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산반도 :: 꿈꾸던 사람을 기억하며
안개에 파묻힌 변산은 어디가 산인지 바다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도로를 내질러 달리면 저 멀리 예상치 못했던 큰 산이 뚜둥-하고 나타났다. 엄마, 저거 삼각김밥같아. 나는 나란히 포개져있는 두개의 암산을 보며 입맛을 다졌다. 배가 고팠나. 쬬로로-찌르르-, 뭐라고 하는지 도통 알 수 없는 철새들의 지저귐을 들으며 조금 더 걸었고, 사람없이 거대한 공중화장실에 쓰레기를 한웅큼 버리는 사람들을 작게 욕하며 숙소로 향하는 길에 맛있는 밥을 사먹었다. 아빠의 죽까지 내가 몽땅 헤치웠다. 더 이상 삼각김밥 산은 생각나지 않았다.
비는 듬성 듬성 내리다 결국 내내 내리기 시작했다. 와이퍼가 분주히 돌아간다. 내리막을 향해 치닫다가 산길을 따라 오르막을 향하는 폭 파인 곳은 뿌연 안개가 수증기처럼 그 곳에 고여 더욱 뿌옇게 시야를 가리기도 했다. 술잔에 가라앉은 탁주처럼 뿌연 안개를 가지에, 흙위에 흩뿌려놓은 전나무 숲도 걷는다. 기대한 비냄새보다 살살 코를 간지럽히는 습한 냄새들이었다. 언젠가 '비내리는 샤려니길'이라는 셤유유연제를 산 적이 있었는데. 그 향을 어렴풋이 기대했지만 풋내나는 흙바닥과 축축한 물냄새는 맡을 수 없었고 질척한 바닥을 걷고 또 걸었다.
그리고 절을 내려와서는 절의 연원을 재미나게 입에서 굴려보며 깔깔깔 웃었다. 투둑 투둑 우산을 두들기는 빗소리에 신이났나. 나조차도 이유를 알 수 없는 신난 기분이었지만 숙소에 들어와 술 한 두잔을 기울이며 그 이유를 알았다. 일을 그만두니 정신적으로 자유로워졌다. 그래서 웃으며 설거지를 하고 술취한 아빠를 얼래는 것도 짜증나지 않는다. 그간 짜증났던 감정은 도통 나의 것이 아니었던 것 같다. 낯설다. 어쩌면 어린 투정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어른처럼 굴어본다. 그래도 알고 있다. 뚜렷히 큰 갈등이나 고민이 없었음에도 끊임없이 나를 피곤하게 만든 것의 정체를. 착하다는 칭찬이 멍청하다고 책망하는 것을 알면서도 바뀌지 못했던 나에 대한 자책과 끊임없이 나를 시험하는 말들이 두려웠나. 분명 허무주의나 시대에 대한 지나친 자조는 투정이라고 생각했던 나인데. 사실은 모든걸 감수하려 했던 내가 바보였던건 아닐까, 착하단 말에 속아서. 시간이 지나 자책해봐도 소용없다는 것도 안다. 단지 지치고 힘들면 그 이유를 끊임없이 추적해야 후련했던 나 때문이다.
사념은 접고 다시 대화에 집중한다. 요근래 아빠는 살이 너무 빠졌고 밤마다 그 걱정에 잠을 못이루고 있음을 고백했다. 아빠는 우물쭈물 장황한 이야기를 다시 늘어놓으셨지만, 결국 술에 취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어쩌면 평소 그렇듯이 술로 결말을 피했던 것은 아닐까. 어쨌든 이불을 펴고 나란히 누워 아빠가 좋아하는 아바 노래를 틀었다. <댄싱퀸>에 맞춰 실룩실룩 춤을추니 엄마는 숨이 멎어라 깔깔깔 웃었다.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음 좋겠다고 어린 내가 생각나서 조금 더 재롱을 부렸다.
이제 모두가 잠들었다. 아빠의 코골이와 천장을 두들기는 빗소리를 들으며 <쇼코의 미소>를 몽땅 읽고 눈물을 훔쳤다. 마지막 작가의 말을 보며 처절한 공감에 눈물이 주륵주륵 흐른다. 나도, 언젠가. 언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