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짝 놀랐잖아
애월이는 배밀이를 안 했다. 기지도 않았다. 다른 아이들이 배밀이를 마스터하고, 기다 못해 침대를 잡고 일어서더라는 이야기들을 볼 때쯤에도 애월이는 길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뒤집기와 되집기는 하늘의 명령이라도 받은 것처럼 하더니, 기는 건 명령 수신이 안 되는 건지 애월이가 무시를 하는 건지 아무튼 때가 돼도 안 했다.
병원에서도 말끝을 흐렸다. 「애바애긴 한데요. 그래도 배밀이는 좀 시키셔야」 나도 남편도 초조했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200일이 넘도록, 250일이 넘도록 애월이는 기지 않았다. 배밀이 연습을 시켜주어도 효과가 없었다. 애월이는 엄마가 안 보이면 (움직일 생각은 않고) 악을 쓰며 우는 걸로 (8개월 엄마 껌딱지 시절의 절정) 엄마가 오게끔 했다.
혼자 앉지는 못했어도 앉혀 놓으면 잘 앉아 있을 수 있었다. 「내가 뭔가를 잘못 가르쳤나」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마음에 아지랑이가 되어 피어났다. 「혼자 앉게 시켰어야 했는데」 「어딘가 부족하게 키웠어야 했는데 혹시 다 들어줬나(?)」 아지랑이의 열기는 곧 시야를 흐릿하게 만들었다. 여기다 어딘지 알 수 없는, 방향 감각과 거리감을 잃은 듯한 혼란스러움.
애월이의 나머지 발달 사항은 제법 양호한 편이었다. 소근육 발달이 빨랐고 인지, 사회성에도 문제가 없었다. 대근육 발달이 (좀 많이) 느렸을 뿐. 터미타임을 생후 5일부터 시킨 게 잘못이기라도 했을까. 뒤집기와 되집기는 제때에 했는데 왜 배밀이는 하지 않는 걸까. 애월이가 무수히 기어 다니면서 이 작은 집을 한껏 어지럽혀 주기를 간절히 바랄 정도였다.
배밀이를 늦게 하는 아기는 대체적으로 빨리 걷더라는 다른 엄마들의 경험칙에 희망을 걸고 있었다. 하지만 270일이 넘어도 길 생각이 없어 보여서, 그때쯤 되니 내려놓고 받아들였던 것 같다. 「우리 애는 대근육 발달이 상대적으로 느리구나」 인정이랄까, 인정도 아니지. 기대를 내려놓았다. 뭐가 문제인지 고민도 걱정도 일절 안 하게 됐다.
그리고 애월이는 드디어 그쯤부터 기기 시작했다(기대감이 문제였나? 걱정이 문제였나?). 274일이 되었을 때 조금 기기 시작했다는 덤덤한 기록이 있다. 280일이 넘어가자 애월이는 집 안 곳곳을 탐험하기 시작했다. 드럼 세탁기를 구경하러 베란다도 가봐야 했고, 매일 목욕을 하는 화장실도 들어가 봐야 했다. 이제는 울어서 엄빠를 찾지 않고, 불빛이 밝은 곳을 향해 방에서 기어 나왔다.
그 이후로는 며칠 만에 배밀이를 마스터하더니 (집을 어질러 주어서 행복하다) 299일에는 혼자 앉기 성공. 300일인 오늘은 침대를 잡고 혼자 힘으로 섰다. 네 발 기기도 시작했다. 놀라웠다. 이 모든 걸 이렇게 빠른 시간에 해내다니. 봇물 터지듯, 하나를 달성하고 나서 줄줄이 굴비 엮듯이 하고 있다. 익숙해지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생후 9개월은 기적의 연속인 달이었다. 드디어 (1차) 엄마 껌딱지가 끝났으며, 밥태기를 극복하고 넘치는 호기심 때문에 집을 나간 식욕이 돌아온 것 같고(확인해 봐야 하지만 찰나의 기쁨은 빠짐없이 누리고 싶다), 고통의 가시밭길이었던 험난한 이유식 과도기가 끝나고 새로운 안정기에 정착했다. 아아, 안녕 9개월. 너무 좋았어.
24. 10.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