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딩과 강아지로 심플해진 요즘
일 벌이기를 좋아하는 남편은 직장에 다니면서도 개인적인 사이드 프로젝트가 항상 진행 중이다. 이번에 벌인 일은 리액트 JS라는 자바스크립트 라이브러리로 웹사이트를 만들어야 했는데 나도 뭔가 거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에 덜컥 코딩을 배우기 시작했다. 우선 HTML과 CSS로 시작해 리액트까지 벌써 서너 달째 배우고 있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직은 남편의 일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는 못하고 있다. 웹사이트는 동업자인 전문 개발자께서 만들고 계시고 나는 두 사람의 대화를 귀동냥하고 코딩 강의를 수강하며 혼자 연습하는 정도. 통번역 외의 다른 일을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은 여러 번 했지만 그게 코딩이 될 줄은 몰랐기에 신선하다. 참신성, 심미성, 보편성 등 주관이 강한 인간 언어를 다루다가 논리성, 정확성, 효율성이 중요한 컴퓨터 언어를 다루게 되니 어려우면서도 속 편하다. 오래 전 국어 시험은 이리 보면 1번이 정답 같으나 저리 보면 3번이 답인 듯해 속 터졌지만, 수학 시험은 답이 줄곧 딱딱 떨어져서 속 편했던, 그 시절의 기분이다.
이곳에서 만난 한국인 지인 중 어느 한 분이 문득 이런 말을 하셨다.
"처가집에 가면 딱 하나만 잘하면 돼. 밥 많이 먹기."
혹자는 그 말을 듣고 이렇게 반응할지도 모르겠다.
"뭐? 여자는 시댁에 가면 잘해야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너넨 밥만 많이 먹으면 된다고? 이래도 남녀가 평등하다고 할 거야? 게다가, 왜 처가'집'이야? 왜 시댁은 시'댁'인데 처가는 왜 처가'집'이냐고!"
맞는 말이라고는 여기지만 진부한 논의이므로 나는 다른 쪽으로 생각이 튀었다.
'밥을 왜 많이 먹어야 하지...?'
그래야 장모님이 좋아하시니까!
그걸 왜 좋아하셔?
당신 음식이 맛있다는 뜻이잖아!
그럼 맛이 없어도 맛있는 척 많이 먹어야 해?
장모님 음식이 맛없어봤자 뭐 얼마나 맛없겠어. 여하튼 밥 두 그릇, 세 그릇 싹싹 비우면 좋아하신다니까!
딱히 맛있지도 않은데 엄지 척하면서 밥 두 그릇, 세 그릇... 신체에도 정신에도 가학적인데...?
그래서 마음 속으로 아래처럼 뜬금없는 편지를 썼다.
미래의 사위님,
내가 만든 밥이 그닥이라면 부디 남겨주세요. 나는 타인이 나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무리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당신은 내 비위를 맞출 필요조차 없어요. 나는 타인의 반응에 행복감이 좌지우지되는 어린애가 아니니까요. 전문 셰프도 아닌 나의 음식을 타인이 홀릭해주리라는 과대망상도 물론 없고요. 당신은 당신만의 취향과 방식이 있고, 나는 나만의 취향과 방식이 있고, 서로를 고려한다 해도 좁힐 수 없는 간극이 있으리란 사실을 모를 만큼 멍청하지도 않아요. 그러므로 억지로 엄지 척하며 밥을 두 그릇, 세 그릇 먹는 식의 감정적, 신체적 노동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 에너지는 잘 아껴두었다가 당신의 새 가정에 소비해주시길 바랍니다.
P.S: 당신 취향에 맞추려는 노력은 조금만 하다가 말 겁니다. 당신은 내 딸이랑 살 거지, 나랑 살 거 아니잖아요?
이렇게 말한다 해도 '좋은 게 좋은 거'라며 가식을 고수하는 사람은 언제나 있다. 아, 인간은 피곤하다. 그래서 컴퓨터가 편하고 코딩이 재미있나 보다.
우리 집 강아지, 루이와 가족이 된 지 여덟 달이 되어 간다. 견생 2개월 차에 만난 루이는 이렇게 생겼었다.
루이는 전문 브리더에게서 분양을 받았다. 원래는 유기견을 입양하고 싶었는데 미국의 까다로운 입양 조건을 충족할 수 없었다. 입양 조건은 대체로 아래와 같았다.
최근 3년 내에 강아지를 키운 경험이 있어야 함(어떤 보호소는 동물병원 진료 기록 제출을 요구하기도 한다.)
자녀가 있을 경우 자녀의 나이는 최소 8세 이상이어야 함(10세 또는 13세 이상이 요구되는 경우도 있다. 내 딸은 현재 8세이나 당시는 7세여서 연령 조건을 절대 만족시킬 수 없었다.)
최근 한국의 어떤 연예인이 "전문가는 유기견을 추천하지 않는다"는 발언을 하며 뭇매를 맞았다는데 위와 같은 입양 기준을 보면 틀린 말도 아니다. 미국의 동물 보호소에서는 이미 한 번 상처 받은 아이들이 두 번 상처 받지 않도록, 성숙한 가정의 경험 많은 견주를 찾는다.
그래서 입양을 포기하고 분양을 받아온 루이는 무럭무럭 자라 이제는 딸의 책상 위 숙제를 몰래 훔쳐올 수 있을 만큼 체구가 커졌다. ("개가 숙제를 먹었다"는 건 영어권 아이들의 진부한 거짓말인 줄로만 알았는데 사실은 진짜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루이는 하루에 최소 세 번 산책을 나가고, 산책을 나갈 때마다 기분이 최고다. 밥도 하루에 세 번 먹는데, 사료를 제외한 모든 음식에도 기분이 최고다. 하루 중 만나는 모든 사람에 대해서도 기분이 최고이고, 특히 가족 구성원 중 누군가가 외출에서 돌아오면 기분이 찢어진다.
그 단순함이 내게는 힐링이다. 어린 아이의 부모로서의 삶이 1차 힐링이었다면 견주로서의 삶은 2차 힐링이다.
한국에 돌아가기 싫다는 어느 지인은 이렇게 말했다.
"한국 사람들은 타의가 너무 강해."
나는 '타의'를 '타인에 대한 의존도'로 해석했다. 사위가 밥을 잘 먹어주면 흐뭇하고, 잘 먹지 않으면 못내 서운하고, 자식이 명문대에 입학하면 황홀하고, 자식이 재수, 삼수를 하면 비참하고, 아들이 집안 행사에서 한 턱 쏘면 우쭐하고, 아들이 집안 행사에 불참하면 노엽고, 아내가 내 엄마에게 살가우면 뿌듯하고, 아내가 내 엄마에게 까칠하면 불쾌하고... 자신의 행복감을 타인의 행동과 성과에 의탁하는 멍청이들이면서 가끔 큰소리까지 친다.
"그게 네 도리잖아!"
당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게 내 도리라고? 당신의 행복은 내 책임이 아니라 당신 책임인데, 당신 도리지. 남에게 당신 행복을 맡기는 불행을 자초해놓고 왜 나를 탓해?
그런 멍청이들은 비단 한국뿐 아니라 어느 곳에나 있다.
멍청이로 늙지 않기 위해서 오늘도 단순하게 살았다. 아이의 수학 시험지가 재미있어 보이길래 같이 한번 풀어보았고, 루이를 목욕시키느라 허리가 아팠지만 기분은 상쾌했다. 코딩 연습을 하다가 버그가 생겨 다섯 시간 내내 컴퓨터와 씨름했지만 결국 해결했고, 남편이 바빠 보여 오랜만에 집안일을 혼자서 끝냈다. 그리고 잠든 아이와 강아지 옆에서 이 글을 썼다. 단순하게 목적 없이 쓰기 시작한 글인데 언뜻언뜻 뼈대가 보이는 듯도 하다.
모두 내 행복을 위해 내 의지로 한 일들. 희생이 어쩌고, 헌신이 어쩌고, 도리가 어쩌고 하면 골치 아프다. 아이의 깔깔 웃음이 명랑했고, 루이의 살랑살랑 꼬리가 귀여웠고, 남편이 가져다 준 커피가 맛있었고, 내 코드를 보고 기면 기다, 아니면 아니다, 딱딱 판단해주는 컴퓨터가 편안했다. 이것 저것 따질 것 없이 당신들 덕분에, 단순해진 나 자신 덕분에 오늘도 행복했다.
p.s.: 오랜만에 브런치에 들어왔더니 그동안 읽지 않은 작가님들의 글이 끝이 없다. 하지만 오늘은 그냥 단순하게 이만 자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