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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 Apr 06. 2021

진짜 일등은 등수에 집착하지 않아요

자신이 못한 일등을 바라는 부모

*지난 2월 끄적였던 글입니다.


2010년 밴쿠버 동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김연아는 이후 3월에 치러진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실수를 연발하며 쇼트 프로그램 7위에 그쳤다. 그즈음 나는 대학원을 막 졸업하고 일부러 취업을 미루며 놀고 있었는데(내 인생의 마지막 방학일 테니까!) 부모님 댁에 방문했다가 당시 새벽 경기를 휴대폰 DMB로 보았다. 그날 아침 동이 튼 후 김연아의 성적을 뉴스에서 접한 부모님은 혀를 끌끌 차셨다.

"아니, 김연아가 왜 저래?"

"김연아도 이제 박태환 꼴 나는구만."

김연아(그리고 박태환 - 당시는 약물 사건 이전으로,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의 활약 이후 슬럼프를 겪던 중이었다)에 대한 부모님의 손가락질이 내 귀엔 이렇게 들렸다.


'나는 1등 해본 적이 없어. 그래서 1등 마음이 어떤지 몰라. 하지만 1등은 계속 1등 해야 하는 거 아니야? 1등이 1등 못하면 욕 먹어야지. 나는 1등 해본 적 없지만, 어쨌든 너는 1등이었으니까 계속 1등 해야지! 근데 왜 못해? 왜 못하냐고! 꼴 좋다, 꼴 좋아. 너나 박태환이나, 그 좋은 1등 자리를 유지도 못하고, 쯧쯧쯧.'



1등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1등의 마음을 모른다. 1등 직후 당장은 기쁠지 모르나 흥분이 가시고 나면 허무하거나 당혹스럽다. 1등 이후의 삶이 여전히 평범하면 여전히 평범해서 허무하고, 1등 이후의 삶이 너무 달라지면 너무 달라져서 당혹스럽다. 노력해서 얻은 1등이라면 오랜 상상이 현실이 되어 허무하고, 어쩌다 얻은 1등이라면 생각보다 쉬워서 당혹스럽다. 


중학교 때 전교 5등 내외를 맴돌던 나는 처음 전교 1등을 한 후 당혹스러웠다. 노력을 하긴 했지만 공부가 재미있어서 노력했을 뿐, 특정 등수를 목표로 하진 않았는데 2등도 3등도 아니고 1등이 되어버려서 당혹스러웠다. 욕실에서 샤워를 마친 어머니가 1등 소식에 물기도 닦지 않고 달려나와 안아주시는 것도 당혹스러웠고, 내가 모르는 동급생이나 학부모들이 "쟤가 Jin, 이번 1등"이라고 속닥거리는 것도 당혹스러웠고, 갑자기 과학경시반에 지정되어 각종 대회에서 헤매다 오는 것도 당혹스러웠다. 당혹스러워서 공부는 재미가 없어졌다. 이후로 성적은 전교 15등까지 떨어졌고, 그러다 무슨 일인지 다시 1등을 했다. 그러자 같은 반 아이가 이렇게 말했다.

"너 1등하고 자만해서 성적 떨어지더니 이번엔 열 받아서 열심히 했나 보네?"

'내가 자만을 했던가' 생각하느라 아무 대답하지 못했는데 지금은 이런 생각이다. 


'1등해서 자만했다고? 너 1등 안 해봤나 보구나? 1등하고 나면 무서워. 숫자 1에 신나하는 부모님도 무섭고, 일면식도 없다가 1등이라고 알아보는 애들도 무서워. 성적 좀 떨어졌다고 자만했니 어쩌니 너처럼 손가락질할 애들도 무섭고. 시험 문제 쉬우면 몇 개만 실수해도 상위권은 등수가 쭉쭉 내려가는데, 자만이 아니라 실수가 가른다는 걸 넌 모르는구나? 그놈의 실수 안 하려고 아둥바둥하는 짓 나는 이제 안 해. 문제 하나 더 맞추려고 교과서 달달, 프린트물 달달 외우는 짓거리 이제 안 한다고. 내가 안 해서 성적이 떨어졌는데 열 받을 일이 뭐가 있냐? 내 성적에 안달복달하는 어른들한테 15등 성적표 보여주면 얼마나 통쾌한데, 내가 왜 열이 받겠어? 그런데 이번 시험은 왜 잘 봤냐고? 그냥 운이야. 나도 1등 할 줄 몰랐어. 너가 운으로도 1등을 못해봐서 모르는구나? 열 받아서 열심히 했냐니, 열 받으면 공부가 잘 되는 줄 아냐? 공부하는 법도 모르면서 1등한테 성적으로 평가질 좀 그만 해줄래?'




7년 전 이즈음, 김연아의 은퇴 경기가 있었다. 밴쿠버 올림픽 때엔 취업을 미루는 취준생이던 내가, 소치 올림픽 때엔 8개월 난 딸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었다. 신생아 시절부터 이어진 밤중 모유수유에, 난생 처음 해보는 이유식 조리까지 매일매일 하느라 저녁이면 아이와 함께 곯아떨어지고, 아이가 깨면 젖을 물리고, 이유식을 만들다가 곯아떨어지고, 아이가 또 깨면 또 젖을 물리고, 아침에 기상하면 남편은 어느새 출근하고 없는 일상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일어나 휴대폰을 집어드니 남편이 출근길에 보낸 카톡이 있었다. 그날 새벽에 있었던 김연아의 은퇴 경기 장면이었다. 코 끝이 찡해지고 눈물이 핑 돌았다. 오랫동안 김연아의 팬이긴 했지만 눈물까지 날 줄은 몰랐는데. 심지어는 평소 하지 않는 SNS에 이렇게 소감을 적기까지 했다.


"I couldn't watch Yuna Kim's last performance because I had to sleep when my baby slept, and just looking at the photos of her that my hubby sent me this morning brings tears to my eyes. And I really want to say this. (아가가 잘 때 같이 자느라 김연아의 마지막 무대를 보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 아침 남편이 보내준 김연아 사진을 보고 있자니 눈물이 난다. 그리고 이 말을 정말로 하고 싶다.)


Thank you, Yuna Kim, for all the things you have done. Thank you for showing me how to fight the pressures and be yourself. You are forever the queen in my heart. (김연아 선수, 그동안 해온 모든 일에 대해 고마워요. 압박감과 싸우고 자기 자신이 되는 모습을 보여줘서 고마워요. 당신은 영원히 내 마음 속 여왕이에요.)"


소치 올림픽이 있기 2년 전, 김연아는 기자회견에서 출전 의사를 밝히며 그동안의 부담감을 털어놓았다.


"벤쿠버올림픽 금메달을 딴 이후 피겨스케이팅 선수로서 더 높은 목표를 찾기 힘들었고 그와 반대로 저에 대한 국민들과 팬분들의 관심과 애정은 더욱 커져만 갔습니다. 그러한 여러분들의 관심과 애정은 오히려 저에게는 큰 부담으로 느껴졌고 하루만이라도 그 부담에서 벗어나고 싶었던게 솔직한 저의 심정이었습니다. (중략) 선수생활을 지속하기 힘겨웠던 것이 내 스스로의, 또 국민과 팬들의 높은 기대치와 그에 따른 부담감이 아닐까. 내 스스로가 기대치를 조금 낮추고 오직 내 자신만을 위한 피겨연기를 보여주는 것을 목표로 삼으면 되지 않을까. (중략) 여러분들은 앞으로 저를 올림픽금메달리스트가 아닌, 후배선수들과 똑같은 국가대표 김연아로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소치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딴 뒤 팬들은 ISU의 판정과 '형광 나비'에게 화가 나 있었지만 시상대에 오르는 김연아의 얼굴은 편안해 보였다. 자기 자신만을 위한 피겨 연기를 보여주겠다는, 1등보다도 중요한 목표를 달성했으니까. 대기실에서는 펑펑 우는 모습이 방송을 타는 바람에 대중은 판정 논란과 연관 짓기도 했지만 김연아는 "그동안의 힘든 감정이 터져 나온 것일 뿐"이라고 선을 그었다. 


소치 올림픽 갈라쇼에서 김연아가 사용한 에이브릴 라빈의 'Imagine'을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모르겠다. 아이를 재우면서도 틀어놓았고, 요즘에는 어쩌다 혼자 있게 되면 꼭 듣는다. 하얗고 파란 심플한 차림으로 은반을 가르는 김연아를 떠올리면서. 1등을 하라는 목소리, 실수하지 말라는 목소리, 이번엔 왜 겨우 은메달이냐는 목소리, 목소리들과의 싸움을 끝내고 종착역에서 가뿐하던 그 몸짓, 그 몸짓을 떠올리면서.


by J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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