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에서 시작한 산후조리
12월 30일은 퇴원하는 날이었다. 퇴원 전에 대사이상 검사를 한다고 해서 신생아실에서 애월이를 새벽부터 데려갔다. 바구니 카트가 작게 덜컹거리며 병실의 문지방을 빠져나갈 때 마음이 뒤숭숭했다. 검사하는 곁에서 놀라지 않게, 놀라더라도 꼭 안아서 달래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렇게 애월이를 신생아실 선생님 편에 보내고 나니 잠이 오지 않았다. 신생아실에서 다른 친구들 울음소리에 저도 울지는 않을지, 엄마가 어딨냐고 찾지는 않을지 마음이 울적해졌다. 그렇다고 쫓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니 샤워나 하자 싶었다.
퇴원하기가 긴장되었다. 퇴원 그 자체보다 그 뒤에 있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육아가 두려웠다. 대부분 많은 산모들이 퇴원 후 산후조리원에 가는데 나는 친정에서 하는 산후조리를 선택했다. 조리원이란 곳이 24시간 모자동실을 지원하지 않아서 가기도 싫었거니와 몇 주 머물면서 꼬박꼬박 차려 주는 세끼 밥 먹는 데 적게는 300만 원, 많게는 500만 원까지 돈을 지불해야 한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낭비로 느껴졌다. 마침 엄마가 산후조리를 도와주겠다 해서 퇴원 후 친정으로 가게 되었다.
엄마는 딸인 나에게 산후조리를 꼭 해주고 싶다 했다. 둘째는 모르겠지만 첫째를 낳았을 때만큼은 반드시. 엄마는 자신이 자식을 낳았을 때를 기억하고 있었다. 퇴원 후 부은 몸으로 집에 돌아와 육아를 하는데 아빠는 할머니의 부름으로 시골에 내려가서 없고, 집에 돈도 반찬도 없어서 쫄쫄 굶다시피 살았다던 그때를. 아무것도 모르고 누구 하나 도와줄 이 없는 낯선 서울에서 혼자 아기를 키워야 했던, 그래서 더럭 무서움이 끼치더라는 37년 전 일을. 그래서 엄마는 나에게 집으로 들어오라고 더 힘주어 말했다.
샤워 후 짐 정리를 얼추 하고 병원에서의 마지막 아침밥을 먹었다. 나머지는 내가 소독을 받고 퇴원 수속을 밟고 오는 동안 남편이 마무리해 놓기로 했다. 아직 아랫배는 묵직하고 불편해서 걷기에 그리 좋은 상태가 아니었다. 배는 다 들어가지 않아 7개월 즈음의 크기였다. 그래도 은근하게 긴장감이 올라서 그런지 그 반작용으로 오히려 씩씩하게 굴었다. 퇴원 수속을 빠르게 밟고 병실로 다시 올라오니 창 밖으로 알 굵은 함박눈이 시야를 가릴 만큼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몇 분 지나지 않아서 세상이 온통 하얀 눈 천지가 되었다.
비였을 것이 어떻게 이렇게 씨알 굵은 눈이 되었을까, 이미 알고 있는 궁금증에 눈이 반갑기도 했지만 차를 어떻게 끌고, 게다가 애월이까지 카시트에 태워서 조심히 친정까지 갈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폭설에 가는 길도 걱정, 도착해서 (부모님 두 분 다 출근하고 안 계셨다) 애월이를 보는 것도 막막. 나는 어떤 일이든 딱 시작되기 직전까지(만) 몹시 초조해하는 편이다. 마른침을 삼켰다. 속이 얹힌 것처럼 답답했다. 치운 짐으로 비어버린 병실, 막막함 속으로 가라앉아 우리 부부는 침대에서 한동안 나란히 앉아 껴안고만 있었다.
신생아실에서 애월이를 픽업하고 카시트에 앉혀 차에 태우는 모든 과정 역시 처음 애월이를 케어하던 그날처럼 허둥지둥했다. 카시트에 제대로 태우는 법을 연습했었건만 허사였다. 우리는 당황하면서 신생아실 선생님이 겉싸개 해준 그대로 애월이를 카시트에 고정시키고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내 머릿속에는 「애월이, 황달, 황달, 황달」만이 고장 난 카세트테이프처럼 무한반복되었고 긴장감으로 몸이 달아올라서 추운 줄도 몰랐다. 남편 머릿속에는 무엇이 떠다녔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도 나와 마찬가지로 긴장감에 사로잡혔으리라.
눈이 쌓이는 도로 위로 우리의 오래된 엠마는(03년식 28만 킬로미터의 아반떼) 부드럽게 나아갔다. 옆차를 보니 지붕 위로 눈이 손가락 두 마디만큼이나 쌓여 있었다. 그만큼 폭설이었다. 와이퍼가 쉬지 않고 움직여야만 했다. 내 손은 카시트를 단단히 붙잡았다. 사고라도 나면 뒷좌석 가운데에 안전벨트도 매지 않고 탄 내가 제일 위험할 텐데 그런 두려움은 고려 대상조차 못 됐다. 다행히 병원에서 친정까지는 거리가 가까워 얼마 걸리지 않았다. 우리는 애월이를 무사히 내려 친정집으로 들어갔고 긴장감은 일단락되었다.
물론 그때부터가 본격적인 육아의 시작이었지만 말이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한 달 정도만 머물려고 했던 계획을 바꿔 세 달간 친정에서 산후조리를 하고 있다. 남편도 처가살이에 적응했고 나도 수월하진 않았지만 완전히 엄마로 모드를 전환할 수 있었다. 부모님은 자식들 다 출가시키고 두 분이서 적막하게 살다가 애월이가 오니 봄 같이 싱그러운 모양이다. 「더 머물다 가라」 「완전히 따뜻해지면 가라」 「가더라도 힘들면 다시 짐 싸서(?) 와라」 애월이가 떠날 것을 섭섭해하는 부모님 마음에 나도 덩달아 친정을 떠나는 게 섭섭해진다.
산후조리원에는 안 가봤으니 그것의 좋고 나쁨과 관련해서는 할 말이 없다. 친정에서 산후조리를 하면 다른 건 다 좋은데 친정 부모님과 육아 방식을 놓고 충돌할 수 있다. 나도 엄마와 육아에 대해서 충돌했을 때는 당장 짐 싸들고 애월이와 함께 우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극복하고 나니 친정집에 세 달 말고 늦봄까지, 있을 수 있을 만큼 더 있고 싶다. 양육자가 엄마인 나 말고도 세 명이나 되기 때문에 육아가 정말 수월하기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는 건 다 그 덕분이다.
산후우울감을 자연스럽게 통과할 수 있는 것도 나에겐 장점이었다. 출산하면서 한 가지 걱정은 우울이었는데, 일전에 겪은 우울로 나의 마음은 만성적으로 취약했다. 우울은 신경절에 잠복해 있다가 면역력이 저하되면 발현하는 헤르페스 1형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한번 침투하면 늘 마음 속에 잠복해 있다. 그래서 호르몬 때문에 초래될 산후우울감이 우울증으로 발전하지 않을지 두려웠다. 하지만 매일 수다를 떨 가족들과 함께 한다는 것은, 통과해야만 하는 어두운 터널에 꺼지지 않는 손전등을 들고 들어가는 것과 같다.
우리는 3월 하순에 집에 돌아가기로 했다. 남편이 미뤄왔던 출산 휴가를 써야 하기도 하고, 그 사이에 시부모님이 애월이를 보기 위해 부산에서 올라오시기로 한 것도 있다. 너무 잘 먹는 게 단점이었던 친정에서의 산후조리를 끝마쳤으니 드디어 다이어트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곧 편안했던 둥지를 떠나 우리 부부만의 힘으로 육아를 시작해야 한다.
24. 03. 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