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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리제라늄 Jul 05. 2020

기계를 고치는 의사

랩 걸_너에게 또 반하는 순간

초등학교 때 수술을 받기 위해서 큰 병원에 입원을 했던 적이 있었다. 수술이라는 단어는 참 신기하다. 이 두 글자를 마주하게 되면 '위험' 혹은 '두려움' 같은 또 다른 단어들이 비엔나소시지처럼 줄줄이 딸려 나오기 때문이다. 어른들에게도 덜컥 겁을 집어먹게 하는 이 말이 어린아이에게 얼마나 무섭게 느껴졌을까.


대부분의 세상일들은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던 조용히 제 갈 길을 간다. 내 수술도 예정대로 진행이 되었고 끝이 났다. 마취가 깨고 의식이 돌아오면서 내가 잠든 사이에 메스로 째놓은 뱃가죽이 아릿해 오기 시작했다. 그런 아픔에 진득할 수 있는 어린이는 아마 많지 않을 것이다. 나는 밤새도록 짜증을 내면서 징징거렸다.


다음 날 아침, 교수님의 회진이 시작되었다. 보통의 대학병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하얀 가운을 입은 한 무리의 의사 선생님들이 병실에 도착하셨다. 처음에는 그렇게 많은 의사 선생님들을 한꺼번에 본 일이 없어서 좀 놀라긴 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참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키 크고 잘 생긴 수련의들을 병풍처럼 드리우며 도착한 그 구름의 중심에는, 키가 150 센티미터가 될까 말까 한 조그마한 체구의 여자 교수님이 계셨다. 쉽게 잊히지 않을 광경이었다.


열 살 남짓한 소녀에게 그분이 얼마나 멋져 보였는지 여러분은 상상이 되시는가?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넘실거리던 그분의 존재감이 어찌나 압도적이었는지, 나는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교수님은 내 상처를 보시며 뭐라 뭐라 지시를 하고 계셨지만, 내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아픈 뱃가죽까지도 까맣게 잊어버렸다. 단지 심장만 비정상적으로 쿵쾅거리고 있었다. 심장이 아니라 배 수술을 받았던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그 날의 느낌은 손꼽히는 명장면으로 내 추억 속에 남아있었다.


그분은 숨이 막히게 멋지셨다 (Image from SBS 낭만닥터)

이 오래된 기억이 다시 되살아 난 것은 어느 흔한 오후였다. 나는 우리 회사의 설비들이 조립되고 있는 플랫폼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어쩐 일인지 설비가 그래야만 하는 대로 움직여주고 있지 않았다. 내 업무는 완성된 설비의 기능을 테스트하는 역할이지만, 직접 기계를 분해하거나 고치지는 않는다. 꼼짝없이 설비 엔지니어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마침 저만치에서 몇몇 엔지니어들이 내가 있는 방향으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 회사 플랫폼은 확 트인 넓은 공간으로, 진공장비를 다루기 때문에 공기 청정도가 높은 클린룸으로 유지된다. 그래서 먼지를 내지 않는 소재로 제작된 가운을 입고 작업을 하는데, 이것이 흰 가운인 거라! 게다가 그날 내 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던 무리의 엔지니어들이 하나같이 185센티미터가 넘는 훤칠한 키를 자랑하고 있었던 것은 또 무슨 덤인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작은 소녀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던 대학병원 교수님의 회진 모습이 떠올랐던 것이.  


어딘가가 아플 때 마주하게 되는 의사 선생님의 존재는 그 자체로 위안이 되고 희망이 된다. 비록 나는 설비의 증상을 통해 이상이 있음을 일차적으로 의심했지만, 정확한 진단은 설비 의료진들이 확인을 하고 적절한 처방과 필요한 수술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간절한 상황에서 다가오던 엔지니어들이 얼마나 위안이 되고 희망이 되었는지 모른다. 분명 저들은 내 설비의 병을 말끔히 낫게 해 줄 거라는 확신이 있었으니까. 그러니 그 모습이 얼마나 멋져 보였겠는가! 마치 그 날의 회진이 그랬듯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이 장면은 분명 데자뷔(déjà-vu)였다. 하얀 가운을 입고 사람의 병을 고치는 의사 선생님들의 모습이, 역시 하얀 방진 가운을 입고 기계의 병을 고치는 엔지니어들의 모습으로 오버랩되면서 마치 꿈속처럼 환상적인 기분이 들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하얀 가운을 입은 엔지니어들을 병풍처럼 두르고 진지하게 설비의 상태를 논의하는 그 한가운데에는, 아우라가 넘실거리던 교수님 대신 바로 그날의 어린 소녀가 있었다.


하얀 가운의 설비 의료진 멋지죠? (파리제라늄의 오래된 앨범)


우리는 이렇게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함께 증상을 공유하고 서로의 의견을 모으고 진단을 하고 치료를 한다. 그리고 마침내 설비가 건강해지면 멋진 분석 결과를 얻어낼 수 있게 된다. 아무리 신나는 일이라도 자꾸 반복이 되다 보면 식상해질 법도 한데, 나는 이런 일련의 과정들이 여전히 멋져 보이고 자꾸만 반해 버리고 만다.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설비들과 함께, 또 이렇게 멋지고 능력 있는 설비 의료진들과 함께, 최상의 결과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나의 직업에 오늘도 감사하며 또다시 벅차게 사랑에 빠지고 만다.




사랑하는 것들에 대해 씁니다.

- 파리제라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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