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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영선 Oct 23. 2021

마음을 글로 적어 전하는 일

나에게 편지를 주고 받는 기쁨을 가르쳐주신 임영록 교감 선생님



 2019년 7월, 선배님 일본 출장 가시는 길에 평소 커뮤니케이션하던 엠넷 재팬 분들께 애송이 일본어로나마 편지를 써서 전했었다. 아무 이유없이, 순전히 그냥 그러고 싶어서였다. 까먹을까봐 손목에다 편지를 그려놓아가며. 처음부터 다 쓰기엔 부족한 실력이라, 한글로 쭉 쓰고 번역기를 돌린 다음에 틀렸거나 어색한 부분을 고쳐쓰는 방식으로 썼다.



 선배님이 여기 분들이 엄청 감동하더라시면서, 이렇게 사무실에다 내 편지를 붙여둔 모습을 찍어보내주셨다. 이것만으로도 나는 무척 기쁘고 감동했는데 ㅡ



 이렇게 정성스러운 답장을 엄청 커다란 정사각형 카드에다 써서, 선배님 편에 보내주시기까지 하셨다. 쫄로리 서서 사진을 찍고 이름 양 옆에 빨간 펜으로 하트를 그려넣었을 모습을 상상하자니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 그리고 몇 달 뒤, 엠넷 재팬 분들이 한국으로 출장을 오셨고 우리는 한정식집에서 맛좋은 식사와 선물을 나누었다.



 먼저 마음을 전하는 일을 주저하지 않는 덕분에 누릴 수 있는 소중한 행복. 이걸 배운 것은 아홉살 때였다.

 이제 막 초등학교 2학년이 된 3월 2일, 교감 선생님이 다른 학교로 전근 가셨단 걸 알게 되었다. 초등학교 1학년 내내, 선생님은 나를 무척이나 예뻐해주셨었는데.


 8년치 인생에서 거의 처음으로 겪는 헤어짐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동안 감사했고, 안녕히 가시라’는 인사를 못한 것이 허망하고 속상했다. 그래서 편지를 쓰기로 마음 먹었다.


 난생 처음 우표를 붙여 멀리 보내는 편지였기 때문에, 정말로 선생님이 이걸 받아보실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기대보다도 더 컸다. 혹시 도움이 될까 하고, 가재가 그려진 주황색 우표를 굳이나 두 장을 붙여선 우체통에 넣었다.


 그 후로는, 어쩐지 홀가분해져 잊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우리집에 내 이름으로 된 소포가 도착했다. 색연필, 사인펜, 형광펜 같은 학용품들과 함께 선생님의 답장이 들어있었다. 단정한 글씨체로, ‘우리 영선이가 나를 잊지 않고 이렇게 편지를 보내주었구나.’하며 앞으로도 부모님 말씀 잘 듣고, 건강히 지내고, 공부 열심히 하라는 당부가 적혀있었다.


 이제는 너무나 오래된 일이라, 교감 선생님의 얼굴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소포의 ’보내는 사람’ 란에 적혀있던 ‘임영록’이란 성함만은 또렷하게 남아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마음을 전하는 일이, 또 편지를 쓰는 일이 내 마음 속에 따뜻한 행복과 덧대어 새겨지게 되었다.


호두 1푼뜨의 기억을 잊지 못하는 드미트리 - 도스토예프스키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어릴 적에 받았던 이 사랑이 나를, 좋은 감정은 언제나 아낌없이 표현하고자 하는 사람으로 또 편지를 즐겨 쓰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드미트리의 양심을 옹호하기 위해 그가 호두 1푼뜨에 대한 감사를 평생 간직해왔음을 말하던 아저씨를 보며 나는 다시금 깨달았다. 어쩌면 드미트리를, 3천 루블에 온 몸과 정신이 휘감긴 채 종횡무진하게 만든 것은 저 호두 1푼뜨일 지도 모른다. 저 호두 1푼뜨의 은혜를 입지만 않았어도, 완전한 망나니로 흥청망청 파멸을 향해 전력 질주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1푼뜨의 호두… 약 410g의 마음 씀씀이… 대수롭지 않아보여도 그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은혜로, 몸과 마음의 중심을 잡는 무게 추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마치 아홉살적 내가 기대하지 못한 답장과 선물을 받고 나는 듯이 기뻤던 일로, 이십년도 넘게 지난 지금도 편지를 쓸 때마다 그 행복한 기억을 나도 몰래 아로새기는 것처럼.


 어린 친구들에게 고마운 호두 1푼뜨를, 진심 어린 답장을 건네줄 수 있는 어른이어야겠다. 나 역시 그런 어른의 은혜를 입고 자라났으니까. 선생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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