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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 작가 Apr 13. 2022

폴리 리듬, 그렇게 어려운 거였니?

I love you를 연습하다

쇼팽 즉흥환상곡의 도입 부분


어렸을 적 쇼팽의 즉흥환상곡을 듣고 너무 쳐보고 싶었다. 흉내라도 내보기 위해 악보를 펼쳐 든 순간 처음부터 난관에 빠졌다. 오른손으로 16분 음표 4개를 칠 동안 왼손은 셋잇단 음표를 쳐야 했다. 


오른손 박자와 왼쪽 박자가 짝수로 떨어지는 곡만 쳐왔던 나에게 오른손 4번을 칠 동안 왼손 3번을 친다는 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갔다. 나중에 찾아보니 이러한 엇박자 리듬을 폴리 리듬(polyrhythm)이라고 불렀다.


몇 번 시도해보았지만 흉내조차 낼 수 없었다. 이내 악보를 덮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쇼팽의 '즉흥환상곡'은 물론 이렇게 오른손과 왼손의 박자가 딱 떨어지지 않는 폴리 리듬이 들어가 있는 곡은 시도해 볼 생각을 안 했다. 그건 전문적으로 레슨을 받아야만 익힐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최근에 우연히 알게 된 프랑스의 작곡가 Riopy의 'I Love You'라는 피아노 곡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깊게 침잠하는 속에서 굳건히 일어서는 듯한 화음 진행과 반복적이면서 몽환적인 아르페지오가  내 마음을 한순간에 사로잡았다.


나는 부랴부랴 악보를 구해 한쪽 두쪽 연습해 나갔다. '어라, 생각보다 어렵지 않네' 그렇게 클라이맥스에 다가서는 순간 뭔가 손이 꼬이기 시작했다. 자세히 보니 왼손으로 4번 건반을 치는 동안 오른손으로 6번 건반을 치도록 되어있었다. 과거 나를 좌절시켰던 폴리 리듬(polyrhythm)이었다.


나의 연습은 장벽에 가로막혔다. 이 곡을 얼마나 연습해야 끝낼 수 있을지 막막해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포기하기 싫었다. 단단히 마음을 먹고 유튜브에 '폴리 리듬 연습방법'을 검색했다. 전문가들이 알려주는 대로 아주 천천히 시도해봤다.


오른손 : 하나(눌러),  , (눌러)      , 다섯(눌러),  여섯
    : 하나(눌러),                   , (눌러)


이 설명이 이해될지 모르겠지만, 여섯을 세는 동안 왼손 건반은 '두 번' 눌리고 오른손 건반은 '세 번' 눌린다. 이렇게 두 번 반복하면 왼손 건반을 '4번' 치는 동안 오른손 건반을 '6번'을 칠 수 있다.


입으로 박자를 세가며 왼손, 오른손을 합쳐보았다. 머리가 뒤죽박죽 돼서 손가락이 서로 엉켰다. 딸그닥 딸그닥 말발굽 소리처럼 들렸다. 다시 메트로늄을 켜고 연습을 했다. 메트로늄 소리에 입으로 세는 박자 소리가 더해져 머리가 더 복잡해졌다.


원곡은 지금 연습하는 속도보다 한 30배 정도 빠른데 정말 이렇게 해서 폴리 리듬을 익힐 수 있을까?


다시 좌절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오기가 생겼다. 이를 악물고 한마디라도 익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뒤죽박죽인 머릿속을 뒤로 하고 그저 박자를 세 면서 왼손, 오른손을 번갈아가며 30분 정도를 겨우 버텨냈다.




다음 날이 됐다.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아서 "하나, 둘" 박자를 세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20분 정도 연습하다가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왼손과 오른손이 따로 노는 느낌이었다. 오른손 6개 음표가 고르게 들렸다. 또 왼손 4개 음표가 고르게 들렸다. 그러다 곧 다시 뒤죽박죽이 됐다.


순간 멈췄다. "뭐지?" 그 느낌이 다시 찾아오나 쳐봤더니 사라졌다. 다시 "하나, 둘" 천천히 박자를 세면서 리듬을 익히다 속도를 올려보길 수차례 반복하다가 어느 순간 몸으로 그 리듬이 쑥 들어왔다.


왼손과 오른손이 따로 놀면서 톱니바퀴처럼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왼손과 오른손이 뇌의 각각 다른 부분의 지령을 받는 것 같았다. 귀에는 오른손과 왼손을 동시에 쳐야하는 '하나' 박자의 음만 꽂혔다. 속도를 원곡 수준으로 최대치로 올려보았는데도 박자가 무너지지 않고 유지되었다.


어릴 적부터 절대 익히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폴리 리듬'을 단 이틀 만에, 2시간 정도 연습만으로 익혀내다니 믿을 수 없었다.


다음 날 일어나자마자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았다. '혹시 사라지지 않았을까?' 걱정이 됐다. 하지만 내 손가락은 어제보다 더 부드럽고 정확하게 연주하고 있었다. 완전히 머리속에 자리잡은 듯 했다.


순간 머리속에 많은 생각들이 밀려들어왔다.
막연히 못할 거라고 두려워 시도조차 안 하고 포기했던 것들
정면으로 맞서지 않고 회피했던 게으른 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당연히 안될 거라 포기했던 것들에 대해 일단 시도해보았다면, 올바른 방법을 찾아 꾸준히 시도해보았다면 해냈을 수 있었을까?


그리고 지금 하고 있는 여러 연습들에 대해서도 사실 가장 어려운 부분을 얼렁뚱땅 회피하며 가짜로 연습하고 있지는 않는 것일까?




앞으로는 무엇이든 두려워도, 어려워보여도 일단 시도해보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막상 직접 맞닥뜨리면 옆에서 지켜본 것과 다를 수 있다고 믿기로 했다. 그리고 어려움을 만나면 뒷걸음질 치는 내 안의 게으름에 정면으로 맞서 가짜 연습이 아닌 '진짜 연습'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이내 다행스럽고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아직도 내 뇌 속의 수많은 뉴런들이 새로운 연결을 활발히 이루어내고 있었다. 성인의 뇌도 신경가소성이 유지된다는 말이 사실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모습을 보며 새로운 것을 배우고 도전하기에 아직 늦지 않았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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