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즈인더트랩>으로 소환된 기억
*스포 없습니다.
벌써 17년 전, 대학 입학을 앞두고 부모님은 S사에서 제일 비싼 노트북을 사주셨다. 나는 원하지도 않았는데 아버지가 대리점 직원에게 "제일 좋은 걸로 달라"하여 구입하신 노트북이었다. 당시로서는 특이하게 DVD 플레이어가 장착되어 있었고, 휴대용 USB 메모리 스틱이 함께 제공되었다. 메모리 스틱은 디스켓 대신 쓰는 저장매체라고 직원으로부터 설명을 들었지만 훗날 널리 보편화될 물건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K대 입학 동기 중에는 다른 대학을 몇 년 다니다가 수능을 다시 쳐서 들어온 L오빠가 있었다. 나는 L오빠라 불렀으나 나이가 많아서 'L옹' 또는 그냥 '옹'이라 불리기도 했다. 학기 초반, L오빠는 나와 대화를 하던 중 내게 노트북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이렇게 조언했다.
"너 그거 다른 애들한테 말하지마. 애들이 자꾸 빌려달라고 할 거거든."
연필이나 지우개도 아니고 컴퓨터를 왜 빌려가나, 나는 속으로만 의아해하고 묻지 않았다. '나는 노트북이 있다!'라고 떠들어댈 것도 아니므로 어차피 애들에게 말할 일도 없었다.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다채로운 신입생 사이에서 혼란 반, 재미 반의 시간을 보내고 중간고사 시즌이 되었다. 여러 강의에서 중간고사를 프레젠테이션으로 대체했는데 그 중 하나가 1학년 필수과목인 '실용영어'였다. 나는 절친 M양과 한 팀이 되어 '모나리자의 진품 논란'에 대해 발표하기로 아이디어를 구상했는데, 주제가 주제이니만큼 선명한 시각 자료가 필요했다. 교수님께서 파워포인트를 언급하시긴 했지만 사용법을 제대로 몰라 끄적이다가 가르쳐줄 사람을 수소문했다(요즘이면 유튜브 영상 한 편으로 해결될 일인데...).
다행히 L오빠가 파워포인트를 할 줄 안다고, 가르쳐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교내 컴퓨터실에서 만나 파워포인트프로그램을 열고 눈으로 직접 보며 배웠다. 글자를 입력하고 그림을 삽입하고 크기를 조정하고, 발표할 땐 전체 화면으로 한 장씩 넘기고... 직접 시범을 보니 어렵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모나리자 발표에 사용할 슬라이드를 전부 만들었는데, 그렇게 혼자 완성했더니 M양은 자꾸 미안하다, 고맙다 했다.
발표 당일, 나는 PPT 파일이 든 내 노트북을 들고 학교에 갔고 M양과 함께 발표를 했다. 내 말이 너무 길어져 제한 시간 초과로 1점 감점이 되긴 했지만 어쨌든 프레젠테이션은 큰 탈 없이 마무리되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이후 발표가 예정된 동기들이 줄줄이 내게 노트북을 빌려 달라고 했다. 내가 빌려주지 않으면 문과대학 학사지원부에서 노트북을 대여해야 하는데, 물량이 부족해서 이미 대기 명단이 꽉 찼다는 거다. '그럼 내게 노트북이 없었다면 너흰 어쩔 작정이었냐'고 나는 따져 묻지 않았다. 그저 그날 밤 MSN 메신저로 다음 팀의 PPT 파일을 전송 받아 노트북에 저장하고 익일 아침 다시 노트북을 들고 학교에 갔다. 그리고 그 팀은 무사히 발표를 마쳤다. 실용영어는 하루에 두세 팀이 발표했으므로 아직 다른 팀이 남아 있었는데, 남은 팀 아이들이 불현듯 그 자리에서 내 노트북을 쓰겠다고 했다. 내 노트북은 아직 교탁 위에 떡하니 입을 벌린 채 놓여 있었으므로 그러라고, 쓰라고 했다. 그러자 그 팀이 디스켓을 들고 나왔다. 내 노트북에는 디스켓이 들어가지 않는데... 당시엔 와이파이는 물론 강의실에 개별 랜선도 없었고, 메모리 스틱도 보편화되지 않아 내 노트북으로 프레젠테이션을 하려면 전날 밤 미리 내게 파일을 전송해놓아야 했다. 하지만 그 팀은 내게 노트북을 사용하겠다고 미리 허락을 구하지 않았으므로 파일을 미리 전송해야 한다는 사실도 몰랐다.
디스켓을 사용하지 못하여 그 팀은 시각 자료 없이 발표를 했다. 이후로 나는 중간고사가 끝나고 나서까지 동기들이 요청할 때마다 노트북을 들고 학교에 갔다. 얇디 얇은 요즘 노트북도 오래 들면 무겁던데, 당시의 노트북은 벽돌 세 장을 붙여놓은 느낌이었다. 신당동 외가집에 살던 나는 벽돌 세 장 무게를 어깨에 지고 외가집 아래 길고 긴 언덕을 20분 동안 내려와 2호선 신당역 입구로 들어갔다. 그리고 6호선으로 향하는 환승구간을 5분 동안 걸었다. 6호선 열차가 도착하면 안암역까지 8분 동안 서 있었고, 안암역에서 내리면 벽돌 세 장과 함께 정대 후문 오르막길을 걷거나 (지각 시에) 뛰었다. 날이 더워질수록 나는 아침부터 땀 범벅이었다.
그 과정에서 별별 경우를 다 겪었다. E양이 PPT 파일을 전송해주기로 하여 한밤 중 메신저에 접속했더니,
"Jin... 나 파워포인트 아무리 봐도 못하겠어. 넌 할 줄 안다고 하던데... 대신 만들어줄 수 있어?"
E양의 발표는 바로 다음 날 아침이었다. 나는 후다닥 PPT를 완성했고, E양은 내가 만든 PPT와 내가 가져온 노트북으로 무사히 발표를 마쳤다. 그러기까지 E양이 과할 정도로 미안해하고 고마워해서 오히려 재미있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한 번은 벽돌 세 장 노트북을 들고 캠퍼스를 다니다가 내가 너무 힘들어했다(당시 사물함도 없었다. 2학년 때부터 사물함이 배정되긴 했지만 그 사물함에도 벽돌 세 장 노트북은 시도해볼 필요도 없이 들어가지 않았을 거다). 그러자 절친 H양이 그날 내 노트북을 사용한 K군에게 말했다.
"야, 너 때문에 Jin이 노트북 가져왔는데 네가 좀 들어줘야 하는 거 아니니?"
그러자 K군은 이렇게 반문했다.
"내가 가져오라고 한 거 아닌데?"
맞다. K군이 가져오라고 한 건 아니었다. D군이 먼저 내 노트북을 예약했고, 그 사실을 안 K군이 자신도 같은 날 발표라며 일방적으로 내게 PPT 파일을 보내온 거였다. 그러니 엄밀히 따지면 K군이 가져오라고 한 건 아니다. K군의 논리에 H양은 짜증이 나서 버럭했다.
"어쨌든 너도 노트북 썼잖아!"
그래서 K군은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채 잠시간 내 노트북을 들어주었다. K군은 그래도 파일이라도 내게 미리 보냈지, 말도 없이 디스켓만 가져와서는 내 노트북을 쓰려는 동기들이 여전히 있었다. 그렇게 발표를 망치는 동기가 하나둘 늘자 L오빠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컴퓨터에 디스켓이 안 들어가면 어떡해? 디스켓용 외장 드라이브라도 하나 사. 하나 사라고. 앞으로 네 노트북 쓸 애들이 한둘이 아닐 텐데."
나는 귀가 의심스럽고 말문이 막혔다. 동기들이 자꾸 빌려달라고 할 테니 노트북 있다는 얘기는 하지도 말라던 L오빠가 이제는 내게 동기들을 위해 외장 드라이브를 사비로 구입하란다. 뭐지? 저 오빠가 지금 뭐라는 거지? 내가 제대로 들은 거 맞나?
그런 일들이 있자 M양과 H양을 비롯한 절친들은 내게 더 이상 동기들에게 노트북을 빌려주지 말라고 하였다. 솔선수범이라도 하듯 절친들은 내 노트북을 다시 쓰지 않았고, 나 역시 벽돌 세 장을 들고 다니기에 질려서 모든 발표를 PPT 대신 OHP 필름으로 처리했다. 절친에게도 빌려주지 않고, 나를 위해서도 들고 다니지 않는 노트북을 다른 동기들에게 빌려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거절을 했다. 거절을 하면서도 별별 경우를 다 겪었다. 거절하는 순간 대답도 없이 전화를 끊어버린 동기도 있었고, '동기 좋다는 게 뭐냐'며 설득을 시도하는 동기도 있었다.
웹툰 <치즈인더트랩>이나 동명의 넷플릭스 시리즈의 캐릭터 '김상철'을 보면 17년 전 내 노트북이 생각난다. 열아홉 해의 짧은 생애 중 내게 대학 1학년은 인간이란 종족에 가장 크게 실망한 해였다. 빌려갈 때의 태도와 빌린 후의 태도가 다르고, 부탁할 때의 태도와 거절 당할 때의 태도가 다른 치졸한 이중성은 부패한 어른들한테나 있는 줄 알았는데 아직 고등학생 티도 못 벗은 내 또래들이 그대로 하고 있었다. 어설픈 집단주의와 어설픈 개인주의가 혼재된 대학 신입생의 세계는 동물의 왕국 같았다. 노트북이 없었더라면 대학 생활이 좀 덜 실망스러웠을까? 한때는 궁금했으나 이젠 오히려 다행이었다 싶다. 노트북 덕분에 미래의 '김상철'들을 일찍 걸러낼 수 있었고, 노트북 덕분에 '김상철'들로부터 나를 보호할 '유정' 같은 친구들을 만났다. 물론 나는 원체 거절을 못하여 노트북 사태 이후에도 동기들에게 필기를 보여준다든가(통째로 가져가서 복사하는 애들, 꽤 있었다) 영어 레포트를 대신 써준다든가(영어로 쓰는 거라 무작정 재미있다고만 생각했었다) 하였지만 절친들이 있어 때로는 강경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
동물의 왕국을 따로 또 같이 헤쳐온 절친들은 지금도 따로 또 같이 마흔을 바라보고 있다. M양은 서울에서, H양은 세종에서, E양은 인천에서, 나는 미국에서. 어떤 면은 스스로 계획했고, 어떤 면은 상상치도 못했다. 몇 달 전 문득 다른 동기들이 궁금해져 L오빠에게 무려 10여년만에 카톡을 보냈다. 은행원으로 일하며 두 아들을 키운단다. K군에게는 연락해보지 않았는데 소식을 듣자 하니 벽돌 세 장 노트북의 제조사 S전자에서 일한단다.
벽돌 세 장 노트북은 2009년까지 나와 함께 했다. 요즘 노트북은 몇 년이 지나도 크게 성능이 저하되지 않지만 당시에는 3년만 지나도 점차 속도가 느려졌다. 5년이 지나니 복장이 터지기 시작해서 지금의 남편인 남자친구의 데스크톱을 빌려다 썼다. 그러다 7년째에 대학원 장학금으로 몫돈이 모아져 새 노트북을 질러버렸다.
벽돌 세 장 노트북을 처분하겠다 하니 아버지는 믿질 못하셨다.
"아니, 그걸 왜 버려?"
"너무 느려서 못 쓰겠어. 거의 먹통이야."
"뭐가 느려, 그 좋은 걸! 그때 얼마나 비싸게 샀는데!"
비싸게 사봤자 컴퓨터는 소모품이며, 2003년의 비싼 컴퓨터보다 2009년의 싼 컴퓨터가 훨씬 좋다고 나는 아버지께 차마 말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벽돌 세 장 노트북을 굳이 고향집에 갖고 내려오라고 하셨고, 이후로 아버지가 그 노트북으로 무얼 하셨는지는 모르겠다. 벽돌 세 장 노트북과 유사한 시기에 구입한 고향집의 데스크톱은 다음 해에 월급을 모아 S사의 최신 노트북으로 교체해드렸다. 당시 노트북을 사드리면서도 부모님과 마찰이 있었는데 이 역시 이야기를 풀자면 한 바닥이다.
제일 좋은 걸로 샀다는 아버지의 미소, 제일 좋은 걸로 샀다는 아버지의 생색, 2000년대 K대의 유정들, 홍설들, 하재우들, 김상철들. 랜선만 꽂으면 어디서든 인터넷이 되던 신기함, 랜선을 꽂아도 5분 넘게 '연결 중'이라는 답답함. 누구는 이렇다더라 누구는 저렇다더라 뒷담화가 난무하던 날들, 싸이월드 미니홈피가 화면을 채우고 감성 BGM이 반복 재생되던 날들. 애증이 교차하는 내 벽돌 세 장 노트북. 남색 키보드의 오돌토돌한 질감과 타닥이는 소리가 여태 기억에 선하다.
커버 사진 출처: 넷플릭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