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친 당신께 드리고 싶은 말씀
요즘 들어 ‘100세 인생’이라는 말이 더 이상 현실적이지 않게 들릴 때가 있다. 오래 살 수 있다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 주변의 부고 소식은 대부분 그보다 훨씬 이른 나이에 멈춘다. 장례식장을 갈 때마다 100세 가까이 산 분을 거의 보지 못한다는 사실, 그 묵직한 현실이 마음 어딘가를 건드린다. 최근 들려온 유명인들의 부고 소식을 보더라도 대체로 80세 전후에 돌아가시는 경우가 훨씬 많다. 마흔을 넘긴 지금을 기준으로 생각해보면, 인생의 절반 정도는 이미 지나온 셈이고, 그 사실을 떠올릴 때 감정이 격해지기보다 묘하게 조용한 가라앉음이 찾아온다. 예전에는 멀리 있던 ‘죽음’이라는 그림자가 어느새 발끝 밑에 내려온 느낌. 특별한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이유 없이 마음이 낮게 가라앉는 날이 많아진 것도, 어쩌면 그런 변화 때문일지 모른다.
사람들이 요즘 더 지쳐가는 이유는 단순히 바쁜 시대에 살기 때문이 아니다. 시대 자체가 우리 마음을 빠르게 소모하도록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하루에 한두 가지 역할만 해도 충분했던 시대는 지나갔다. 지금 우리는 아침부터 밤까지 수십 번 역할을 바꿔가며 살아간다. 일, 관계, 감정 관리, SNS, 비교, 정보의 홍수로 인한 수많은 선택지, AI등 신기술에 대한 미래에 대한 압박, 경제적 책임까지. 몸이 지쳐서가 아니라 주의력과 감정이 지속적으로 깎여 나가는 시대인 것이다. 마음의 회복 속도보다 자극의 속도가 더 빠르니 같은 하루도 더 무겁게 느껴지고, 사소한 일에도 쉽게 지치게 된다. 그러니 지금의 피로는 당신이 관리를 못하거나 무언가를 잘못한 것이 아니라. 이 시대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것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다.
사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또한 나이를 먹을수록 정신적으로 지칠때가 많아지는 것 같다. 기업, 단체 등 여러 조직을 이끌고 있다 보니, 보이지 않는 순간에도 수많은 이들의 마음과 앞날이 나의 등 위에 얹혀 있는 느낌이 든다. 나 하나도 감당하기 버거운 세상인데, 사랑하는 사람들, 함께하는 사람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까지 떠올리면 ‘내가 너무 많은 것을 스스로 짊어지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심지어 누가 시킨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단단히 묶어놓은 책임감은 순간순간 마음 깊은 곳에서 피로의 형태로 올라오고, 언급했던 시대의 구조적 변화까지 받아들여야 하다보니 지친다는 감정이 가속화 되는 느낌이다. 그럴때마다 '내가 선택한 길' 이라는 합리화를 통해 이겨내곤 했다.
평소 내가 가지고 있는 삶의 철학이 한가지 있다면 '무엇이든 좋은쪽으로 쓰면 된다' 라는 생각이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야 하고, 즐기려면 좋게 생각해야 한다. 피하지 못하는 것들을 걱정하고 고민하는 것보다 어떻게 하면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것이 내 짧은 이번 삶을 더욱 현명하게 사는 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 삶은 그야말로 고난의 연속이다. 어느면으로 보나 확실히 그렇다. 우리가 겪게 되는 일들은 대체로 생애 처음 겪는 일들이 많기 때문이다.(모든 일은 처음에 다 어렵다.) 피할 수 없기에 '잘' 살고 싶어 궁여지책으로 만들어 낸 '관점'이 하나 있다. 좋지 않은 감정들에 쓸려가지 않기 위해 내 삶을 3인칭 작가의 시점에서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나를 내가 아닌 '내 인생을 쓰는 작가'라고 상상한다. 누군가 감정 없이 나라는 사람의 하루를 기록하고 있다면, 오늘의 나를 어떻게 적을까. 이 시선은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기록 가능한 크기’로 줄여준다. 이유 없이 지치는 날도, 공허한 날도, 흔들리는 날도 “이런 페이지가 있었다”라고 적어두고 다음 장을 넘기면 된다. 감정이 삶의 주인이 아니라 삶의 일부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비교적 마음이 편안해진다.
당시에는 힘들었던 감정들도 지나고 돌아보면 아무렇지 않은 추억으로 남는 경우가 많다. 여행도 그런 것 같다. 계획대로만 흘러간 여행은 잘 기억에 남지 않지만, 길을 잃고 헤매던 날들, 비를 맞아 어쩔 수 없이 예정에 없던 곳으로 들어갔던 순간들, 친구와 의견이 갈려 다퉜던 순간들이 지나고보면 고통이 아닌, 지난 날을 회상하는 주요 스팟이 된다. 그리고 우리는 주로 그런 여행을 '기억에 남는 여행'이라 얘기한다.
자세히 보면 삶도 비슷하다. 우리가 겪는 고통, 분노, 혼란, 막막함 같은 감정들이 당장의 하루를 무겁게 만들지만, 나중에 뒤돌아보면 그 감정들이 지난날의 나를 기억하는 좋은 재료가 된다. 좋은 책이 단조로운 문장들로 이루어지지 않듯, 우리의 삶도 다양한 결의 감정들로 채워져야 비로소 이야기다워진다는 것이다.
죽음을 경험했다가 돌아온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장면이 있다. 죽음에 다다랐다고 느껴졌을 때 살아온 날들이 오래된 필름처럼 쭉 스쳐 지나간다는 것 말이다. 그리고 그 필름 속에서 가장 선명하게 남는 건 평온하고 완벽했던 순간이 아니라 마음이 크게 흔들렸던 순간순간들(고통, 환희, 노여움, 기쁨, 감동)이었다고 한다. 마치 평온하고 나이스했던 여행보단 고되고 힘들었던 여행이 더 오래 기억에 남는 것처럼 말이다. 기쁨보다 슬픔, 안정보다 흔들림, 완벽함보다 불완전함.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의 삶은 늘 그런 장면들로 이루어져 있다. 지금 힘들고 지치는 감정들, 겪고 있는 불안정한 상황들 결국 죽기 직전엔 당신이라는 삶을 회상하는 필름의 한조각이 될 뿐이다.
아마도 2100년쯤이 되면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의 우리는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영원히 살 것 같았던 철부지 10대가 엊그제 같은데 돌아보니 어느새 많은 것을 책임져야 하는 어른이 되어있다. 어쩌면 우리는 언젠가 사라질 존재라는 걸 암묵적으로 알고 있기에 더 열심히 살아왔고, 그래서 지금 더 쉽게 지쳐온 것인지도 모른다. 만약 스스로 지친 것 같다고 생각이 드시는 분들이 있다면 나와 같이 인생의 관점을 3인칭 작가 시점으로 전환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지금의 피로는 인생 전체가 아니라 ‘한 페이지의 일부’일 뿐이다. 오늘 버틴 마음, 오늘 견뎌낸 감정들, 오늘의 작은 선택들은 모두 당신이 살아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언젠가 당신이 떠나는 순간, 삶의 필름이 눈앞에서 조용히 스쳐 지나간다면 그 장면들이 충분히 의미 있었으면 좋겠다. 마치 잘 만들어진 책이나 영화를 보듯, 당신의 삶이 한 장면씩 펼쳐지는 모습을 보며 마지막을 맞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극장에서 재밌는 영화 한 편을 몰입하여 볼 때 잠깐이나마 삶의 스트레스와 고뇌를 잊는 것처럼 말이다.
최근 엄마가 오랜 투병 끝에 돌아가셨다. 평생을 효도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했지만 그나마 임종을 곁에서 지킬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나하고는 너무 먼 미래일 것 같았던 엄마와의 이별이 눈 앞으로 다가오자 무슨 말을 해야할지 고민이 되어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숨이 가빠오고 달고 있던 호흡기가 울컹거릴때 마지막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아마도 필름처럼 엄마의 삶이 지나가고 있을 것 같았다. 마음을 정리하고 엄마에게 당신은 내 인생에 정말 훌륭한 엄마였으니 절대 나에게 미안해하면 안된다고 얘기했다. 세상 대부분의 부모들은 죽을때까지 자식에게 미안해한다고 들었다. 다행이도 그 얘기를 듣고 돌아가셨다. 그때 뼈저리게 깨달았다. 피할 수 없는 현실, 나도 언젠간 이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잘 사는 것도 못지 않게 잘 죽는 것도 중요하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되었다.
두서없이 쓴 이 글을 여기까지 보고 계신 분이라면 아마도 삶에 조금은 지쳤거나 지쳐가고 있는 분들이 있으실 것 같다.
그래서 지친 당신께 꼭 이 말씀을 드리고 싶다. 너무 특별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당신은 이미 충분히 특별하다는 것 말이다. 당신이 지친 이유는 지금의 우리내 삶이 너무 빠르게 변화하기 때문이고, 그로인해 필요 이상의 역할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얘기하면 당신은 당신이라는 삶의 '책'을 가장 값진 방식으로 쓰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우리 모두는 상황이 다를 뿐이지 각자의 방식으로 내게 주어진 삶에 대한 책임을 다해 살고있다.
그렇기 때문에 가끔은 너무 잘하려 하지 않아도, 조금 흔들리는 순간이 오더라도, 지금 이 순간을 버티고 있는 것만으로도 당신의 이야기는 아주 잘 쓰여지고 있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다. 한 번 정도 3인칭 작가 시점으로 당신의 삶을 관찰해보시길 바란다. 혹시 아는가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품을 만들고 계실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