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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산 Aug 24. 2020

우린 끝내 맞서 싸울 거야

<반지의 제왕> 시리즈


<♬The Lord of the Rings OST - The Fellowship Reunited>


패배할 게 확실한데도 싸워야 할까?

당연하다.

삶이니까.


우선, 영화에서 개인적으로 아쉬운 부분은 이런 것들이었다.


(1) 전투의 참상이 그려지지 않았다. 전투가 벌어질 때 목격할 수 있는 것은 엄청난 두려움, 육체가 잘려나가고 살이 썩어 문드러지는 고통, 악취, 소멸하는 인간성과 범죄의 만연화 등이다. 반지의 제왕에는 장엄하게 죽는 인물은 있어도 고통받는 인물은 없으며, 고통받는 모습도 숭고미를 뿜어낼 뿐이다. 전쟁을 제대로 그려내지는 않은 것인데, 전쟁을 제대로 그려내지 않았단 걸 보여주는 또 하나의 포인트는,


(2) 전장 뒤가 조명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에오메르는 에오윈에게 넌 전쟁의 두려움을 모른다고 구박했다. 집안에 있는 사람에게 집안일이나 하면서 사회생활이 얼마나 힘든지 모른다고 구박하는 것처럼. 재수 없는 말인 건 둘째 치더라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맞는 말도 아니다. 전쟁은 전방뿐만 아니라 후방에서도 벌어지기 때문이다.


우린 죽음이 최악의 형벌이 아니란 걸 안다. 싸울 수 있는 자들이 동원되어 떠나고, 남겨진 자들이 두려움, 기근, 이별, 박탈 등으로 꼼짝없이 야위어가는 후방의 마을과 도시는 전방 만큼이나 참혹하다. 이를 이겨내며 하루살이에 전념하는 일은 전투 만큼이나 고되다. 그곳은 병사들이 싸워 이기고 돌아가면 반겨주는 따뜻한 천국이 아니다. 그러나 도시와 마을은 전쟁이 끝나자 마자 금세 천국으로 변신한다.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은데도.


(3) 오리엔탈리즘, 정확히 말해 동양을 필요에 따라 임의로 대상화하는 옥시덴탈리즘이 노골적이다. 지중해 동쪽을 싸그리 동방이라 칭하는 건 색목인들의 한계라 치더라도, 동방인의 외관을 야만적으로 묘사하는 부분에선 타 문화에 대한 무지와 무지해도 무방하다는 무관심이 확연하다. 두 개의 탑에선 그나마 갑옷이라도 잘 입히더니 왕의 귀환에선 원시 부족처럼 표현한 건 왤까. 원시 부족이든 아니든 무관하다는 것이다. 철기 발명 후 갑옷 안 입은 전투병은 단 한 곳에도 없었다. 사우론의 부하라 해도 너무 홀대하는 거 아닌가 싶다.


(4) 왕 정도 돼야 아르웬과 결혼할 수 있는 걸까. 둘 사이에 서사가 있긴 하지만. 검도 고쳐주고 뒷바라지 열심히 하다 돌아오는 낭군님 맞이하는 공주님처럼. 전쟁 중이었던데다 원래 아라곤은 도망중이었으니 그렇다고 해 두자.


아쉬운 부분들을 더 짚을 수도 있겠지만 피터 잭슨이 아니라 톨킨에게서 비롯된 것일테고, 혹은 내가 아직 원작을 안 봤기 때문에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물론 원작을 보면 더 많은 아쉬운 점이나 비판점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쉬운 점을 먼저 털어버린 건 즐거운 일을 하기에 앞서 귀찮은 일을 빨리 해버리는 마음과 같았다. 편한 마음으로 감상을 적기 위해서.




<반지의 제왕>은 태도에 대한 영화다


(3)과 (4)는 그렇다 치더라도, (1)과 (2)는 반지의 제왕을 전쟁 영화로 봐선 안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반지의 제왕>은 전쟁 영화가 아니라 태도에 대한 영화다.


반지의 제왕이 세 편의 영화에 걸쳐 내내 강조하는 건, 승패에 연연하지 말라는 것이다. 물론 결국엔 인간이 승리했지만, 최후의 승리는 서사적 카타르시스일 뿐이다. 질 게 뻔한데도 수사殊死로 싸워야 하느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하는 게 핵심이다.


반지의 제왕에 한해서라면, 우리는 전쟁이 인간의 승리로 끝난단 걸 알기 때문에 쉽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다. 애당초 3부 제목이 왕의 귀환이다. 왕이 귀환한단 건 싸워서 이겨 돌아 온다는 거니까, 지지 않는단 걸 아니까 싸워도 된다고 쉽게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우리네 삶에서 질 게 뻔하다면? 질 게 뻔한 걸 알면서 수사하고 싸워야 할까? 그렇다면 왜?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모든 전투는 시작부터 암담하다. 결말이 투명하게 보인다. 못 이긴다. 절망하는 게 당연하다. 어차피 이틀 뒤에 죽을 텐데, 그저 즐기다 죽지 뭐하러 아프게 칼 맞고 화살 맞을 준비 하며 버티고, 내 무덤이 될 전장에 서냐는 거다.


헬름 협곡 전투. 이런 상황에서 이길 수 있다고 자신하는 사람은 미친 사람이니 피해야 한다.


따지고 보면 모든 전투는 불가사의한 존재의 도움 덕택에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팡고른의 엔트들과 죽은 자들의 군대가 그렇다. 헬름 협곡 전투의 승리조차 마법사 간달프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그게 판타지의 묘미긴 하지만, 인간에겐 희망이랄 게 없었다. 조력이 없었으면 반드시 패배할 수밖에 없었으며, 인간들은 이들의 도움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도 못했던 때에도 전투 준비에 열을 올렸다. 불가사의한 존재들조차 도움이 되지 않는 순간도 있었다. 엔트들은 사우론에 맞서 싸우지 않고 숲으로 돌아갔고, 죽은 자들은 김리의 아쉬움을 뒤로 하고 영면에 들었다. 미나스 티리스에선 간달프조차 승산 없는 싸움을 마주해야 했다. 그런데도 이들은 싸웠다. 거기에 주목해야 한다.


싸움의 이유가 삶의 이유와 같기 때문이다. 질 게 뻔할 때도 가열차게 싸우는 까닭은, 죽을 걸 알면서도 가열차게 살아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생존만이 중요하다면 사루만처럼 사우론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게 낫다. 그러나 인간은 그저 생존하기 위해 살지 않는다.


체코의 정치인 바츨라프 하벨은, 희망은 가능성이 아니라 신념의 문제라고 했다. 일이 잘 될거라는 낙관주의가 아니라, 일이 어떻게 마무리되든 어떤 행동이 옳기 때문에 그리고 추구할 만하기 때문에 실행하고자 하는 마음가짐이 희망이라는 것이다. 하벨의 해석을 통해 보면,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왜 암울한 상황에서도 기어코 싸웠는지를 알 수 있다. 혹여라도 이길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확률 하나를 붙잡고 움직인 게 아니다. 그저 옳기 때문이다.


희망이란, 추구할 만한 무엇이란 정의 따위의 거창한 것이 아니다. 작은 호빗이라서 중간계를 구할 힘 따위는 없다는 걸 알면서도 메리가 전투에 참가한 이유는 그게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메리에게 옳은 것이란 친구를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리고 친구 없이 살아봐야 무의미하다는 마음이었다. 샘이 지친 프로도를 북돋웠던 방법은 끊임없이 샤이어의 사람들, 맛있는 과일, 크림, 바람과 햇살을 상기하게 하는 것이었다. 요정과 죽는 건 싫다고 툴툴거린 김리는 친구와 죽는 건 좋다고 했다.


샘 갬지같은 사람이 필요하다고 말하기보다 내가 누군가의 샘 갬지가 되도록 하자


다가오는 사우론의 군대를 앞두고 병사들이 두려움에 떨자, 간달프는 "너희는 곤도르의 병사들이다"라고 격려한다. 이 하나마나한 소리는 곤도르의 병사에게 정체성을 환기함으로써 지켜야 할 가치가 있다는 걸 암시한다. 곤도르의 자존심이나 위대함 따위다. 그런 점에서 인간 전체를 구원하기 위해 힘쓰던 간달프보다 개별적 삶의 아름다움을 위해 힘쓰던 샘이 진정한 독려의 기술을 더 잘 갖추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영화 마지막에 아라곤이 호빗들에게 절을 한 건 그걸 알기 때문이었다.


싸움이나 재난을 마주한 상황에서 약자와 환자를 먼저 돕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싸움에 효율적인 자들만 남기면 이길 가능성은 증가하겠지만, 그렇게 이겨봐야 승리는 무가치하다. 지키고자 하는 게 어떤 가치나 옳음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목숨 뿐이라면, 사우론에게 무릎 꿇은 자들과의 차이는 "내가 이겼어" 하는 자존심밖에 없다.




희망은 가능성이 아니라 믿음이다


희망은 전쟁이 닥치기 전부터 열렬히 살고 있었어야 가질 수 있다. 열심히 살고 있었어야 내가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을 명확히 떠올릴 수 있고, 내가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다. 희망이란 삶에 대한 단순한 믿음이다. 평소에 벼려놓지 않고 어느날 갑자기 뚝딱 만들어낼 수 없다.


희망을 믿음이 아니라 가능성으로 여길 경우, 혹은 믿음으로서의 희망을 애당초 가지지 못했을 경우, 가능성이 사라지면 반드시 자포자기할 수밖에 없다. 삶은 무너진다. 희망을 가능성으로 번역했으므로 무너진 게 헬름 협곡에서의 세오덴, 그리고 데네소르다. 세오덴은 거듭났지만, 데네소르는 이길 가능성이 없는 싸움을 앞두고서 희망이 없다고 말하며 싸움을 포기했다. 지금 죽으나 나중에 죽으나 뭐가 다르냐며 파라미르와 함께 셀프 화형식을 올리려 했다.


게다가 데네소르는 파라미르가 살아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대가 끊겼다고 절규한 건 실제로 대가 끊겼기 때문이 아니라, 대가 이어질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저 자기파멸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이 필요했으므로 파라미르의 죽음을 이용한 것이다(감독판에서 간달프는 데네소르가 아들의 죽음조차 이용할 거라고 비판했는데, 정확했다).


데네소르가 미쳐버린 건 천성이 허약한 인간이어서가 아니다. 희망을 오역했기 때문이다. 보로미르라도 있었으면 조금은 더 나았을지도 모르지만, 고작 그런 희망을 품고 살았다면 보로미르가 자기 길을 걷는 순간 역시나 무너지고 말았을 것이다. 데네소르가 섭정이 아니었다면 사우론에게 가뿐히 투항했을 게 분명하다. 자살을 택한 건, 곤도르의 섭정으로서 투항해봐야 어차피 사우론에게 본보기로 죽으리란 걸 알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이 인간처럼은 살지 말자'를 인생의 모토로 삼아도 좋을 듯하다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폭력은 폭력이라 부르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지성이라 부른다." 마틴 루터 킹인지 프란츠 파농인지 누가 한 말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여하간에 정당방위란 그런 것이다. 옳다고 믿는 것을 지키기 위해 나를 파괴하려 드는 자에게 맞서 싸우는 것, 그런 태도가 없다면 아무도 아무런 긍정을 하지 못할 테다. 물론 이런 태도가 취할 만한 건지 아닌지는 여전히 헷갈리지만, 맞서 싸우기라도 하는 게 그저 무릎 꿇고 마는 것보다 낫다는 건 안다.


모든 문명을 막론하고 권력자들이 죽을 걸 알면서도 싸우는 자가 명예로운 자라고 칭송한 건, 영원히 충성하는 기계적 인간을 양산하기 위한 권력의 악한 기획이기도 하지만, 그 근원에는 분명히 어떤 가치 있는 사고가 있다. 세상의 악은 대체로 절대악이 아니라 선의 왜곡이므로. 이는 때로는 수사가 희망인 삶의 방정식을, 중간에 충성과 명예를 끼워넣음으로써 망친 것이다.




영화 막바지, 운명의 산에서 끝내 반지에 굴복하고 만 프로도에게 실망한 사람이 많지만, 사실 그럴 필요가 없다. 반지의 이름이 '절대반지'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절대'반지는 '절대' 이길 수 없다. 기껏해야 얼마나 오래 버티느냐의 문제다. 프로도는 (영화에 드러나는 설정상) 역사상 가장 오래 반지의 힘에 저항했다. 강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 모든 사단을 일으키지 않을 수 있었던, 반지에 무릎을 꿇었으므로 후손들이 죄책감에 방랑하게 한 연좌제의 원죄자 이실두르도 결코 약한 게 아니다.


반지가 절대적인 힘을 부리는 방법은 아름다워지는 것이다. 반지의 아름다움이란 별 힘 들이지 않고 그저 손가락에 끼기만 하면 엄청난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반지는 10조짜리 당첨 복권, 고통 없는 영원한 사랑, 무한하고 자유로운 쾌락이다. 머리로야 그런 아름다움은 분명히 어딘가 이상할 거라고 의심할 수 있지만, 막상 눈 앞에 닥치면 마냥 흘려보내기 버겁다.


이 반지가 아름답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은 현인이거나 거짓말쟁이거나 관종이다


'무한하고 자유로운 쾌락에 대한 욕망'은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가령 성범죄를 저지른 가해자들에게 '미래가 창창한데' '술에 취해 판단력이 흐려졌는데' 따위로 감경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의 속마음에는, 성범죄에서 법적·윤리적 책임을 지움으로써 성범죄를 자유로운 쾌락 쯤으로 남겨두고자 하는 추잡한 욕망이 있다. 절대반지를 향한 욕망과 결이 같다.


성범죄씩이나 거론해야 할만큼 먼 얘기인 것은 아니다. 친구와 싸우고서 내 잘못은 없다는 식으로, 나는 복잡한 인간이며 친구는 단순한 인간이라는 식으로, 나는 이유가 있지만 걔는 그냥 글러 먹은 거라는 식으로 자기합리화를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내 삶에서 책임을 덜어내고 그저 편안하고 싶다는 욕망의 발현이다. 이 또한 절대반지를 향한 욕망과 결이 같다. 어떤 범죄자에게 악마적 서사를 부여해 나와는 다른 인간이라는 식으로 구분짓는 것도, 나는 저런 문제와 무관하며 책임이 없다는 얕은 안정감을 얻기 위한 욕망 때문이다. 절대반지를 향한 욕망은 여기저기서 발견할 수 있다.


절대반지는 그런 욕망을 가능하게 해준다. 그저 나를 손가락에 끼우기만 한 너에겐 아무런 잘못이 없으며,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루게 해주겠다는 절대적인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으로 희망의 이미지를 빼앗는다. 아름다움으로 압도해 기존에 옳다고 생각하던 가치를 순식간에 머릿속에서, 가슴속에서 제거해 버린다. 반지를 쥔 자들은 순식간에 반지를 갖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그 이외의 것들이 지닌 가치를 잊는다. 사랑스러워 미치겠다는 표정으로 반지를 바라본다. 그렇게 완전히 무너진다. 일종의 미인계랄까? (부질없는 소리지만 美人은 여성에게만 쓰이는 단어가 아니다)


아름다움으로 압도하지 못하면 힘으로 찍어 누른다. 이처럼 강력한 아름다움을 등한시하고도 네가 잘 살 수 있을 것 같냐고 거대한 망치로 끊임없이 후려친다. 반지와 싸우던 프로도는 샤이어가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반지가 없앤 것이다. 프로도가 가진 고유한 행복의 이미지를 박탈함으로써 반지의 위력에 더 취약하게 만들었다. 이런 지경에서까지 프로도가 반지의 유혹을 이겨내려면, 프로도는 인공지능 기계여야 한다.


저게 1등짜리 로또 10장 묶음이라고 생각해보자. 누구나 프로도보다 눈빛연기를 더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프로도는 반지를 파괴하고 돌아서자마자 샤이어의 모습을 기억해냈다. 반지가 빼앗아갔던 희망의 이미지들을 되찾은 것이다. 그러므로 열렬한 사랑에 빠진 자도 연인의 애칭을 '절대반지'로 하면 안 되는 것이다. "넌 모든 것을 다스리는 단 하나의 절대반지고 나는 너와 유일하게 어울리는 사우론이야"라고 말했다간 끝장난다.


절대반지는 절대적이므로 그 어떤 정신력을 가진 자도 절대 파괴할 수 없다. 끝내 굴복시키고 말기 때문에. 이실두르도 실패했고 프로도도 실패했다. 그러므로 반지를 파괴하기 위한 투쟁은 운명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도박에 맡길 수밖에 없다. 운명의 산으로 향하는 길조차 그토록 힘들지만, 그 힘든 싸움 끝은 결국 도박이다. 반지를 용암으로 떨어뜨릴 수 있느냐 없느냐는 오직 천운에 달렸다. (운명의 산은 멋진 번역이지만 Mountain Doom의 의미를 정확히 담지는 못한다. Doom은 종말, 파멸, 불운한 운명이라는 뜻이므로, '종말의 산'이나 '최후의 산' 정도가 적절하지 않을까? 사실 개인적으론 '운명의 산'이란 의역이 더 좋지만.)


그런데 그 천운은 역설적으로 반지가 만들었다. 반지는 스스로 소멸될 거라는 두려움에 필사적으로 약자들을 유혹한다. 이실두르도 프로도도 그 유혹에 굴복했다. 그러나 그 유혹에 먼저 당했던 골룸이 프로도를 공격하면서 반지의 안정성은 흐트러졌고, 그 때문에 파괴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반지는 스스로 무너진 셈이다. 절대적인 힘은 끝내 스스로마저 파괴하고 만다. 그런 점에서 Mountain Doom이라는 이름은 적확하다.




길었던 싸움이 끝나고, 간달프는 아라곤에게 왕관을 씌워주며 축복받는 왕이 되길 바란다고 말한다. 축복받는 왕이라니, 얼마나 가당찮은 소리인가. 지구상에 왕이었던 사람이 1만명 쯤 된다면 그 중 축복받는 왕이 몇 명이나 될까? 10명? 20명?


축복받는 왕은 흡사 이데아다. 달성되지 못하리라고 보는 편이 현실적이다. 왕은 어차피 인간이고 흠도 많고 결도 많으니, 그저 큰 소요사태 안 일으키고 적당히 통치하다 가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게 안전하다.


그러나 그런 건 희망이 될 수 없다. 반지의 제왕은 설령 승리가 불가능할지라도 지킬 만한 가치와 싸울 만한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축복받는 왕, 그런 거 애당초에 추구하지도 않는 게 현명한 방법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걸 향해 간다. 어차피 죽을 테지만 열심히 살듯이. 괜찮은 사회인, 일생의 연인, 존경스런 아빠, 멋진 인간, 그런 거 거의 불가능다. 그래도 그걸 향해 간다. 추구할 만한 가치니까.




반지의 제왕은 인간과 남자를 등치시키는 영단어 man을 잘 활용하는데, man은 죽이지 못하는 나즈굴 앙그마르를 에오윈은 "난 남자가 아니다(I'm no man)"라며 죽인다. 영화에서 가장 통쾌한 장면 중 하나. 이 흥분한 리뷰에 쓰인 '인간'이란 단어는 영어로는 man이 아니고 human도 아니고 people이 좋겠다.




마틴 루터 킹인지 스피노자인지 모를 누군가가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말했고(마틴 루터 킹은 명언 제조기였을까?) 그게 희망을 역설하는 거라는 해설을 들으며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었다. 내일 지구가 망할 게 확실한데 희망은 무슨 희망? 혹시라도 지구가 멸망하지 않으리라는 희망? 반드시 멸망한다는데?


그러나 희망을 가능성이 아니라 믿음으로 이해하면, 저런 해설은 가능하다. 사과나무를 심는 건 혹시 내일 지구가 멸망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가능성을 믿기 때문이 아니라, 사과나무를 심는 일이야말로 내가 설령 내일 죽게 되더라도 반드시 해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질 게 뻔한데도 싸우는 것도, 사랑하는 사람이 먼저 죽을 걸 알면서도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 지루한 글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통치자일지언정 곤도르의 데네소르가 될 바엔, 농부일지언정 샤이어의 호빗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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