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했던 스토리텔링은 없었다. 예고편을 보면서 영화가 조커와 사회를 얼마나 우아하게 연결할지 밤잠을 설쳤지만 그냥 잘 걸 그랬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 어쩌면 조커와 사회가 우아하게 연결되리라는 기대를 허물어뜨리는 게 영화 <조커>가 가진 역설적 가치가 아닐까 싶었다.
왓챠에서 가장 많은 공감을 받은 <조커> 한줄평은 "니가 그런 식으로 내 조크를 짓밟으면은 인마 나도 조커가 되는거야"였다. <타짜>의 곽철용을 패러디해 인기를 끈 것도 있지만, 조커가 탄생한 원인이 불합리한 사회와 그 사회에 짓밟힌 우울과 절망에 있단 걸, 그러므로 조커는 필연적 존재라는 걸 강력하게 암시한다. <타짜>에서 곽철용이 저 대사를 친 순간도 자기가 무시당한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물론 아주 부조리하고 폭력적인 남성성이었지만, 근원적으로는 무시당했다는 분노와 부끄러움이 야기한 것이었다.
조커의 탄생이 필연적이라거나 그건 사회가 불합리하고 병들었기 때문이라는 평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동의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 영화의 조커는 현실적이지 않다. 다분히 이상한 캐릭터가, 너무나도 현실적인 살인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끔찍하다.
분노와 광기의 살인마인 <배트맨>의 조커(위), 썩은 세상의 혼란스러운 진실을 밝히려는 살인마인 <다크나이트>의 조커(아래). (피규어 회사 '핫 토이'의 피규어 합성 사진)
잔인하긴 매한가지다. 어느 시리즈에서든 조커는 잔인한 악당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나온 조커들의 잔인한 범죄는 그럴싸함에도 실제로 일어날 가능성은 0에 수렴했다. '화가 나서' 혹은 '세상은 썩었으니까' 따위의 이유로 조커가 된다는 건 말도 안 된다.
그리고 조커는 자기 존재에 대한 관객의 이해를 허용치 않는다. <배트맨>(1989)의 잭은 원래 광기 넘치는 인간이긴 했으나, 조커가 되면서 완전히 불가해한 존재로 바뀌어버렸다. <다크나이트>(2007)의 조커는 자기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바꾼다. 그 불가해성이 악당 조커의 매력을 배가하는 것이다. 그 결과 조커는 은유와 상징의 결정체가 된다. <다크나이트>가 개봉한 후, 히스 레저의 조커를 해석하고 규명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많이 쏟아졌나. 그 무수한 시도는 역설적으로 아무도 조커를 이해하지 못했으며 앞으로도 못하리라는 걸 방증할 뿐이다. 불가해한 잔인함, 그게 조커의 특징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사실을 빠뜨려선 안 된다. 조커가 비현실적인 존재라는 점이다. 어느 도시에 조커가 실제로 나타날 수 있다고 진심으로 그리고 현실적으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기존의 조커들은 영화적 박진감을 가속화하는 데 획기적이었지만, 그 역할은 스펙터클한 범죄를 저지르는 생동감 넘치는 극중 악역 선에서 멈춘다. 이 조커들은 이야기 속의 악당 캐릭터, 즉 빌런일 뿐이다. 종합하면, 조커의 가장 핵심적인 형질은 '극중의 불가해한 잔인함'이다.
해석과 규명을 필요로 하는 스크린용 '빌런 조커'를 그렸던 기존의 영화들과 달리, <조커>는 조커와 관객의 접선을 기획했다. '극중의 불가해한 잔인함'이 아니라 '현실의 불가해한 잔인함'을 탑재한 조커를 그려내려고 한 것이다. 현실을 거의 그대로 스크린 안에 집어넣으려 함으로써 조커로 하여금 스크린을 찢어 현실로 나오도록, 조커를 그저 극중에서 소비되는 캐릭터가 아니라 같은 동네에 있을지도 모를 인물로 형상화하도록 내러티브를 구성했다. 그 방법은 조커化 과정을 추적하는 것이었다. 그저 빌런일 뿐인 불가해한 고담시의 조커가 아니라, 실존 가능한 뉴욕의(또는 런던의, 서울의, 카이로의…) 조커, 그의 무너지고 뒤틀린 내면을 그리려 했다.
게다가 주요 원인으로 불평등하고 혐오 만연한 사회가 지목됐다. 조커의 불가해성을 풀어헤치는 동시에 사회를 고발하려 한 것이다. 조커가 '극중 빌런'에서 '실존 가능한' 무엇으로 재탄생한다니, 그 얼마나 파격적이고 기대되는 일인가. "이 사회의 절망적인 약자는 조커가 될 수 있어, 혹은 되어 버릴지도 몰라, 이 영화를 봐, 내 말이 맞지?" 이게 <조커>가 개봉 전부터 엄청난 환호를 받았던 이유다.
그리고 조커를 현실화 하려는 <조커>의 기획은 실패했다. 아서의 슬픔과 좌절과 절망은 분명하게도 처절하고 암담했다. 그러나 영화는 그의 슬픔과 좌절과 절망을 무분별한 살인의 동기로서 충분히 전환시키지 못했다. 아서의 고통은 제대로 해명되지 않았다. 영화가 제시하는 조커化의 일말의 이해 가능성은 말 그대로 '일말'이었고, 관객의 공감을 구하려는 시도는 실패해 언캐니 밸리에 빠졌다. 어떤 낯선 사건을 마주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갈린다. "그럴 수 있어" 혹은 "말도 안 돼." <조커>가 내놓은 조커化는 "말도 안 돼"에 가깝다. 억지스럽다.
영화는 사회 부조리를 대놓고 드러내지만 이 또한 조커의 탄생을 해명하기엔 부족하다. 조커는 다분히 개인적이다. 대중과 별로 공명하지 않는다. 폭동을 이끄는 지도자 따위가 아니다. 부지불식간에 폭동의 불씨를 댕겼고 어쩌다 보니 인기를 얻었고 그걸 즐겼을 뿐. 상담가가 "사회는 당신이나 내게 관심이 없다"라고 말했지만 아서는 상담가에게 연대의식이나 동질의 연민 같은 걸 느끼지 않았다. 그저 상담관조차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했다. 방송에서 사회에 대한 분노를 표출했지만 이 또한 자신이 지금껏 마주한 사람들을 사회 전체로 치환해버리는 데에서 촉발된 개인적인 분노였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거라는 확대해석 정도가 가능할까? 어차피 대중은 조커가 없던 때도 화가 나 있었다. 아서는 그중 범죄 정도가 더 심한 1인에 불과했다. 대중은 폭동을 일으키고 건물을 부수고 화염병을 던졌지만 무차별적으로 살인을 하지는 않았고, 그중엔 아서 만큼이나 혹은 아서보다 더 절망적인 삶을 사는 이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유독 아서가 조커가 되었나?
영화는 이 지점까지 나아가지 않았다. 아서의 절망이 살인마 탄생의 씨앗이 되고 그 씨앗이 자라나기까지 얼마나 많은 좌절들이 양분으로 작용했는지가 규명되어야 했으나, 영화는 아서가 겪은 몇 번의 무시와 폭력과 참괴를 통해 이 과정을 납작하게 만들어버리고는 훌쩍 뛰어넘어 버렸다. 그러므로 조커와 사회가 얼마나 긴밀히 연관되어 있는지 탐색하려 했던 사람은 자연스럽게 "어려움을 겪긴 했지만, 힘든 사회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 정도의 끔찍한 살인을 저지른다고? 말도 안 돼"라고 반응하게 된다. 감히 추측하자면, 누군가 <조커>의 조커에게 공감한다면, 그건 사회 속에서 조커가 탄생해나간 과정에 공감한 게 아니라, 조커를 매개로 스스로 혹은 다른 누군가에게 공감하는 것에 가까울 것이다. 부조리한 사회의 필연적 존재로서 조커를 제대로 그리고 싶었다면, 조커化 이후의 모습을 영화에 아예 넣지 말고 조커化 과정에만 집중하는 게 나았을 것이다.
뉴욕타임스의 영화 평론가 A.O.Scott도 이 지점을 지적한다. 그는 <조커>를 이렇게 평했다.
토론될 가치가 있으려면, 영화는 무엇보다도 흥미로워야 한다. 반드시. 그렇지 못하다면 일관성 있는 관점이라던지, 최소한의 완성도라던지, 사유를 촉발하는 주제라던지, 우리가 아는 세계와 맞닿는 상상의 접촉점이라도 있어야 한다. 낡은 스타일과 B급 철학으로 만들어진 공허하고 흐릿한 "조커"는 그중 무엇도 성취하지 못했다. 자기만의 뻔뻔한 관념--그 고집스러운 불쾌함이 마치 예술적 용기의 결과물인 것마냥--에 취한 이 영화는 자기가 만들어낸 그림자를 두려워하고 있을 뿐이다. (출처: 뉴욕타임스, "'조커' 리뷰: 나랑 장난해?")
Scott은 이 영화가 비현실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외피를 두르고자 하는 시도가 "자기만의 뻔뻔한 관념"일 뿐이고, 실제 세계와 전혀 공명하지 않는다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런데 문득, 어쩌면 그 뻔뻔함과 不공명성이, 조커를 멋진 빌런이 아니라 극도로 불쾌한 존재로 만드는 현상 자체가, 이 영화의 가장 큰 수확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토드 필립스가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조커는 스크린 속에서나 멋진 빌런이지, 실제로는 전연 불가해하고 극도로 끔찍하며 잔인한 캐릭터다. (출처: 루퍼)
<조커>의 의미가 "말도 안 돼"라는 관객의 반응을 유발하는 데 있다고 가정해보자. 아서는 다른 사람들이라면 긴장하거나 말을 더듬거나 슬퍼하거나 화를 낼 상황에 웃는 병을 가진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병을 설명하는 카드를 보여줘도 이해받지 못한 건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 누군가 나를 보고 킥킥대더니 킥킥대는 병이 있다고 설명하면, 그를 이해할 수 있을까? 이해는 하더라도 그러려니, 하고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완전 이해 불가능했던 히스 레저와 잭 니콜슨의 조커는 극중에 머물렀으므로 매력적이었다. 이들은 '애당초' 이해가 불가능한 빌런이었고, 이 영화의 조커는 '최소한의 이해할 거리를 제공하는데' 이해가 불가능한 현실의 악마였다.
"왜 그렇게까지 웃지?"라는 의문을 품은 TV쇼 사회자 머레이 크랭클린(로버트 드 니로 扮)은 조커에게 살해당했다. <조커>는 현실 속 조커를 그리려고 했으므로, 그 순간 "왜 그렇게까지 살인을 하지?"라는 의문을 품은 관객은 조커에게 살해당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그래서 이 영화의 조커는 이전의 조커보다 더 섬뜩하다. 영화는 불편해진다. 그냥 지나가는 범죄자는 혐오스럽지만 나에게 다가오려 했던 범죄자는 더욱 혐오스럽다.
빌런 조커는 이해할 수 없지만 스크린 안에 있으므로 멋질 수 있고, 스크린 밖으로 나온다면 최소한 그를 이해할 수 있어야 멋질 수 있을 텐데, <조커>의 조커는 스크린을 벗어나 현실적인 존재로 우리 앞에 당도하는데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현실의 불가해한 잔인함'은 실제 세계에서 절대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다. 불가해한 잔인함이 매력일 수 있는 건 '극중'이라는 방어막이 있기 때문이고, 사람들이 현실에서의 잔인함에 매력을 느끼기 위해선 거기에 몰입하고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이나 <데이비드 게일>에서 주인공들이 잔인한 짓을 저질러도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었듯이. '극중의 불가해한 잔인함'과 쌍벽을 이루는 건 '현실의 불가해한 잔인함'이 아니라 '현실의 이해(또는 공감) 가능한 잔인함'인 것이다.
조커는 영화 속에서나 멋있는 악당이지,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다분히 끔찍하고 혐오스럽고 공포스러운 대상일 뿐이라는 게 <조커>를 통해 알 수 있는 바가 아닐까. 방금 언급했다시피, '극중의 불가해한 잔인함'의 대립물은 '현실의 불가해한 잔인함'이 아니라는 것, 실제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수용할 수 있는 건 '현실의 이해 가능한 잔인함'일 뿐이라는 것. 어떤 개인적이거나 사회적인 환경이 그를 만들었든, 조커 정도의 캐릭터가 되는 과정은 추적도 석명도 불가능하며, 비슷한 맥락에서 조커의 행위는 현실에서 결코 용납할 수 없으며 받아들일 수도 없다는 것. 인간은 원래 불가해한 것을 두려워하고 혐오하는 존재다.
영화가 범죄를 미화한다는 비판은 그래서 제기되는 게 아닐까. 미화에 실패했기 때문에. 다시 말해 범죄는 미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조커>가 조커化를 성공적으로 그려내어 사람들이 조커의 서사를 이해하고 받아들였다면 미화라는 비판이 지금만큼 많이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급 살인>이나 <데이비드 게일>처럼.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들이야말로 능구렁이처럼 교묘하게 범죄를 미화한다고 생각한다.
영화 후반부, 무슨 농담이 그렇게 웃기냐는 프랭클린의 질문에 조커는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대답한다. 이 대답은 관객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 어차피 관객들은 이해 못 해.현실의 조커란 멋진 빌런이 아니라 원래가 불가해하며 끔찍하고 혐오스러운 존재니까.
<조커>가 비판을 받는 이유는 '현실의 불가해한 잔인함'이 실제 세계에서는 수용 불가능한 무엇이라는 사유를 전혀 의도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그러므로 제대로 보여주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그 작업을 가장 수려하게 해낸 모범 사례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일 것이다. 이런 사실을 상기할 수 있는 건 역설적으로 <조커>가 그 작업에 실패했기 때문이라는 게 아이러니하다.
여하간에 그런 이유로, 난 <조커>의 조커는 좋아하지 않지만 <다크나이트>의 조커는 너무나도 좋아한다. 조만간에 <다크나이트>나 다시 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