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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 Dec 08. 2020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지 않을까요?

높아지는 도덕의 기준

아침에 먹다 남은 블루베리에 먼지가 들어가지 않도록 그릇 위로 비닐 랩을 씌우다가 문득 떠올랐다. 어제 아침에 먹다 남은 견과류 위로도 비닐 랩을 씌웠고, 그저께 먹다 남은 방울 토마토 위로도 비닐 랩을 씌웠다는 걸. 남은 음식은 점심에 소비되었고, 비닐 랩은 쓰레기통 속으로 버려졌다. 내일은 먹다 남은 포도 위로, 내일 모레에는 먹다 남은 달걀 위로 비닐 랩이 씌워질까?


애초에 음식이 남겨지지 않도록 양을 줄이자, 고 생각하였으나 하루 이틀이 지나자 나는 다시 그릇에 비닐 랩을 씌우고 있었다. 그래서 구입했다. 비즈왁스 랩.

처음이라 어떨지 몰라서 아마존에서 제일 저렴한 브랜드로 구입했다. 제품 설명엔 유기농 면에 천연 밀랍, 호호바 오일, 나뭇진을 도포하여 제작했다고 쓰여 있다. 손의 온기가 닿으면 끈적끈적 부드러워지면서 그릇이나 음식을 어떤 형태로든 감쌀 수 있다.


이렇게 그릇도 감싸고


남은 배추도 감싼다.


끈기가 있으므로 풀어지지 않으며, 온도가 내려갈수록 끈적함은 사라지고 단단히 형태가 고정된다. 사용 후엔 차가운 물과 (필요한 경우) 중성 세제로 살살 씻어 주면 된다

.

오랜 시간이 흐르면 비닐 랩은 우리 생활에서 퇴출되고 비즈왁스나 실리콘 랩이 표준이 되리라는 상상을 한다. 80년대 사람들이 고기 구이판으로도 쓰던 석면 슬레이트가 뒤늦게  발암물질로 분류되어 퇴출되고 있듯이. 학교에서 촌지가 퇴출되고 체벌이 퇴출되고 있듯이. 농담 따먹기처럼 하던 말과 행동이 성희롱, 성추행이 되어 퇴출되고 있듯이.


오랜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된 딸아이가 내게 묻는 상상을 한다.

“엄마, 예전에 비닐 랩 썼지? 그럼 바다에 가득한 저 비닐 중에 엄마가 버린 비닐도 있겠네?”

“엄마, 나를 데리고 왜 그리 이사를 다녔어? 아이한텐 정서적 안정이 중요한 거 몰라?”

“엄마, 왜 나를 이민자로 키웠어? 어디에서도 소속감을 느낄 수가 없잖아!”




아버지는 술에 취하면 내 방 침대 위에서 벽에 기대 앉은 채로 나를 가만히 쳐다보셨다. 내가 숙제를 하고 일기를 쓰는 내내 삼십 분이고 한 시간이고 시뻘겋게 충혈된 눈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그대로 잠이 드셨다. 나는 술 취한 아버지가 풍기는 냄새와 시선이 몹시도 불쾌했지만 절대로 표현할 수 없었다. 자식을 불쾌하게 하든 말든 아버지의 모든 행동은 ‘애정'으로 포장되었고, 그 애정을 거부하는 자식의 언행은 처벌 받아 마땅했다.


그래도 참는 데엔 한계가 있다. 태어나 10년 넘게 참았어도 싫은 건 싫은 거다. 초등학교 5학년이던 어느 날, 아버지는 여느 때처럼 잔뜩 취해 내 침대에 앉으셨다. 그런데 이번엔 냄새와 시선만 거슬리는 게 아니라 숨소리가 어찌나 거치시던지, 킁킁거리는 소리를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께 말했다.

“아빠, 좀 조용히 해 봐.”

“뭘 조용히 해?”

“아빠가 너무 시끄러워.”

“가만히 있는데 뭐가 시끄러워?”

“아빠 숨소리가 시끄러워.”

곧바로 별별 욕을 다 들었다. 당장 몇 대 맞을 줄 알았는데 욕만 들어 다행이었다. 아버지는 욕이 끝나고도 그 자리에 눕듯이 앉은 채로 나를 한참 쳐다보다가 잠이 드셨다. 나는 숙제와 일기를 마치고 다음 날 필요한 준비물을 모두 챙긴 뒤 안방 침대에 누웠다. 안방은 비어 있었다. 어머니는 술 취한 아버지를 일절 무시하고 아무 일도 없는 듯 거실에서 내내 TV를 보고 계셨다. 나는 안방 침대에 벽을 보고 누웠다. 속으로는 분노가 끓고 있을 어머니와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가 안방으로 들어오셨다. 나는 벽을 향한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씨"하는 어머니의 목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나를 내리쳤다.

“뭐? 지 아빠 숨소리가 시끄러워? 쓰잘데기 없는 년! 천하에 도움 안 되는 년!”

어머니는 베개로 나를 내리치고 있었다. 어머니의 화풀이가 끝날 때까지 나는 벽을 보고 배게의 타격을 그대로 느끼며 자는 척을 했다. 아버지께 그런 말을 한 내 잘못이라고 믿으면서.


술을 마시고 내 방 침대에서 잠드신 아버지는 그 자리에 그대로 구토를 하기도 하셨고, 거실에서 주무시다가 이불에 소변을 누기도 하셨다. 다음 날 숙취 때문에 제 때 기상하지 못하여 학교에 지각하기도 하셨고, 어떤 날은 아예 연가를 쓰고 수업을 빼기도 하셨다. 일상에 지장이 있음에도 금주할 생각이 없으셔서 친구분과의 가족 모임에서조차 언제나 제일 많이 취하셨고, 모임이 끝나면 나와 어머니를 태우고 음주운전을 하여 귀가하셨다. 아버지의 친구분들 앞에서 상냥하시던 어머니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내게 신경질을 폭발시키셨다. 반평생이 되어 가도록 본인 버릇온 못 고치신 두 분께서 ‘요즘 애들' 버릇을 운운하며 교사로서 돈을 버셨다. 교내 체벌이 금지된 후까지도 아이들에게 몽둥이를 휘두르시면서.


90년대에 내가 살던 가정의 일상을 적었을 뿐인데 범죄가 난무한다. 아동에 대한 신체적 학대, 정서적 학대, 언어적 학대, 근무 태만, 음주 운전… 그 시절 나는 그곳에서 범죄가 저질러지고 있는 줄도 몰랐다. 알았더라도 아마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을 거다. 같이 사는 어른들이 범죄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을 테니. 오히려 그들더러 범죄자라 칭하는 내가 패륜아로 몰렸겠지. 만취하여 이불에 오줌을 누고 일터에 결근하는 부모도, 가족을 태우고 음주운전하는 부모도, 배우자의 폭력에 자식 탓을 하는 부모도, 하늘 같은 은혜를 주장하며 권위를 내세웠다. 캐나다의 심리학자 스티븐 핑커(Steven Pinker)는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The Better Angels of Our Nature)>에서 과거의 잔혹성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과거가 낯선 나라라면, 충격적이리만치 폭력적인 나라인 셈이다. 우리는 과거의 삶이 얼마나 위험했는지를, 과거의 일상에 잔학성이 얼마나 깊숙이 구석구석 엮여 있었는지를 곧잘 잊는다. 문화의 기억은 과거를 평화롭게 미화하여, 피투성이였던 원래 모습이 탈색되어 창백해진 기념품만을 우리에게 남긴다."


부모님은 과거를 평화롭게 미화한 지 오래셔서 범죄 사실을 기억조차 못하신다.

“네 기억은 틀렸어. 난 그런 적이 없다.”

“그랬다 해도 이제 와서 어쩌라는 거냐?”

“그땐 다 그랬어. 시절이 어쩔 수 없었다고!”

“어디서 부모한테 말을 함부로 해!”

“옛날 일을 뭐하러 기억하니?”

피해자더러 피해 사실을 왜 기억하느냐고 따지는 가해자라니. 부모님께서는 적당한 훈육, 적당한 반목을 하며 때때로 적당한 유흥과 적당한 나태를 즐겼을 뿐인데 자식이 너무하다고 여기고 계신다. 당신들 시대엔 어른을 공경할 줄 알았는데 요즘 사람은 역시 싸가지가 없다고 혀를 끌끌 차고 계실지도.


그렇다면 오판이다. 도덕의 기준은 오히려 높아지고 있다. 요즘 사람의 싸가지가 너무한 게 아니라, 연장자에게 무조건 고개 숙이던 과거의 묵인이 너무했다. 묵인이 늘어날수록 무개념의 어른도 늘어났다. 나이 많다고 아무 말이나 지껄이고도 잘못인 줄 모르는 어른들에게 사람들은 질려버렸다. 고압적인 어른을 단지 어른이라는 이유로 공경해주면 그들이 성찰 없이 내세우는 권위로 2차, 3차 피해자가 생기고, 2차, 3차 피해자가 생기도록 묵인하는 일은 부도덕임을 뒤늦게나마 체득했다. 어른 공경이 줄어든 이유는 도덕적으로 타락해서가 아니라 도덕적으로 엄격해졌기 때문이다. 어른 공경도 공경할 만한 사람을 공경해야 선()이다.




어쩌면 나 역시 나도 모르게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지 모른다. 춥다고 더운 샤워를 하며 한참 동안 물을 낭비하는 일, 장바구니를 깜빡하여 비닐봉지를 구입해 사용하는 일,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서 번역하며 전기를 소모하는 일, 친환경 자동차로 재빨리 전환하지 않은 일, 아이 앞에서 매번 스마트폰으로 이메일을 확인하는 일, 아이의 이야기를 듣다 말고 동료의 메시지에 정신을 빼앗기는 일, 자꾸만 아이를 데리고 이사 다니는 일, 앞으로 인생에 생길 여러 문제에 대한 미숙한 대처…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던 일들로 언젠가 지탄 받을지도 모른다.


나는 완벽한 인간이 아니니까. 평범한 인간은 자기 시대에서 벗어나지 못하니까. 미래의 도덕 기준을 예측할 수 없으니까. 다만, 나의 부도덕이 드러났을 때에 어떻게 대응하느냐는 선택할 수 있다.

 

잘못을 겸허하게 인정하기,

상처 입은 피해자에게 사과하기,

어쩔 수 없는 줄 알았던 일이 때론 어쩔 수 있기도 함을 인식하기,


‘어쩌면 어쩔 수 있지 않을까?’ 지금부터라도 두 번, 세 번 생각하며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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