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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프레도박 Jan 30. 2018

러빙 빈센트 반 고흐 #32

32화 초록색은  인간의 끔찍한 열정이다.

  19세기와 20세기 초 유럽은 사진 기술이 발명되어 보편화되기 시작하고, 산업혁명과 근대화로 세상이 지금보다 더 급변하는 시대였다. 19세기의 유럽 서민들은 지금 보다도 더 심한 빈부 차이를 겪었다. 하루 종일 일해도 식량조차 제대로 구하기 어려운 시대였다. 대한민국도 19세기 후반부터 일본의 식민지화 야욕이 조금씩 구체화되던 급변의 시대였다. 1905년에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을사조약을 강제하여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한다. 이 조약에는 일본국 정부에서 한국의 외국에 대한 관계 및 사무를 감리, 지휘한다고 쓰여있다. 고종은 이 조약이 강제에 의한 것이라 무효라 주장하기 위해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하지만 실패한다. 고종의 이런 문제 해결 방식을 두고 잘했다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 이 방법은 그냥 생색을 내는 궁여지책이다. 인조가 남한산성에 피해서 싸울까 말까 고민하면서 대신들의 의견을 듣는 상황과 똑같다. 고종은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지 않고 소극적으로 해결하려고 했었던 거 같다. 내가 고종 이였다면 밀사 파견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당시 헤이그에 세계 강국이 모인 이유는 서로 전쟁 일으키지 말고 제국주의를 실현하자는 회의였기 때문이다. 고종은 오히려 국제 상황을 이해하고 국제법을 제대로 공부한 사람을 등용시키고 국제법에 따라 앞으로 생존할 길을 사색했어야 했다. 고종은 세상이 급변하므로 다른 나라의 시각으로 조선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을 인식했어야 한다.


 빈센트 반 고흐는 지금의 제4차 산업혁명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변화 과정을 체험으로 겪은 사람이다. 가장 격렬했던 시대에서 독자적인 예술 철학으로 그림을 그린 화가이다. 고흐의 편지를 읽어보지 않았다면 그는 그냥 19세기 후반 당시의 예술계에서 왕따 당한 화가로 인식하기 쉽다. 그의  적극성은 아래 편지에서 자기를 드러내려면 확실하게 드려내야 한다고 강조한다. 고흐는 소심한 화가가 아니라 미술에 있어서는 자신의 개성을 강조한 화가였다. 고흐는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 자신의 의견을 확실하게 주장하는 사람이었다.

1882년 3월 11일 
“예술이야 말로 투쟁이다. 당신은 전 생애를 예술 안에 던져 넣어야 한다. 중요한 문제는 흑인 무리처럼 일하는 것이다. 조심스럽게 자기를 드러나는 정도라면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편이 좋다”(박홍규, 독학자, 반 고흐가 사랑한 책, 2014).

아래 편지를 보면 하숙비를 독촉하는 하숙집 주인들과 그림으로 방세를 지불하는 담판을 짓는다. 자신의 그림이 가치가 있다는 것을 하숙집 주인들도 인정한 것이다. 그리고 사흘 동안 낮에 조금씩 자며 밤새도록 그려서 확실히 매듭을 짓는다. 빈센트 스스로도 대견한다고 느꼈기 때문에 그 기분으로 편지를 쓴 것 같아. 편지 어투가 자신감이 있어 보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빈센트의 마음이다. 문제에서 비켜서지 않고 자신감으로 맞서는 마음을 가진 것이다.     

1888년 9월 8일 533
돈 때문에 하숙집 주인들이 늘 닦달해서 결국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기로 마음먹게 되었단다. 난 주인(알고 보면 그도 나쁜 사람은 아니야)과 담판을 지었지. 그에게 돈을 너무 많이 지불한 데 대한 대갚음으로 그 너절한 집을 전부 그려 내 돈을 되돌려 받겠다고 말한 거야. 결과적으로 집주인은 몹시 기뻐했고, 내가 이미 그린 적이 있는 우체부와 한밤중의 떠돌이 손님들, 나 자신도 마찬가지였지. 그래서 사흘 동안 낮에 잠을 청하며 밤새도록 그렸단다. 밤이 낮보다 훨씬 더 생기 넘치고 풍부한 색채를 지녔다는 생각을 자주 해. 아무튼 돈을 되돌려 받아 주인에게 그림으로 방세를 지불했지. <중략> 난 붉은색과 초록색으로 인간의 끔찍한 열정을 표현하려고 애썼단다. 방은 핏빛 진홍색과 칙칙한 노란색으로 이루어져 있어. 방 한가운데 녹색 당구대가 놓여 있지. 네 개의 레몬빛 노란 전등이 오렌지색과 녹색빛을 발한단다. 방 안 가득 투쟁이 느껴지며 아주 다양한 녹색이 붉은색과 충돌하고 있어. 이곳에서 자고 있는 건달들의 작은 형상에서, 또 보라색과 푸른색의 처량한 빈 방에서, 예컨대 핏빛 진홍색과 녹황색을 띠는 당구대는 루이 15세 양식의 연한 녹색 계산대 및 거기 놓인 분홍색 꽃다발과 대조를 이루지.  몹시 더운 이 방 한구석에서 바라보는 주인의 흰 옷은 레몬빛 노랑과 빛을 발하는 창백한 녹색을 띠고 있어”
(고흐 빈센트, 빈센트 반 고흐 -A Selftportrait in Art and Letters-, 2007).

IT 개발에서도 문제를 발견하면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마음이 중요하다. 소극적으로 해결하려고 하면 오히려 더 문제가 커진다. 특히 문제를 숨기려는 유혹이 많다. 문제를 숨긴다는 것은 사실을 왜곡해서 인지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문제를 드러내 봐야 말한 사람이 책임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사실 그리고 문제를 숨겨서 그냥 넘어가는 경우도 많다. 그냥 몰랐다고 해도 되겠지만 그게 정신 건강상 좋을 리는 없다. 그리고 문제는 반드시 언젠가 터지지 마련이다. 그 시기가 조금 늦어질 뿐이다. 조금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결국은 고객이든 테스트하는 사람이든 누군가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것은 매우 중요한 진리이다. 이 것에 대한 대표적인 케이스가 2016년 8월에 발생한 삼성 핸드폰 ‘갤럭시 노트7 폭발사고’이다. 이 사건의 근본적인 원인은 배터리가 원인일 것으로 추정만 된 채로 언론의 감시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지금도 해외로 나가는 항공기에서는 문제가 되는 삼성의 핸드폰을 소지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게다가 이 사건은 한국에서 1등으로 대표하는 대기업의 문제 대응 방식이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상징을 갖는다. 1차 대응에서 리콜하기로 결정해서 마무리되는 가 했더니 다시 폭발 문제가 발생되었다. 

2016년 8월 24일에 최초로 보고되고 삼성은 10월 11일에 최종적으로 단종을 결정한다. 폭발 사고 최초 보고 후에 약 47일 만에 단종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렇게 결정한 이유는 언론에서 찬양하는 것처럼 삼성이 대인배였기 때문이 아니다. 그 이유는 동일한 부분에서 폭발 사고가 약 16번에 걸쳐 전 세계적으로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 당시 삼성은 중국에서 생산된 배터리 문제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삼성 말대로 배터리 문제라면 이미 2013년에 발생했던 문제와 유사한 것일 수도 있다. 2013년 삼성 노트1, 2 핸드폰의 배터리가 사용하다 보면 부풀어 오르는 문제가 있었다. 내 개인적인 생각은 1차 대응에서 정확히 문제를 파악하지 못하고 서둘러 배터리 문제로 결론을 내리고 단순한 리콜로만 대응했기 때문이다. 즉 초기에 문제를 대충 덮으려다가 제품의 단종까지 가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단종이란 제조업에서 그 하청업체에 미치는 영향이 엄청난 것이다. 삼성이야 다시 제품을 만들면 되지만 그 하청업체의 손해는 회사의 존립까지 위태로운 것이다.

특히 IT 개발 제품의 품질에 대해서는 고객의 요구와 상충하는 경우가 많다. IT 개발 프로젝트의 성격상 개발하는 것이라 특히 품질상의 요구는 서로 다르게 기대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만들어 본 적이 없는 것을 개발하기 때문이다. 나쁜 고객은 오히려 이점을 이용한다. 명시하지 않고 그냥 그때그때 요청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한국의 IT 개발의 협상 과정은 기술상의 난이도나 비용을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요청하면 된다는 분위기다. 비용이 들어야 품질이 좋아진다는 공식을 잊어버리고 최저 비용으로 최고 품질을 원한다. 공산품 구매하듯이 하는 것이다. 공산품은 말 그대로 대량 생산되므로 안 팔리면 가격을 내려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각 기업에 맞게 수정해서 개발해야 하는 소프트웨어 개발은 그 기업만 쓰는 것이 된다. 가격은 올라갈 수밖에 없다. 고객과 상충되는 품질상의 의견이 있다면 반드시 적극적으로 먼저 타협을 보아야지 그냥 넘겨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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