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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호 Feb 25. 2024

지옥의(?) 부자동실

Feat. 24시간 모자동실


  24시간 모자동실에 대해 적는데 벌써 그때의 기억이 희미해진 것 같다. 그 당시에는, 그리고 애월이가 아직 신생아 시절까지만 해도 평생 잊지 못할 기억일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는 해묵은(벌써 1년은 된 것 같다) 감정만이 남아 있을 뿐 그 시절이 정말 힘들었던가 물음표를 가지고 돌아보게 된다. 사실 그때 애월이는 먹잠먹잠의 무한 반복 아니었던가. 다만 자식 키우기가 처음이라 낯설고 당황스러워서 힘들었던 것 같은데. 그래서 남편에게 물어보니 아니란다. 그래서 남편의 입장에서 24시간 모자동실이 어땠는지 적어 본다.






  남편은 신생아 돌보기 수업에 따라다닐 만큼 적극적이었다. 워낙 아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어서(그래서 처음 만난 자리에서부터 아이는 셋을 낳고 싶다고 했다) 잘 키우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수많은 육아 관련 유튜브를 보며 유용한 자료는 같이 공유해서 보고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24시간 모자동실 브이로그를 보며 스스로가 잘할 수 있을지 불안감을 내비치긴 했지만 나와 마찬가지로 깊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바구니 카트에 담겨온 애월이를 보며 얼떨떨했다고 그는 말했다. 일단 수술이 응급이어서 경황도 없었지만, 내가 수술실에 들어가고 나서 10분 만에 아기가 태어났다고 보여주는데 정말 내 애가 맞나 싶었다고 한다(그때는 12월 말이었고 그 시간대에 수술실에는 나 말고 다른 산모는 없었으니 확실하다). 아무튼간에 아기를 처음 보고 사진도 찍고 영상도 찍긴 했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고. 수술실에서 나와 회복실에 누워 있는 나를 보고서야 눈물이 핑 돌았다고 했다.



  병실에 와서는 애월이가 분유를 먹어야 하는데 입을 벌리지 않아 당황스러웠단다. 어떻게 해봐도 입을 벌리지 않고, 겨우 벌려서 젖병을 물렸어도 (자느라고) 빨지를 않아서 혹시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닌가 걱정에 걱정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고 한다. 그 와중에 나는 움직일 수 없으니 나에게 도움을 받기는커녕 도움을 주어야 해서(?) 케어를 이중으로 해야 하질 않나. 애는 울고 도움을 받을 만한 구석은 없고, 오롯이 그 혼자 모든 것을 감당해야 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만 하루 동안 먹고자 하는 욕구를 잃어버렸다.



그가 책임지고 돌보아야 했던 인간 둘



  제일 힘들었던 건 까닭 없이(아마 그때는 아기에 대해 하나도 몰랐기 때문에) 밤중에 애월이가 일어나 울던 것. 그리고 태변을 본 것이었다고 한다. 달래도 달래지지 않고, 옆 병실에도 1월까지 버티지 못한(?) 산모들이 하나둘 차는데 민폐가 되지 않을까 황망했을 것이다. 분유를 받아와서 겨우 먹이는데 아주 조금 먹고 다시 잠들기를 반복하니 남편은 애월이가 이것 먹고는 안 된다 싶어 발을 동동 굴렸다. 그 정도 먹으면 많이 먹는 것이라고 계속 알려줘도 들리지 않았던 것 같다.



  태변이 검은색이라는 건 남편도 산전에 배워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잘 안 닦인다는 것은 우리 둘 다 몰랐다. 끈적끈적하다고 해야 할까. 물티슈로 닦아도 잘 닦이지 않는다. 그 와중에 차갑다고 아기는 자지러지게 울고(물티슈로 닦아서 아픈가 싶을 만큼) 그 울음을 들으면 등줄기에 땀이 솟는다. 가만히 누워서 마음 편히 요양을 할 수가 없다. 고개를 돌려 옆으로 본 남편의 얼굴은, 손으로는 열심히 닦고 있지만 패닉 상태에 빠져 있었다. 남편은 한동안 애월이가 태변을 볼 때마다 무서웠다고 했다. (그런데 어찌나 자주 보던지.)



  하지만 입원 4일 차가 되면서부터 그는 애월이의 울음에 저항력을 갖추었고 어느새 트림 장인이 되어 있었다. 애월이가 응가를 하면 잘 쌌다고 기뻐하며 화장실로 데려가 능숙하게 엉덩이를 씻겼다. 신생아실에 분유를 하도 타러 가서 눈치 보인다고 했는데 그것도 내려놓은 것 같았다. 잠을 잘 못 자는 것은 여전했지만 우리는 애월이를 재워놓고(이때는 재울 것도 없다) 텔레비전을 보며 근처 햄버거 맛집에서 사 온 수제 햄버거로 육퇴의 기쁨을 누릴 만큼 성장해 있었다.






  24시간 모자동실한 것은 후회되지 않는다. 그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나도 남편도 엄마와 아빠로 변할 수 있었다. 처음엔 애월이에게 안전기지로써의 부모가 되기 위해 24시간 모자동실을 선택한 것이었지만 그 결정은 실제로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었던 것 같다. 더 나은 부모가 되어 주려고, 아기와 함께 있으면서 아기를 계속해서 관찰하고 하루라도 더 빨리 알아가기 위해 했던 우리의 선택. 당시엔 너무 힘들었지만 지나고 다시 돌이켜 보니 이만한 일이 없다. 곱씹을수록 잘했다 싶다.



  특히 모자동실을 하는 만 3일 반 동안 남편이 한 아이의 아빠라는 정체성을 확고히 하게 된 것 같다. 함께 고군분투하면서 그는 양육자로서 역할을 해내야만 했고 결과적으로 해냈다. 전통적으로(그리고 현재 부분적으로도) 엄마의 영역으로 여겨지는 육아에 그는 당당히 걸어 들어왔고 그럴 자격을 충분히 갖추었다. 그는 요즘 자식이 유산균을 안 먹어도 1일 1응가를 하게 만들 정도로 전문 육아꾼(?)이 다 되었다. 모자동실은 엄마만이 아니라 아빠를 아빠답게 만드는 행복의 시작인 것 같다.



24시간 모자동실이란
육아라는 전쟁을 수행하기에 앞서
길이 없던 곳에 길을 만드는 것


24. 0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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