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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영선 Oct 16. 2021

첫번째 중국 여행 1일/9일 (인천->상하이)

* 작성일 : 2017년 5월 28일


 5월 연휴를 맞아 작년에 미리 신청했던 여행이었다. 하지만 실은 정치학이라는 전공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날 위해서, 오랜 시간 꿈꿔왔던 그런 여행이었다. 러시아에 가 T-34부터 유리 가가린의 기념 동상까지, 구 소련의 흔적들을 짚어보고 싶었다. 붉은 광장을 걸어보면서, 대부분은 무서워하지만 내겐 정겹게 느껴지는 러시아인들의 삶을 둘러싼 공기 속에서 호흡해보고 싶었다. 그런데 출발일이 가까워 올 무렵 상트페테르부르그에서 테러 소식이 전해졌고, 홀로 여행할 나를 엄마가 너무 걱정스러워하셔서 여행지를 중국으로 급히 변경하게 됐다. 당시 사드 문제로 분위기가 흉흉했던지라 엄마는 중국 여행도 여전히 염려하셨지만, 러시아가 아니라면 응당 중국이어야만 했다. 어차피 북한이나 쿠바는 지금의 사정으론ㅡ법적으로, 일정상의 문제로ㅡ 불가능했으니까. :)


 중국어를 공부한 지도 어느덧 1년이 넘어, 의사 소통 문제도 러시아보다 한결 나을테고, 같은 아시아 대륙이니 인종 차별 걱정도 없었지만- 그래도 일주일이 넘는 시간동안 나홀로 해외 여행을 한다는 건 내게 있어 꽤 용감한 도전이었다. 뒤늦게 항공권을 알아보고, 비자를 신청하고, 환전을 하고, 유니온페이 체크카드를 만드는 여행 준비 과정도 꽤나 품이 드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중국이어야했다. 어째서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꾸준히 중국어를 공부해왔는지, 왜 관심 분야 리서치를 하면서 China 폴더를 따로 만들어 정리하는지, 무슨 이유로 중국에서 일하고 있는 이들의 블로그를 팔로우하고 있는지 ㅡ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조용히 타오르는 불꽃 속에 기름을 들이부어야 할 지, 아니면 꺼지지 않게끔만 보살피면 될 지를 결정할.


 여행 이틀 전 감기에 걸리는 바람에 컨디션이 몹시 안 좋았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느라 약을 챙겨먹는 것도 잊었다. 졸리고 아픈 몸을 의자에 기댄 채, 지연된 탑승 수속을 기다리고 있자니 긴장감이 일었다. 호텔까지 무사히 찾아갈 수 있을지, 미리 사 둔 중국 유심이 잘 작동할지... 전형적인 초보 여행자의 근심 걱정거리들.


 비행기 에어컨 바람이 너무 세서, 그리고 피로가 걷잡을 수 없이 밀려와서 급기야 고개를 푹 숙인 채 신음하지 않고선 견딜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거기다 감기로 상태가 안 좋은 귀가, 인정사정 없이 아파오는 바람에 누구라도 붙잡고 제발 내려달라고 소리치고 싶은 기분이었다. 어떤 아기가 으악 으악 괴롭게 우는 소리에 대리만족이 되어 하나도 거슬리지 않기까지 했다. 끔찍 ( _ _) 


 푸동 공항에 도착하고 나선, 솔직히 말해 좀 싱겁게 느껴질 정도로 모든 것이 쉽고 편리했다. 굳이 한글이 없더라도, 영어가 병기되어 있지 않더라도 워낙 우리나라 말에 한자어가 많다보니 수월했다. 모르는 걸 물어봐도 중국 사람들은 퉁명스럽게나마 꼭 알려줬다. 내 중국어를 다 알아들어줬고, 설명도 성심껏 해주었다. 아저씨의 턱짓 까딱이 가리킨 방향을 따라가서 산 고속 열차 티켓. 


 롱양루역에서 징안쓰역까지 가는 길. 그런데 지하철역 출구를 잘못 나오는 바람에 꽤 헤맸다. 그래도 무더운 여름 날씨 아래서, 아저씨가 길 위의 큰 꽃 화분에다 시원하게 물을 뿌려주고 있는 풍경들을 보는 건 오히려 유쾌했다. 캐리어가 호스를 밟지 않도록 슬쩍 들었다가 놓는 그 짧은 수고로움도, 이 기분 좋은 풍경의 일부가 되는 찰나라는 생각에 아무렇지 않았다. 

 얇은 니트에 트렌치 코트까지 걸쳐서도 그랬겠지만, 땀이 날 정도가 되어서야 호텔 로비에 들어섰다. 말끔한 호텔 직원의 중국어 잘한다는 흔한 멘트에도 기분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드디어 쉴 수 있다! 룸 컨디션은 최상이었다. 서울 집 내 방의 6배 크기는 되었으려나? 밖이 내려다보이는 큰 창 바로 옆에 욕조가 있는게 마음에 쏙 들었다. 회사 복지 시스템 중 가장 마음에 드는 해외 호텔 할인. 애사심 뿜뿜! 열심히 일할게요. :)    


 가족들한테 무사히 호텔 도착했다고 인증샷. 특별한 저녁 약속을 기다리며 ㅡ 관심 분야 리서치하다 우연히 접한 영문 기사 작성자 이름을 보니 한국 이름이었다. 흥미가 생겨 좀더 알아봤더니, 상하이에서 일하고 있는 한국인이었고 심지어 나랑 동갑이었다! 전문성 높은 기사들에다 진솔한 에세이들까지 더해진 블로그를 구독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꽤 오래, 몇 개월간 꾸준히 읽다보니 마치 내 친구같이 가깝게 느껴지고 꼭 한 번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졌다. 그래서 용기를 내 만나고 싶다는 글을 위챗 아이디와 함께 남겼고 저녁 약속이 잡히게 된 것이다! :) 다시 생각해도 가슴이 콩닥콩닥한 만남. 베이징에서 온 또다른 블로그 구독자분과도 함께, 셋이서 만나기로 했다.


 Lost Heaven이라는 달콤한 이름의 윈난 음식점에서 만난 E님, J님. 모르는 세 사람이 만났지만 어찌나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대화가 흘러갔는지-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아마 우리 세 사람 모두 솔직하게 자기 이야기를 꺼내놓았던 덕분이겠지? 이 만남이 그저 여행 중 하나의 에피소드가 아니라, 앞으로 내 인생에 있을 큰 변곡의 시작점으로 기록될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뜻깊고 좋은 시간이었다. 특히, 한국인의 관점으로 본- 중국의 기업 문화라든지 사회 분위기는 무척 신선하고 흥미로운 주제였다.  


 예쁜 찻집에서 선물 받은 예쁜 엽서. 



 이번 여행의 테마송으로 정한, 좋아서 하는 밴드의 '길을 잃기 위해서'. 이 만남과 안성맞춤인 노래였다! 

 꽤 믿음직한 이정표를 따라서, 나름의 고집도 살짝 더해서 인생길을 걸어왔다. 어린 시절 시골길도 소중했고, 지금 제법 널찍하고 잘 닦인 길을 걷게 된 데에 막연한 만족감도 느껴가면서. 그런데 아예 길 밖으로 벗어나 걷고 싶은대로 걸어온 이 멋진 두 사람을 만나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막상 길에 접어들고 난 뒤로, 따라 걷는 것 외에 이 길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 건지 어디로 이어질 지에 관해서 또다시 내게 언젠가 주어질 이정표만을 게으르게 기다리며 걸어가고 있었단 느낌이 들었다. 

 길 위에서 길을 잃어버렸다. 정말이지 잘 떠난 여행이다. 여행 첫날부터 곧장 이런 기분을 느끼게 되다니. :) 



 마음 속으로 발을 몇 차례나 동동 굴렀을만큼, 너무 감사한 시간이었다. 정말 고맙습니다, 우리 또 만날 거에요. 분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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