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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리제라늄 Apr 29. 2020

원자에 반하다

랩 걸_그 시작

누군가가 내게 물어오는 질문 중 가장 어려운 것은 의외로 ‘무슨 일을 하세요?’라는 평범한 질문이다. 물론 그냥 ‘엔지니어입니다.’라고 간단하게 대답하고 넘어갈 수도 있지만, 자세한 설명이 필요한 경우에는 조금 복잡해진다. 이제 주기율표, 반도체, 동위원소, 우주의 운석이라든가 원자 같은 단어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쯤 되면 질문하신 분도 답하는 나도 약간씩 난감해진다. 


분야가 좀 특이하죠?
사실 저희 부모님조차도 제가 무슨 일을 하는지 자세히는 모르세요.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쯤에서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빙긋 웃으며 화두를 돌리곤 한다. 그런데 이 말은 농담이 아니라 사실이기도 하다. 그렇다. 나는 반도체에서 운석에 이르기까지 물질을 구성하는 주기율표의 원소를 원자 단위로 쪼개어 그 개수를 세는 설비를 개발하는 엔지니어다. 어째 써놓고도 복잡하다. 




그렇다면 대체 어쩌다가 이런 직업을 갖게 되었을까? 그 시작을 떠올릴 때마다 내 마음은 어김없이 1993년 어느 여름날의 아침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해 여름, 우리 동네 대전에서는 <대전엑스포 ‘93> 이라고도 불리는 세계박람회가 열렸다. 많은 청년들과 대학생들이 엑스포 행사기간 중에 자원봉사자로 참여했다. 나도 그중의 하나였다. 


자원봉사자로 소집된 첫날, 우리들은 유니폼을 멋지게 차려 입고 각 전시관을 무료로 관람하게 되었다. 매일매일 그 날의 관람객 상황에 따라 일손이 부족한 전시관으로 문제없이 배치되어야 했기 때문에, 사전에 미리 소개를 받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그날 나의 '운명'을 만났다. 바로 포항제철의 전시관이었던 <소재관>에서였다. 

활짝 웃고 있는 파리제라늄 (대전엑스포'93)


지금은 영화관이든 게임이든 혹은 거리 광고에까지 적용되는 일상의 일부가 되어버렸지만, 그 당시만 해도 3D 라는 것은 최첨단 영상 기법이었다. 그러니 세계박람회에서 첫 선을 보이게 되었던 것이다. <소재관>에서 만화 같이 우스꽝스러운 안경을 쓰고 처음 만난 3차원의 세상은, 한마디로 경이적이었다. 


영상은 어떤 저택의 거실에 놓인 장식용 호랑이 상을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것처럼 그 호랑이는 금속으로 만들어진 공을 하나 들고 있었다. 영상은 우리 관객들을 이끌고 이 금속 덩어리의 내부로 들어갔다. 공을 향해 거침없이 다가가는 극적인 속도와 사실적인 3D 이미지로 인해 그 장면은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실제로 공에 머리를 부딪히는 것만 같아서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1초 정도 지났을까. 감았던 눈을 다시 조심스럽게 떴을 때, 나는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에 들어와 있었다. 눈앞에 펼쳐져있던 결정구조의 세계, 각기 다른 원소의 원자를 상징하는 동그랗고 알록달록한 수많은 공들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들의, 그러니까 그 원자들의 결합이 이루고 있는 질서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신비로웠다. 

마이크로 세계는 감동입니다 (Photo by Pixabay)


순간 마치 영화의 특수효과처럼 주변이 모두 희미해지고 나는 홀로 그 안에 서 있었다. 내 시선이 다다를 수 있는 마지막 지점부터 바로 귓전을 스칠만큼 다가와있던 새빨간 공까지, 무한대로 펼쳐진 원자들 한가운데 말이다. 그 모습은 이 세상의 어떤 언어로도 표현해 낼 수 없을 만큼 환상적이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목소리가 원자들을 공명하며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아! 아름답다!
완벽하게 아름답다!


압도적으로 아름다운 것을 보면 눈물이 흐르는 건 나뿐만이 아니리라 믿는다. 그 순간이 그랬다. 내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오르고 있었다. 믿어지지 않지만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그때의 환희가 고스란히 느껴져 눈물이 차오르고 가슴이 두근거린다. 마치 첫사랑의 터질 듯 한 심장 같은 느낌이다. 그렇게 원자와 나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대부분의 경우 아무리 좋아서 시작한 일이라 해도, 직업이 되고 회사를 다니다 보면 현실과 상황에 치여 처음의 설렘을 잊어버리기 일쑤다. 처음에는 이거 아니면 안 될 것 같았었는데, 이것만 아니면 다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날이 기어코 오고야 만다. 


물론 내게도 그런 날들이 있었다. 영영 못 해 먹을 것만 같아서 다른 길을 기웃거려 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내가 돌아오는 곳은 같은 지점이었다. 기본 단위가 원자인 것은 이 세상의 물질뿐만이 아니었나 보다. 내 삶의 기본도 이 원자에 있었음을 깨달았다.


원자로의 회귀에 완벽히 설득당했던 날 이후, 더 이상 방황을 할 필요가 없었다. 마음은 고요하고 편안해졌다. 운명을 기꺼이 끌어안은 자에게만 주어지는 선물 같은 것일까. 신비롭게도 이 일을 향한 나의 사랑은 오늘도 현재 진행형이다. 더 크게. 더 깊게. 


진심으로 감사하고 또 감사한다. 벅차게 사랑하는 일을 하며 살 수 있는 행운은 누구에게나 허락된 선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이 선물에 보답할 수 있는 방법이란 진심과 최선을 다하는 것임을 항상 기억하기를. 그렇게 오늘도 두근거리는 가슴을 품고 행복하게 원자를 센다. 


내겐 너무나 아름다운 주기율표 (Photo by Pixabay) 

사랑하는 것들에 대해 씁니다.

- 파리제라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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