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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영선 Oct 16. 2021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닥터 지바고>

내게 문학의 의미를 일깨워준 책 

◎ 작성일 : 2011. 08. 25 (22살) 


 아름다운 라라여아름다운 러시아여그러나 라라와의 사랑은아름답게 일렁이며 언제 닥칠 지 모를 사나운 눈보라를 기다리는 위태로운 등불과도 같았고구부러진 별들을 머리에 얹고 포근한 눈 이불을 뒤집어쓰는 나의 아름다운 조국가슴 벅차리만큼 드넓은 나의 조국 러시아는 과연 이 곳이 인간의 나라가 맞는지조차 의심케 하는 원시의 대지로 변하고야 말았다.

 

 역사책을 읽다보면 종종 파란만장한 그네들의 삶에 알 수 없는 질투를 느끼게 된다역사의 거대한 물줄기가 굽이치는 바로 그 곳에서 살다 죽은 사람들지바고가 살던 그 시대도 마찬가지였다나도 혁명의 물결 속에서소중히 품어둔 이상을 쫓아 목숨까지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그 사람들 속에서 가슴 깊숙이 꿈틀거리는 정열과 비장한 각오로 살다 죽고 싶었다그러나 지바고의 비극적인 삶을 들여다보고 나니 그저 먹먹할 뿐이다그 시대엔 얼마나 많은 지바고가 있었을까.

 

 3학기 때 소련사를 배웠다내가 태어날 때쯤 소련은 망했다나한테 소련은 미국과 견줄 수 있었으리만치 대단한 나라사회주의의 이상을 한 번 실현시켜보려던 당차고 신기한 나라였다그런데 소련사를 배우면서는 소련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플라스크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했다겉으로는 완전한 용액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공산주의라는 용매를 집어넣고 마구 흔들어 뒤섞어놓은 그런 플라스크플라스크 입구에 붙은 소련이라는 이름표는 실험이 끝났음이 아니라 여전히 진행중임을 나타내는 것일 뿐이었다.

 

 지바고 역시 플라스크 속에서 구르고 부딪히며 살았다지바고는 어쩌면 플라스크의 내부 그 자체다소련사 시간에 배웠던당시 러시아 민중들의~’ 제목이 붙은 내용들이 모조리 지바고의 삶 속에 녹아있었기 때문이다더욱 생생하게 다가왔다도시 사람들이 먹을 것을 찾아 시골로 내려가 직접 채소 따위를 길러 먹었다는 것밀가루와 보드카 말고는 모든 것이 쓸모없었다는 것모스크바에서 쭉 살아온 인텔리겐챠 지바고가 기차를 타고 그리 먼 길을 달려 겨우 씨감자를 얻을 수 있을까  말까에 눈치를 봐야할만큼 먹을 것이 없었다니, (손을 비비며밀가루와 (목 중간을 톡톡 치며보드카가 없이는 멀리 갈 수 없다고 기차 역무원이 찡긋 할만큼 그것들이 그리 귀했는지. –내가 술을 안 좋아해서 그런지 몰라도 보드카가 생필품이라는 교수님 말씀에 반신반의했었는데 책에서 읽고 놀랐다.-

 

 인상 깊은 몇 가지 장면들이 있었다지바고가 라라를 향해현대 무기의 발달로 인해 전에는 볼 수 없던 참혹한 부상을 입고 괴이한 살덩어리가 되어 나타나는 환자들에 익숙해지기까지의 괴로움을 토로하는 장면이었다마음이 아팠다.

 

 얼마 전 밴드 오브 브라더스라는 드라마를 보고 한참이나 전쟁에 대해 생각했었다노르망디 상륙작전부터 종전까지의 이야기인데 아주 잘 만들어진 드라마다드라마적 과장이 없고 사실 그대로처럼 느껴진다나는 피를 흘리는 장면을 볼 때면 끔쩍 끔쩍 놀라곤 하는데 이 드라마를 볼 때는 다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힘줄이 저절로 꿈틀거리는 장면을 보면서도 아… 하면서 괜시리 눈물은 나려했지만 징그럽진 않았다어쨌든 여기에도 가여운 지바고처럼 그 괴이한 살덩어리들을 치료해주어야만 하는 사람이 나온다의무병 유진 로다사실 유진은 지바고보다 더 불쌍하다지바고는 어쨌거나 지붕이 있는 병원에 있고 또 몸이 박살이 난 병사들이 그에겐 그저 환자들일 뿐이지만 유진은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 포탄이 날아오는 뻥 뚫린 하늘을 지붕 삼아 숨가쁘게 전장을 뛰어다녀야 하고 유진이 치료해야하는 사람은 그에게 있어 단순한 환자가 아닌 죽을 고비를 몇 번이고 같이 넘긴 소중한 전우들이기 때문이다꿀렁 꿀렁 목으로 피를 넘기는 전우들에게 변변한 약 하나 제대로 쓰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저주하고 무력감에 사로잡혀 괴로워해야만 하는 것이다지바고를 보면서 유진 생각이 났다.

 

 지바고가 가까스로 집에 돌아왔을 때 이미 모스크바는 잔뜩 굶주린 상태였다여기선 우선순위배급표로 음식들을 잔뜩 얻게 됐을 때기뻐할 토냐를 생각하며 들뜬 마음으로 음식이 담긴 자루를 챙기던 지바고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왠지 나까지 절로 행복한 웃음이 났다음식을 맛있게 배불리 먹는 것도 행복한 일이지만토냐가 얼마나 기뻐할 지 얼마나 자기를 예뻐해주고 인정해줄지 상상하면서 뛰듯이 집으로 걸어가는 그 길이 더 행복했을 것이다.

 

 도무지 먹을 것이 없어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가 닿은 바르이키노에서 지바고는 라라를 만나게 된다라라에 끌리는 마음은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강인함으로 가정을 꿋꿋이 지켜나간 토냐를 속이는 것은 나쁘게 여겨졌기 때문에 (그렇다고 토냐에게 라라를 만나겠다고 허락을 받아야한다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토냐에게 이실직고하고 용서를 빌려다가 끝내 라라에게로 걸음을 돌리고만 지바고가 적위대에게 납치되었을 땐 쫌 쌤통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 지바고가 겪게 된 일들은 읽는 나마저도 신경쇠약에 걸리게 할 것 같았다특히 우연히 반역자들의 모의를 엿듣고 그 가운데 지도자의 심복이 있음에 놀랐다가 그가 이중 스파이였음이 드러났을 때… 그 때 쌤통이라 생각했던 게 미안해졌다나까지도 질려버리고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나도 그런 비슷한 일을 겪은 적이 있었다가만히 있기 어려워 당장 박차고 나오고 싶을만큼의 괴로움뭔가가 살 위를 기어 다니는 듯한 혐오감그리고 표정은 썩게’ 된다… -.-

 

 목숨을 걸고 도망쳤는데 가족은 머나먼 파리에 가 있고딸래미는 얼굴조차 보지 못 하고하지만 그는 라라를 만나게 된다그리고 라라와의 그 짧은 사랑바람 앞의 등불같이 위태롭고 연약하지만 그래서 더 아름답고 순수한 사랑언제 꺼져버릴 지 모를… 사랑? 미치지 않기 위해서 둘은 안간힘을 쓴다.

 

 언제 죽을 지 모를 운명에 놓인 둘의 앞에 코마로프스키가 나타나 구원의 손을 내민다지바고는 라라가 그를 따라가도록 하기 위해 가는 척 하고 그대로 남는다위기에 빠진 사랑하는 라라를 다른 이도 아닌 코마로프스키가 구출하는 모습을 보면서 지바고는 얼마나 비참했을까?

 

 불쌍한 지바고는 스트렐리니코프를 만난다그는 자살한다난 조금 화가 났다어쨌거나 스트렐리니코프는 혁명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이름을 떨쳤다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한 그 물결 속에 자기를 내던졌던 사람이다그런데 이런 식으로 초라한 최후,그것도 그렇게 모든 걸 버리고 뛰어들었던 혁명이 아닌 라라의 흔적을 쫓고 쫓아 온 첩첩산중에서… 어찌됐건 그의 최후는 스트렐리니코프가 아니라 파샤다웠다지바고는 혁명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기는커녕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살고 싶어했다그러나 그것이 그의 시대였으므로 그도 별 수 없이 혁명에 대한 생각이 자라나게 되었다그의 시대였기 때문에시모치카가 말하는 그시대’ 말이다그는 냉소적이다틀린 말은 하지 않는다그러나 냉소적이다왠지 나도 요즘 점점 냉소적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 같아 지바고의 그런 모습이 진지하게 와닿았다지바고의 최후는 어쩌면 더 비참하다그냥죽어버렸다.

 

 전체적인 이야기는 이렇고이제 중간 중간 내가 느꼈던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

 

어린 유라가 아픈 안나부인에게 해 준 이야기는 참 특별하게 다가왔다유라가 말하는 는 헤겔이 말하는 였기 때문이다.

 

안나 부인이 돌아가셨을 때 유라는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와는 다른 감정을 느낀다그리고 그 감정을 어머니의 장례식 때 보았던 빨랫줄과 함께 시로 엮고 싶어한다이건 하이데거의 되살아오는 과거좀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유라하고.

 

책 전체가 모두 아름답다단풍잎더러 구부러진 별이라고 하고눈이 쌓인 모습을 눈 이불을 뒤집어 썼다고 하고심지어 이런 표현도 있었다. ‘바위를 녹이고 산을 움직이고 땅을 파 보아도 도무지 어쩔 수가 없다’. 책 끝부분에 실린 지바고의 시도 참 아름답다파스테르나크는 정말 아름다운 글솜씨를 가졌다어떻게 살모사를 은빛으로 반짝이나 땅에 스며들진 않는 물줄기라고 할 수가 있지이 책은 정말 감동적이다.

 

소련사 배울 때 교수님께서 고요한 돈 강닥터 지바고, Reds를 소개해주셨었는데 고요한 돈 강과 Reds는 영화로 봤고 닥터 지바고는 책으로 봤으니 이제 고요한 돈 강을 책으로도 읽고 닥터 지바고를 영화로도 봐야겠다.

 

책에서 탈영병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해 나오는데 카자흐 기병을 동원해야 할까 진지한 논의가 오가는 와중에 (카자흐 기병이라고 나와서 처음엔 카자크인 지 모르고 카자흐스탄 기병인 줄 알았다 -.-;) 신임 장교가 의기양양하게 직접 그들을 설득하겠다고 하다가 뭐 어찌저찌 결국은 그 순진무구함에서 나온 무모한 행동으로 죽고 만다그 죽음도 참 인상적이었는데 그 죽음을 벌인 사람이 줄곧 죄책감에 시달려왔단 것도 참 인상적이었다만나본 적은 없지만 파스테르나크는 그 때 그 혼란스러운 러시아에서사람이 무얼 위해 어떻게까지 할 수 있는가에 놀라게 되는 하루 하루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인간을 좋아했던 게 틀림없다그는 순진한 사람을 좋아했을 것이다.

 

지바고는 푸쉬킨을 좋아한다책 속에 오네긴의 여행이라는 작품의 한 구절이 나오는데 나도 반하고 말았다또 이 다음에 나오는 지바고의 독백도 마음에 든다.

 

 지금 나의 이상은 가정의 주부, 내 가장 큰 소원은 조용한 생활과 그리고 큼직한 한 사발의 배추국.

 

 ‘내가 러시아 문학의 전반에 걸쳐 가장 좋아하는 것은 푸슈킨과 체호프의 러시아적 소박성이다그들은 인류의 궁극의 목적이라든가 그들 자신의 구원 따위는 생각지 않았었다전혀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며이런 것을 입 밖에 낸다는 것은 떠버리의 사치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고골리톨스토이도스토예프스키 등은 끊임없이 삶의 뜻을 찾으며죽음을 준비하여 결론으로 이끌었던 사람들이다그러나 푸쉬킨과 체호프는 생애의 마지막 순간까지 문학자로서의 천직이 그들에게 부과한 그때 그때의 특정한 임무에 몰두했을 따름이다그들은 이런 일을 해가고 있는 과정에서 조용히 살고 있었다이들은 자기 삶과 작품을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적이며 개인적인 것으로 취급해 왔다그런데 이런 것들이 모든 사람의 관심거리가 되어 마치 익기도 전에 따낸 푸른 사과가 저절로 익어가는 것처럼 점점 원숙하여 의미를 깊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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