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이구 이 바보 뫼르소
2011년 12월 23일 씀
까뮈의 이방인은 뫼르소가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전해들으면서 시작된다. 처음엔 좀 이상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나 역시도 '응당 그래야 할' 것을 따르는 사람인 탓인지. 그저 덤덤하기만 한 뫼르소의 모습과, 양로원서 뫼르소의 어머니를 애인처럼 여기고 아꼈던 한 할아버지의 슬픔이 대조 되면서 마치 뜨거운 커피 차가운 커피를 번갈아 마시는 듯한 이상한 기분이 든다.
무덤덤. 딱히 그래야 할 이유도 없고 그러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어서. 뫼르소를 움직이는 것은 뫼르소가 아니라 무덤덤인 것만 같다.
다시 찾아간 샘에서 한 방을 쏘고, 세 방을 연달아 쐈던 뫼르소는 태양이 뜨거워서 죽였다고 법정에서 말했다. 미친 소리지만 미쳤다고 말하기만은 좀 뭐한게, 나도 고3 때 버스에서 내려 마주보이는 우리집을 향해서 마구 달려가다가 넘어져서 엄청 크게 무릎을 다친 적이 있었다. 지금도 날씨가 추우면 양 무릎에 그 때 상처났던 부분이 동그랗게 보라색으로 변하고 걸을 때 좀 쑤신다. 그런데 왜 갑자기 뛰었냐면, 하늘이 너무 파래서. 너무 새파랗고 아름다워서 왠지 달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였다. 그래서 조금쯤 그 기분이 뭔지 알 듯도 하다. 특히, 한 방 쏘고 나서 연달아 세 방을 더 쐈다는 건 정신이 좀 나가있었단 소리다. 그냥 멍-했다는 거다.
그냥 한 순간이 아니었을까.
날 때부터 이미 난 문명인이었어서 엄마한테 비누로 몸이 씻겨졌고 젓가락으로 음식을 집어먹었으며 횡단보도를 찾아 도로를 건넜다. 재작년 겨울, 통유리로 된 카페 창가에 앉아 A4 용지를 꼬깃 꼬깃 접어 아껴써가며 글을 썼다. 글을 쓰던 중이었으니 좀 생각이며 이것저것 말랑말랑해진 상태로 밖을 내다봤는데 마침 신호등이 빨간 불로 바뀌어 차들이 일제히 멈춰서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아, 참 말을 잘 듣는구나, 예쁘기도 하지. 빨간 불에서 멈추고, 파란 불에서 부릉부릉 달려나가는 자동차들. 문득 저마다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떠들어대고 있는 카페 안의 '사람'들이 '인간'으로 바뀌었고 갑자기 기분이 이상해졌다. 이렇게 여럿이 모여있으면서도 서로 해코지하는 일 없이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그치만 우리는 우리 안에 모두 뫼르소를 가지고 있지 않나? 별안간 내가 울고 웃고 기뻐하고 짓뭉갠 그 모든 일들이 하찮고 덧없게 느껴지는 그런 날이 찾아오면서. 어디선가 천문학자들이 자살을 많이 한다고 들었었다. 광대한 우주 속 자신의 미미한 존재에 우울함을 느끼곤 죽어버리는 것이란다. 서로 죽이지 않기로 약속하면서 만든 질서를 지키는 일은 우리 인생에서 중요하다. 그러나 '나'에 있어서도 중요한가? 좀 이기적인 생각이라 느껴지나? 아니 오히려 이건 불리한 생각이다. '나'를 위해 질서를 밟아누르는 걸 각오했을 때, 난 체포되어 '나'를 잃어버리고 말테니. 얌전히 미디어가 만들어낸 유행을 쫓아가고 질서를 지키며 하하호호 재잘재잘 친구들과 즐겁게 노는 쪽이 훨씬 흔하고 가지런한 인간의 모습이긴 하지. 흔하다는 말이 기분이 나쁜가? 그러면서도 흔함 속에 드러앉아있기를 좋아하잖아? 그저 one of them일 뿐이라는 항변이 필요하니까. 인간들은 다들 비슷비슷하게 살아간다. 튀어나온 못이 되어 괜히 얻어맞지 않을까 겁을 내면서.
뫼르소는 질서를 잘 지키는 사람이었으나 그 질서에서 스며나오는 무언의 질서를 이해하지 못 하고 따르고 싶어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걸 딱히 거부하려고도 않았단 점이다. 다만 성가시고 귀찮게 느꼈을 뿐이다. 그러나 인간 사회에서 그럭저럭 잘 녹아들어 살아가기 위해서는 질서를 지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한걸. 오히려 저 질서에서 스며나온 질서들을 잘 지키는 것이 때로는 더 중요한 것처럼 느껴지는 때도 있다.
목이 잘릴 뫼르소가 불쌍했지만, 나 역시 인간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므로, 뫼르소를 가엾게 여겨서는 안 되는 거겠지. 눈물 한 방울쯤 짐짓 흘려낼 줄도 모르는 바보 뫼르소. 으이구 이 바보 뫼르소. 그치만 널 가여워해선 안 되겠지. 널 가여워하는 순간 가여워해선 안 될 사람들까지 가엾게 여겨야만 할 지도 모르니까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