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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COCO Feb 16. 2024

굳이 쓸데없이 우스운 일을 하는 이유

엄마 성 빛내기, 엄마의 성본을 따르고 싶은 게 왜 문제일까 

오랜만에 동생의 집에서 둘만의 맥주 타임을 갖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엄마성 빛내기'라는 프로젝트에 대해 들었다. 

엄마의 성을 사용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람들이 모여서 다 함께 성본변경 신청서를 내는 프로젝트라고 했다. 


"언니도 할래?"

"그럴까?"


솔직히 그때만 해도 내가 해야 하는 일은 국민청원 같은 곳에 '동의'를 클릭하거나 내 이름을 보태면 되는 정도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뚜껑을 열고 보니 한 명 한 명이 자신의 신청서를 직접 작성해야 하는 대단히 번거롭고 품이 많이 드는 일이었다. 


성을 바꾸는 일보다 그 신청서를 작성하는 것이 나에게는 더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그래도 참여하기로 했으니 어쩌랴. 어마어마한 분량의 참고자료를 읽고, 세미나에 참석하고 이미 자신의 성을 엄마 성으로 바꾼 분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어떤 이유로. 왜. 엄마의 성을 사용하려고 하는지 이유를 작성하는 부분이 가장 관건이었다. 

그 이유가 설득력 있어야 한다. 아버지의 성을 사용하는 현재보다 어머니의 성을 사용하는 미래가 나에게 더 큰 이익을 가져올 것이며 사회적으로나 가족 내부의 혼란이 없다는 것을 설명해야 한다. 


참여를 신청한 백여 명의 사람들은 각자 자신만의 이유를 가지고 있다. 

가장 인용 가능성(청구가 이유 있음으로 승인되는 것을 인용이라고 한다. 소송이 아니고 청구다.)이 높을 것으로 예상되는 케이스는 

- 아버지에 대한 깊은 반감, 보호자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했거나 심지어 폭력을 행사했던 유년의 기억  

- 부모님은 이혼을 했고 아버지는 양육의 책임을 저버렸으며 어머니가 나를 양육했고 

- 아버지는 나와 관계없는 사람으로 살고 있고, 그런 아버지의 성을 따르고 싶지 않다 

  

하지만 이런 케이스마저도 전부 인용될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이미 성인으로 아버지의 성을 사용하면서 오래 살아왔고 그 과정에서 큰 문제가 없었다며 기각될 가능성도 있다. 판사의 판단에 달려있다. 


이보다 더 난처하고 어려운 케이스는 

-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나의 관계에 아무런 문제가 없고 

- 아버지와 어머니는 현재도 부부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 나는 어머니의 성을 따를 자유를 획득하고자 한다 


이 경우, 판사가 판단의 근거로 삼을 근거가 매우 빈약해질 수밖에 없다. 신청하는 사람이 얼마나 가부장제에 대해 극렬한 반감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 때문에 그의 존엄과 안녕에 얼마나 큰 어려움이 있는지를 설파해야 하는데 현재로서는 그런 주장에 대해 공감할 가능성보다는 이유 없음으로 쓱 밀어내버릴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어떻게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킬 수 있을까 고심하며 자신의 신청서를 작성하는 밤을 보냈다. 퇴근하고 나서, 가족들이 모든 잠든 후에 혼자 불을 켜고 앉아 나의 이야기를 적어 내려가는 사람들.  


며칠 후 엄마 성 빛내기 세미나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기사에 수십 개의 댓글이 달렸다. 


할 일 되게 없네. 사는데 문제없잖아. 

그래봤자 뭐가 달라져? 

어차피 외할아버지 성이잖아.  

이런 여자랑 살려면 피곤하겠다. 

그럼 군대도 가라. 

출산율 떨어지는 건 이런 여자들 때문. 


나는 그들을 비난하고 싶지 않다. 그들은 그들의 생각을 표현할 자유가 있다. 

그들이 살아온 시간에서 얻은 경험과 지식과 사고의 결론을 표현할 자유가 있다. 

싸우고 싶지도 않다. 그들의 생각을 바꿀 마음이 없다. 


누군가가 엄마의 성을 사용하고 싶다는 것이 왜 화가 나는 일인지 생각해 본다. 

변화가 싫은 것일 수도 있고, 그저 화낼 대상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가지고 있는 아주 작은 것마저 빼앗길까 두려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https://www.khan.co.kr/national/gender/article/202402132114005



세상은 변한다. 사회의 발전은 약자의 바람이 반영되는 쪽으로 변해간다. 

노동자들의 권리, 아동의 권리, 이주 외국인의 권리, 성소수자의 권리, 장애인의 권리, 동물의 권리. 모두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쉽게 무시하던, 아니 인식조차 하지 못했던 소수의 권리를 보장하고 지켜주는 방향으로 변해가고 있다. 


여성은 인류의 절반이다. 여성은 여전히 권리를 요구하고 있다. 남성들은 요구한 적 없는, 당연히 가지고 있는 권리들을 요구하다 보니 그들에게는 '굳이 쓸데없이 우스운' 행위로 보인다. 


남자들의 무엇도 빼앗고 싶지 않다. 동등함을 원하는 것뿐이다. 

아버지의 권리와 동등한 어머니의 권리를 갖고 싶다. 아버지의 성을 물려받는다는 개념이 암묵적으로 전달하는 시대착오적인 기울어짐을 평평하게 만들고 싶다. 인간은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유전자를 반반 물려받았다. 어떤 성을 따르는지는 행정적인 관습일 뿐이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성본 중 무엇을 사용할지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되어도 관념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 어떤 아이는 어머니의 성을, 어떤 아이는 아버지의 성을 쓰는 미래를 상상해 본다. 

그것이 무엇을 붕괴시키거나 어떤 혼란을 가져올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도 잘 모르겠다. 


대한민국은 참 대단한 나라다. 이 작은 나라에서 이 적은 수의 국민들이 이루어 내는 것을 보라. 

경제적인 성취뿐만 아니라 문화 예술 분야에서도 놀라운 영향력을 전 세계에 펼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성평등, 성인식에 대해서는 OECD 국가 중 최저에 머물고 있다. 

여전히 여성의 정치 참여율이 낮고 고위 관리자 비율이 낮으며 남녀의 임금 격차가 크다. 이 영리한 민족의 여자들이, 어머니와 누나와 여동생과 여자친구와 부인과 딸이 왜 차별을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는가.


경쟁구도를 남녀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내부의 적을 만들기에는 외부의 빌런들이 너무 많지 않은가. 


나에게는 아들이 둘이 있다. 내 아들이 미래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게 되는 것을 상상해 본다. 

내 손자들이 아들의 성이 아닌, 배우자의 성을 따르기로 결정한다면 그것이 내 아들이 가져야 할 권리를 침해한다고 느껴질까? 서운하다고 느껴질까? 드센 여자랑 결혼했다며 안타까워할까?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어떤 성을 쓰든 선택을 존중할 것이다. 아니 내 존중 따위는 이미 무관한 그들의 일이다. 


만약 내 아들이 자라서, 자신의 선택으로 자신의 성본을 엄마의 것으로 변경하겠다고 하면 어떨까. 나는 참 기쁠 것 같다.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닌가 보다. 나를 존중하고 소중히 여겨주는 아들이 고마울 것 같다. 


이름 석자에 담긴 의미가 거대한 가부장제의 그늘이라면 나는 내 이름에서 아예 성을 지우고 싶다. 아이들의 이름에서도 지워주고 싶다. 그저 너 자신으로 살아도 충분하니까. 부모가 무엇을 물려주었는지, 네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이름에 아로새겨 잊지 말라 강요할 필요 없다. 구차하다. 


나의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나의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그래서 나는 그들을 어떻게 추억하고 얼마나 소중한지는 성씨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러니 엄마의 성을 따를 권리를 나에게 달라. 아무 의미 없다면 의미 없는 아무것이든 선택할 권리를 달라. 의미가 있다면 왜 아버지의 성만 의미가 있는지 설명해 달라. 어머니의 성은 어째서 따를 수 없는지 설명해 달라. 


이렇게 논리적이지 않아서야 원 내 신청서가 어떻게 전달이 될지 막막하다. 

좀 더 찬찬히 내 생각을 적어봐야겠다. 


성본 변경 신청서를 작성하던 분들이 "쓰다 보니 분노에 휩싸여서 열 장이 넘었다", "나는 열다섯 장이 넘었다" 하더니 왜 그랬는지 이 글을 쓰다 보니 좀 알겠다. 쓸데없는 분노는 정말 쓸데없다. 생산적으로 살고 싶은 영리한 대한민국의 여성들을 이런 쓸데없는 일에 에너지 낭비하지 않게 법이 잘 정리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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