, 잭 케루악, 랜돌프 허스트 각기 다른 미국적 인물들로 무엇을 말하려는 걸까. 나는 세 인물과 <Krazy Kat>의 관계를 보면서 하나의 가정을 하게 된다. 이처럼 재즈, 신문 산업, 무정부적 개인주의 등과 긴밀히 연루돼 있다면, <Krazy Kat>을 미국적인 무언가로 규정할 수 있지 않을까. 달리 말하면 서부극이 “미국적인 미국 영화”이듯 <Krazy Kat>도 미국적인 미국 만화라는 가정. 이런 이유에서 <Cartoons Magazine>(1917)에 실린 한 칼럼은 이 글의 좋은 참조점이 될 수 있다.
오스카 와일드는 언젠가 그리스인이 고안하지 않은 유일한 문학 형식이 소네트, 엉터리 스코틀랜드 사투리로 쓰인 발라드 그리고 미국의 저널리즘이라 말한 적이 있다. 고대 그리스의 명성을 생각하면, 미국 저널리즘의 원형이 페리클레스의 시대에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에 기뻐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동시에 이 또한 명백한 사실이다. 미국의 저널리즘 없이는 미국의 코믹 스트립을 가질 수 없을 것이며, 미국의 코믹 스트립 없이는 헤리먼의 <Krazy Kat>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Krazy Kat>의 자기반영적 데뷔
주인공 이그나츠와 크레이지는 1910년 6월 20일 <New York Evening Journal>에 실린 <The Didngbat Family>에 최초로 등장한다. 조지 헤리먼은 애초에 명확한 의도를 가지고 이그나츠와 크레이지를 창조했던 것은 아니다. 그림 하단에 여백이 남았고 그래서 무언가를 그냥 끄적여 본 것이다. 그러고는 이름조차 없던 쥐와 고양이는 이후 여백의 자치권을 획득하고 1931년에는 급기야 <Krazy Kat>으로 정식 데뷔하기에 이른다. 이그나츠와 크레이지의 어처구니없는 데뷔. 하지만 동시에 <Krazy Kat>의 창작일화는 이후의 두 형식 즉 매체를 노출하고 장난치는 자기반영적 형식과 경계를 와해하고 가로지르는 유동적 형식을 예견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조지 헤리먼은 빈 공간이 있다는 이유로 즉흥적으로 펜을 휘갈겼다. 곰 브리치에 의하면 조지 헤리먼의 시각적 농담은 장난기 어린 낙서를 행하고, 창조의 마술을 농담처럼 처리하는 19세기 유머 작가의 초연함 같은 것일 테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초기 근대 만화가들이 만화 언어가 굳어질 위험에 처할 때마다 취했던 자기반영적 제스처이다. 만화 형식이 미처 정립도 되기 전 캄(Cham), 도레(Doré), 그랑빌(Grandville) 등은 가장 변덕스러운 위트에 대한 권리를 내세우며 만화표면의 흔적들을 가지고 논다.
이러한 맥락에서 1918년 7월 21일에 연재된 <Krazy Kat>를 들여다보자. 이그나츠와 크레이지는 <The Didngbat Family>의 서사적 구도에 따라 수평으로 그어진 선을 기점으로 각각 위아래에 배치된다. 그리고 이때 주목할 지점은 다름 아닌 수평의 선이다. 이 선은 이그나츠가 발로 딛고 있기에 세계의 지면으로 기능해야 할 게다. 하지만 이그나츠는 느닷없이 수평선을 끊어버리고 심지어 그 선으로 아래에 위치한 크레이지 캣을 묶어버린다. 마치 이 세계가 드로잉된 선으로 이뤄진 세계라는 것을 확신하는 듯. 더욱이 환영주의를 희생해서라도 경계를 넘어서려 하는 <Krazy Kat>의 유동성은 비단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선의 경계뿐만 아니라 칸과 페이지의 경계 역시 유동성의 형식으로 조직된다. 칸은 그리드에서 이탈해 표면을 배회하고, 페이지는 칸을 담아내는 용기이자 동시에 외곽선이 없는 커다란 칸으로 기능한다. 특히 칸의 유동성은 아찔하리만큼 황홀한데 왜냐하면 시공간을 재현하는 전통적인 칸이 서사가 전개됨에 따라 그 자체로 자족적인 부동의 타블로와 외화면을 가리우는 터널비전 그리고 시각적 리듬을 부여하는 구두점과 표면의 패턴을 조직하는 콜라주 조각으로까지 무수히 변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잠시 <Krazy Kat>의 서사로 돌아가 보자. 크레이지는 맹목적으로 이그나츠를 사랑하고 이그나츠는 이런 크레이지의 사랑을 진심으로 경멸한다. 그리고 이그나츠는 기회가 올 때마다 벽돌을 크레이즈 머리에 던지지만, 정작 크레이지는 이 벽돌을 사랑의 징표로 오인한다. 여기에 더해 크레이즈를 사랑하는 오피사(Offissa) 퍼프는 이그나츠를 저지하고 감옥에 가둠으로써 세 인물의 기묘한 삼각관계가 성립된다. 결코 멈춤을 모르는 욕망과 결코 당도할 수 없는 사랑 이야기. 이 무한히 변주되는 삼각구도는 과연 유동하는 칸과 결합할 때 어떠한 방식으로 자기 반영적 작업을 수행할까. 퍼프는 맹목적이기에 실제 이그나츠와 이그나츠를 재현와 타블로를 구분하지 못한다. 이그나츠를 막으러 뛰어온 퍼프는 칸의 터널비전을 완연히 통과하고 나서야 자신의 상황을 뒤늦게 이해한다. 그리고 벽돌과 이그나츠가 그려진 그림 에피소드 역시 이와 유사한 자기 논평을 수행한다. 그림이어야 할 그것은 이후 실제 이그나츠와 벽돌임이 판명되고 그 결과 이그나츠는 성공적으로 크레이지에게 벽돌을 던진다. 여기서 쓰러진 크레이지 캣을 발견한 퍼프는 어떤 행동을 취할까? 비약적인 간격으로 그가 정확히 어떠한 행동을 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다음 장면, 경계를 교란하던 칸에는 일련의 선이 그어져 있고 이로 인해 이그나츠는 자기 반영성을 과시하며 쇠창살 달린 감옥에 투옥된다.
초현실적 배경의 의미란
<Krazy Kat>의 세계는 끊임없이 유동한다. 헤라클레이토스의 표현을 따르자면 <Krazy Kat>의 만물은 유전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칸과 페이지를 그 사례로 꼽을 수 있지만, 이보다 칸과 페이지의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배경에 주목하여 보자. <Krazy Kat>의 배경은 주인공의 운동으로부터 독립한 채 자신의 형상을 변화시켜 나간다. 많은 독자와 평론가가 지적하였듯 이렇게 고정되지 못하고 유동하는 배경은 분명 초현실적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런 생각이 든다. 그들이 말하는 초현실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초현실이라는 수식어는 의미를 명료히 하기 보다는 오히려 흐릿하게 하는 것 같다. 비평을 수행하는데 있어 초현실의 의미는 한층 엄밀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초현실이 의미하는 바를 구체적으로 지각적 관점에서 검토해보자. 우리는 어떠한 조건하에서 운동을 지각하는가? 시각적 운동의 경험은 형상과 배경의 자리바꿈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이보다 더 중요할 것은 참조틀인 ‘배경’은 움직이지 않는 요소로 또한 배경에 속하는 ‘대상’은 움직이는 요소로 이해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Krazy Kat>은 이 같은 배경과 대상의 일반적 관계를 뒤집어 버린다. 그러면 <Krazy Kat>은 이제 정말 초현실적이라고밖에 말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그나츠와 크레이즈 캣은 별다른 행위를 취하지 않음에도 움직이지 않아야 할 배경이 자체적인 운동을 개시하고 이어서 변화하는 배경은 이그나츠와 크레이지를 집어삼키며 그들의 운동성을 모조리 앗아가 버린다.
운동과 관련한 지각적 관점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다음은 초현실주의와 인접한 20세기 예술사조 ‘모더니즘’의 관점으로 <Krazy Kat>을 검토해보자. 1930년 미국에서 호안 미로(Joan Miró)의 개인전이 최초로 개최될 때, 평론가 로이드 굿리치(Lloyd Goodrich)는 호안 미로와 조지 헤리먼 사이의 유사성을 발견하고 <Krazy Kat>을 미로 발명품의 먼 사촌이라 선언한다. 또한 <Krazy Kat>을 호안 미로의 작품 외에도 실바도르 달리(Salvador Dalí)의 작품과도 공명한다 조심스레 제안하고 싶은데, 그의 작품에서 암시하는 스페인 내륙의 지평선은 <Krazy Kat>이 그려내는 미국남서부 사막의 지평선가 어딘가 닮아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까지의 공통점은 어디까지나 표면의 유사함에 기댄 인상비평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번에는 직접적으로 조지 헤리먼과 동시대 미국 미술계와의 관계를 추적해보자. <Krazy Kat>은 의미심장하게도 헤리먼의 절친한 동료인 월트 쿤(Walt Kuhn)이 주최한 미국 최초의 국제현대미술전 아모리 쇼(Armory show)가 열린 1913년에 데뷔한다. 아모리 쇼가 미국 사회에 미친 커다란 스캔들을 고려한다면 동시에 미국의 젊은 세대 예술가에게 끼친 엄청난 영향력을 고려한다면, 조지 헤리먼 역시 동시대 모더니즘에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헤리먼은 1917년 영국의 소용돌이파 전시를 개최한 뉴욕시 전위예술가 협회에 참여했던 경력이 있다. 더군다나 <Krazy kat>에서 이질적으로 결합한 배경과 대상을 후기작에서 두드러지는 해칭의 감소와 평면화의 증대와 겹쳐보자. 우리는 이중적 층위를 동반한 <Krazy Kat>의 초현실적 풍경에서 20세기 모더니스트를 매혹시킨 바로 그 콜라주를 읽게 된다.
지각적 관점 혹은 모더니즘 관점을 내포한 초현실주의. 두 가지 관점 모두 가능하리라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Krazy Kat>의 초현실적 배경으로 진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게 아니다. ‘초현실적 배경’이라는 전제에 의문을 부치고 이와 같이 되물어야 한다. 조지 헤리먼은 정말로 세계를 초현실적으로 그려낸 걸까? 만약 ‘그렇다’라 한다면 우리는 <Krazy Kat>에서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게 될지 모른다. 가령 초현실주의와의 관계를 단호히 부정한 프리다 칼로(Frida Kahlo)의 일화를 떠올려보자. 프리다 칼로는 “브르통은 나를 초현실주의자로 생각하지만, 나는 초현실주의자가 아니다. 나는 결코 꿈을 그린 적이 없다. 단지 나 자신의 현실을 그렸을 뿐이다”라고 언급한다. 그렇다. 조지 헤리먼도 사실 프리다 칼로의 경우처럼 초현실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그려낸 게 아닐까. 이 시기 헤리먼은 공교롭게도 멕시코 국경에서 그렇게 멀다하지 않을 모뉴먼트 밸리를 순례하고 있었다. <Krazy Kat>의 초현실적 풍경의 기원이라 할 미국 남서부의 황량한 대지를. 그러니 우리는 이제 서론에서 제기했던 하지만 오랫동안 미뤄왔던 ‘미국적 미국 만화’의 주제를 다시 꺼낼 때가 됐다. 우선 풍경과 지질학적 특성이 특정 작품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보는 “지리학적 해석”을 도입해보자. 풍경이 조장할 수 있는 지각적 관습이 무엇인지 혹은 풍경의 외양이 작품 속에 남긴 흔적이 무엇인지를 살피자는 의미다. 미술 평론가인 존 버거(John Berger)도 이 같은 방법론으로 스페인내륙의 고원과 쥐라산맥의 카르스트를 경유하여 각기 벨라스케(Velasquez)와 쿠르베(Gustave)의 작품을 통찰력 있게 분석한 바 있다.
따라서 우리는 끝을 가늠할 수 없는 지평선을 바라 봤을 조지 헤리먼의 그때 그 심정을 헤아릴 필요가 있다. 공간을 지워내는 거친 모래바람과 직면할 때, 풍경을 예외 없이 동일한 명도로 채광하는 눈부신 태양 아래 놓일 때 그리고 무엇보다 낮과 밤이 전환되어 정말 모든 것이 뒤바뀌는 경이적 순간을 경험할 때, 조지 헤리먼은 그저 눈앞에 펼쳐진 초월적 풍경을 그려낼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조지 헤리먼이 그렸던 풍경은 그러니까 실제의 미국 남서부 대지였다. 물론 이러한 지리학적 해석은 자의적 해석에 불과할지 모른다. 이보다 분명한 지리적 경험을 요구한다면 이번에는 표면에 부인할 수 없으리만큼 선명히 각인된 모뉴먼트 밸리의 지평선을 바라보자. 눈앞이 아득해지는 이 지평선은 어딘가 익숙지 않은가. 우리는 모뉴먼트 벨리에 경의를 표한 작가가 조지 헤리먼 혼자만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영화감독 존 포드(John Ford) 또한 광학적 매체에 기대어 이 광대한 황야와 사막을 서부극에 헌정했었다.
pop그러면 우리는 미국적 미국 만화 <Krazy Kat>에 관해 이처럼 물어야 한다. 서부극의 영화적 풍경과 달리 <Krazy Kat>은 어떠한 만화적 풍경을 펼쳐내는가. 조지 헤리먼은 비본질적이라 간주될 선을 철저히 배제하고 그렇게 해서 남은 몇 개의 선으로 지평선을 그려낸다. 이를테면 직선의 가장 단순한 형태인 수평선을 주욱 그어버리고서는 그 즉시 텅 빈 표면에 땅과 하늘이 맞닿은 지평선을 정착시키는 것이다. 다만 이 존재론적인 줄긋기는 수평의 방향으로만 향해서는 안 된다. 수평선이 중심적 주제이기는 하나 그 자체로 <Krazy Kat>의 풍경을 성립시키지 못한다. 수평선을 그은 이후에도 어떤 작업이 수반되어야 하며 그래서 다음의 작업으로 수평의 세계에 수직의 운동을 도입해야 한다. 그 결과 <Krazy Kat>의 수평선상에는 수직의 퍼포먼스를 연출할 일종의 보드빌 무대가 펼쳐진다. 수직의 존재 이그나츠, 크레이즈, 퍼프가 차고 무한한 움직임 중 가장 간결한 형태의 선에 활기를 불어넣으며. 하지만 그럴지라도 우린 잊어서는 안 된다. 수평선이 언제나 수직의 희극을 위해 마련된 무대일 수만은 없다는 걸. 수평의 운동이 수직의 운동을 초과하여 수평의 선이 서서히 수직의 선을 지워낼 때가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때의 이그나츠와 크레이지와 퍼프의 몸짓은 서글프다. 그들은 절박한 몸짓에도 서로에게 쉬이 닿지 못한다. 그 까닭은 <Krazy Kat>의 세계는 유전하는 세계이되 부조리하게도 무한히 되돌아올 세계이기 때문이다. 특히 수평선 너머 펼쳐지는 무시간적 공간 속에 찰나와 같은 수직의 운동이 교차될 때면 우린 이 부조리한 운명을 받아들이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그나츠, 크레이지, 퍼프의 삼각관계는 이렇게 수직과 수평의 구도를 따라 영원히 반복된다.
유동적인 정체성, 유동적인 형식
<Krazy Kat>은 미국적 미국만화다. 조지 헤리먼은 자신의 지리적 경험을 통해 2차원 만화적 평면에 미국의 시원적 풍경이라 할 모뉴먼트 벨리를 기입한다. 그 풍경은 미국적이라 할 정취로 가득하다. 하지만 모뉴먼트 벨리의 전언만으로 <Krazy Kat>을 미국적 만화로 규정하기에는 다소 조심스럽다. 그래서 지리적 맥락 이외에도 추가적으로 미국의 사회역사적 맥락 내에 <Krazy Kat>을 위치시켜보자. 1971년 사회학자 아사 버거(Asa Berge)는 뉴올리언스 보건국의 문서에서 조지 헤리먼이 유색인종이라는 사실을 밝혀낸다. 조지 헤리먼은 백인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출생증명서에서는 유색인으로 기입돼 있었다. 즉 헤리먼은 서인도제도 혼혈인 크리올에 기원했지만 하얀 피부로 미국의 인종적 경계를 통과하여 백인 사회에 편입했던 것이다. 출생의 비밀, 이중의 정체성, 경계의 이월 이렇게야 뒤늦게 밝혀진 진실에 관해 우리는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앞으로 논의될 <Krazy Kat>은 더 이상 이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사실이다. 1902년 초기작 <Musical Mose>을 다시 보자. <Musical Mose>는 흑인 음악가가 다른 인종을 가장하다 종국에 발각되어 끝나는 내용이다. 이어서 <Krazy Kat>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다음의 에피소드는 어떠한가. 이그나츠와 크레이즈 캣은 각기 검은 재와 햐안 밀가루를 뒤집어쓰고 자신의 피부색을 바꾼다. 단순히 인종적 하위 텍스트로 인식됐을 작품들이 이제는 인종에 관한 작가의 자전적 논평으로 해석하게 된다.
이 뿐만이 아니다. 경계를 가로지르는 작가의 정체성은 특정 에피소드에 머무는데 그치지 아니하고 더 나아가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유동적 형식을 구축해버린다. 어쩌면 <Krazy Kat>의 칸과 배경이 그토록 강박적으로 자신의 경계를 와해시키려 한 것도 이 때문일지 모른다. 게다가 <Krazy Kat>의 유동적 형식은 해리먼의 인종 정체성을 직접 반영한 ‘혼종적 언어’와 중첩되기도 한다. 조지 헤리먼은 <Krazy Kat>에서 다양한 언어와 방언을 조합하여 자신만의 언어를 창조했었다. 뉴올리언스의 방언(yat), 브루클린의 방언(Brooklynese), 미국 흑인의 슬랭, 유대인의 이디시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등이 뒤섞인 언어의 용광로를.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little angel’과 ‘little darling’은 ‘li’l ainjil’ 와 ‘li’l dahlink‘로, ’brick really talk‘는 ’brigg rilly talk‘로 변형된다. 또한 ‘Bird is an ott kritik’의 ‘ott kritik’의 경우 일차적으로 딱따구리(woodpecker)를 의미하지만 언어 유희적으로는 ‘art critic’과 ‘odd critic’으로 해석 가능하다. 당연히 <Krazy Kat>의 혼종적 언어를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심지어 조지 헤리먼의 동시대 독자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은 일요일 느긋한 마음으로 <Krazy kat>을 읽다가도 때론 행복한 고양이(heppy ket)를 이해(unda-stend)하려 대사를 몇번이나 큰소리로 낭독하곤 했다.
그리고 <Krazy Kat>의 유동적 형식은 끝으로 어디로 이동할까? 칸, 배경, 인종 정체성, 혼성적 언어 이어서 젠더 정체성의 영역으로까지 이동한다. <Krazy Kat>의 주인공 크레이지 켓의 젠더 정체성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크레이즈 캣의 명칭과 대명사는 남성과 여성 사이를 자유로이 오간다. 독자들은 주인공의 젠더 정체성을 궁금해 했고 아울러 이와 관련한 조지 헤리먼과 영화감독 카프라의 대화는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는다. 카프라는 단도직입적으로 크레이지가 남자인지 여자인지를 물었다. 이에 해리만은 파이프에 느긋이 불을 붙이고서는 답한다. “같은 질문을 묻는 편지를 수십 통 이나 받았습니다. 나도 모르겠어요. 한 번 장난을 쳐본 겁니다. 그 다음엔 크레이지를 여성이라 생각했죠. 그런데 크레이지는 더 이상 내가 알던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깨달았죠. 크레이즈는 요정 같은 것이 아닐까. 그들에게 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크레이지 캣은 그이거나 그녀일 수 없습니다. 그는 요정입니다."
이처럼 <Krazy Kat>은 무해한 카툰 캐릭터로 급진성을 누그러뜨리긴 하지만 그럼에도 성별이분법과 이성애주의로 환원되지 않는 상상력을 함의하고 있다. 더욱이 남성 혹은 여성인지를 묻는 질문은 시의적으로 다음과 같이 대신할 수 있다. 크레이지 캣은 헤테로, 동성애자, 트렌스젠더 아니면 그 사이 어디쯤에 위치할까? 그리고 이 젠더 유동성의 질문은 크레이지 개인에서 크레이지를 축으로 이뤄진 삼각관계로 확장될 때 답을 하기란 더욱 더 어려워진다. 이런 이유로 1922년의 한 에피소드는 곤혹스러운 질문을 우회하여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올빼미는 크레이지의 젠더를 확인하기 위해 집 안에 숙녀가 있는지 아니면 신사가 있는지를 묻는다. 크레이지는 젠더는 수행되는 만큼 실재하는 것이기에 따라서 ”나(me)”라고 답한다. 다시 한 번 상기하자면 나라고 서술한 이 목소리는 온전히 크레이즈 캣만의 목소리일 수 없다. 사진을 찍을 때마다 인종적 흔적인 곱슬머리를 가리려 모자를 깊숙이 눌러써야 했던 조지 헤리먼 또한 그 누구도 아닌 나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