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마지막 몰입
'속독'이란 말을 들어 봤다. 책을 빠르게 읽어내는 방법이다. 대단한 기술이라는 말에 무언가를 팔기 위한 과장된 홍보라고 생각했다. 단지 빠르게 읽는 게 뭐가 그리 대단한가. 그리고 그게 왜 필요한가. 오히려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부작용만 있을 것 같았다.
'마지막 몰입'이라는 책을 읽다가 '속독'에 관해서 저자가 힘주어 설명하고 있었다. 최근에 시도해 보지 않고 '할 수 없다'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 잘못된 생각일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고 나서 '속독'에 대해서 마음을 열고 저자의 설명대로 시도해보았다. 앞서 글을 쓴 폴리 리듬을 시도한 것처럼.
책에 나와 있는 단어를 살펴본 적이 있는가? 95%는 조사, 접속사, 같은 기능어이다. 중요한 것은 단어가 나타내는 의미이다. 그 의미는 심상으로 더 잘 묘사되고 기억된다.
정말 그렇다. 방금 인용한 책의 내용에서도 의미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단어는 "95%, 기능어, 중요, 의미, 심상, 기억" 정도이다. 이 단어를 빠르게 머릿속으로 통과시키며 의미를 단어가 아닌 이미지(심상)로 느껴본다.
속독의 원리는 우리 뇌의 정보처리 특성을 철저하게 반영한 것이었다. 오히려 단어를 차례차례 읽어서 의미를 이해하려는 것이 뇌의 정보처리 방식과 반대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뇌는 단어나 글보다 시각적 정보에서 한꺼번에 훨씬 많은 정보를 처리한다. 멋진 풍경을 아무리 자세히 글로 묘사한다고 해도, 사진 한 장을 보는 것이 백배 낫다. '백번 글로 읽는 것이 한번 보는 것만 못하다'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속독의 원리를 이해하고 나니 바로 적용해보고 싶어졌다. 책을 읽는데 필요 없는 기능어를 건너뛰면서 핵심 키워드만 골라 읽어 내려갔다. 점점 속도를 올려봤다. 빠르게 두줄, 세줄 내려가면서 키워드가 눈에서 머리로 흘러들어 갔다. 그리고 그 키워드를 한 번에 뭉쳐서 어떤 이미지나 심상을 떠올려봤다.
사실 책 한 장에서 키워드는 몇 개 안되었고, 그마저 여러 번 반복되었다. 몇 가지 이미지가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의미가 느껴질 듯 말 듯했다. 아직 연습이 부족해서인지 속도를 올렸다가 주의력이 흩어지면 속도를 내리길 반복했다.
계속해서 불필요한 단어들을 무시하고 핵심 키워드가 뇌의 어떤 필터를 거쳐 이미지, 느낌으로 전환되도록 노력했다. 속도가 빨라지면서 두줄, 세줄의 키워드들이 순식간에 머릿속을 통과해 지나갔다.
'어린아이가 라디에이터에 올라 창밖을 바라보다 발을 헛디뎌 머리를 다치고 사람들이 아이를 불쌍하게 쳐다보는 장면이 떠올랐다.' 두 페이지 넘는 내용이 이미지 한 장으로 바뀌어 이해되었다.
"그래 바로 이거야" 내 입속에서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책을 읽는 행위가 완전히 다른 것으로 느껴졌다. 책은 읽는 것이 아니었다. 의미를 보는 것이고 느끼는 것이고 만져지는 생생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책을 읽으려면 엄청난 집중력이 필요했다. 빠른 속도로 불필요한 기능어를 솎아내고 키워드만 뽑아서 읽으면서 어떤 이미지를 연상하여 의미를 느끼려면 가지고 있는 주의력을 모두 책에 쏟아내야 했다.
저자는 속독을 하는 느낌에 대해 스포츠카에 타서 가속페달을 힘껏 밟으면 미친듯한 주의력이 발휘되면서 시야에는 오로지 내가 뚫고 가야 할 길만 보이게 되는 것 같다고 했다.
나도 책 속의 문장들 사이를 가속페달을 힘껏 밟고 질주해보았다. 불필요한 단어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키워드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떤 이미지와 심상이 떠오르며 키워드들 간에 빈 여백이 메꿔지며 전체적인 흐름이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이렇게 책을 읽을 때마다 연습하면 나중엔 집중력이 덜 소모되고 결국 자동화될 것 같았다. 불필요한 기능어를 솎아내며 읽는 것도 나중에는 자동으로 필터링될 것 같았다. 피아노 악보를 처음 연습할 땐 하나하나 손가락에 온통 신경 써야 하지만 나중에는 모든 게 자동화되는 것처럼 말이다.
빨리 다른 책을 읽고 싶어졌다. 책을 읽는 방식, 정보와 의미를 이해하는 방식을 바꿔보는 연습을 더 많이 하고 싶어졌다. 이 기술을 어떻게든 내 것으로 만들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이 기술을 활용해서 그동안 내가 의심하지 않고 '당연히 믿고' 있었던 '잘못된 신념'에 대해서 더 빨리 더 많이 확인하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