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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리제라늄 Mar 02. 2021

물잔 덕분에 과학합니다

랩 걸_마이크로세계의 매력에는 출구가 없다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물질을 분석하는 일을 하다 보면 아주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가 있다. 그것은 겉보기에 전혀 달라 보이는 두 가지 물질이 원자 단위로 쪼개었을 때 그 구성 원소들이 완전히 똑같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놀라운 사실은 나를 이 길로 이끌어 준 시작이자 오늘도 여전히 가슴을 뛰게 하는 강렬한 매력이다.

   

처음에 원자니 소재니 하는 것들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전부 물잔 때문이다. 맞다. 물도 마시고 맥주도 마시는 그 유리컵 말이다. 잘못해서 톡 떨어뜨리기만 해도 바사삭 깨져버리는 그 유리컵은, 구하기도 흔하고 가격도 저렴해서 모두가 부담 없이 사용하고 있을 것이다.

      

반면 그와는 약간 다른 크리스털 잔이라는 것이 있다. 마치 다이아몬드를 세공하듯 여러 각도로 깎아 멋을 낸 이 잔들은 보통 와인이나 위스키를 마실 때처럼 특별한 경우에 사용하곤 한다. 그 품새가 뭔가 귀족적인 느낌일 뿐 아니라 톡 떨어뜨려도 잘 깨지지 않을 만큼 단단하기도 하다. 그래서 일반 물잔과는 다른 특별대우를 받으며 쉬운 말로 비싼 값을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그 두 가지 잔을 구성하는 구성 요소가 완전히 똑같다는 것이다. 유리의 물질은 산화규소다. 실리콘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규소(Si)와 산소(O)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똑같은 원소들로 이루어진, 그러니까 태생이 같은 이 두 가지 잔들은 과연 어떤 이유로 차이나는 클래스가 생기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이 산화규소 (SiO2) 원소들이 어떤 형태의 결합구조로 되어 있느냐에 따라 유리의 성질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크리스털 잔은 이 두 원소가 아주 아름다운 결정형을 이루며 완벽한 규칙에 따라서 결합되어 있다 (Crystalline). 반면 일반 유리잔은 일정한 규칙성이 없이 서로 마구 얽혀있다 (Amorphous). 이런 차이가 생기는 이유는 물질이 형성되는 결합, 분해 등의 과정에서 온도, 압력, 시간 등의 환경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https://www.learner.org/series/chemistry-challenges-and-solutions/


다시 말해, 평범한 유리잔과 달리 빛나고 아름다운 크리스털 잔이라고 해서 태생부터 특별한 어떤 것을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와 비슷한 예로 역시 잘 알려진 탄소(C)가 있다. 바로 이 탄소가 어떤 형태로 결합되어 있느냐에 따라 다이아몬드가 되기도 하고 연필심이 되기도 한다. 반짝반짝 빛나는 다이아몬드와 시커먼 흑연이 똑같은 원소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은 처음에는 믿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과학이 증명하는 분명한 사실이다.


https://courses.lumenlearning.com/chemistryformajors/chapter/spontaneity/


생명체를 구성하는 입자나 지금 내가 깔고 앉아있는 의자를 구성하는 입자가 같은 것이라는 확장까지는 잠시 내려놓고서라도, 우리 인간이 모두 같은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은 이제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어쩌면 쥐고 태어난 게 금수저든 흙수저든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결국 너도 나도 그도 같은 원자로 시작된 거 아닌가?

    

존재를 구성하는 물질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경험들을 통해, 어떻게 달궈지고, 어떻게 얼어붙으며, 어떤 시간을 통과하느냐에 따라 자신만의 결정을 형성한다고 생각하니, 새삼 모든 것들이 경이로워진다. 어느 하나 허투루 보이는 것이 없다. 바로 이 지점이었다. 내가 모든 물질과 존재의 미친 매력에 출구없이 풍덩 빠져버리고 만 것이.

     

바라건데 나라는 사람을 구성하는 원자들이 삶이라는 온도와 압력을 통과할 때, 서로의 결속을 포기하고 와장창 깨져버리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대신 더욱 가깝게 결속하고 부족한 에너지를 보존해서 결국 보다 견고해지고 아름다워지면 좋겠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촉매제로써의 의지와 성품이 내 안에 있다면 참 좋겠다.

    

자연은 우리에게 수없이 많은 질문을 던지지만, 동시에 해답 또한 여기저기에 숨겨놓은 것이 틀림없다. 이렇게 곳곳에 숨겨진 해답을 두고 보물찾기를 하는 것이야말로, 어쩌면 인간에게 주어진 삶의 여정이자 목적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이 과정을 재미있게 즐기는 사람에게는 결국 삶은 신나는 놀이터가 되리라는 것도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오늘도 나는 보물찾기하러 분석실로 간다.




사랑하는 것들에 대해 씁니다.

- 파리제라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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