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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 Sep 22. 2021

아이에게 기억을 받았습니다

아이가 기억하지 못하면 소용 없다는 오만

한국에서 교육 사업을 하는 지인 A가 사업 확장을 위해 최근 미국 사무소를 열어 저녁 식사를 함께 했다. 식사 자리에는 A의 지인이자 곧 출산을 앞둔 한국인 부부도 함께 했는데 요즘 출산 준비에 여념이 없다고 했다. 


"초점책이란 것도 샀어요. 흑백으로 된 거 있잖아요. 사고 나서 부모님께 말씀 드렸더니 엄마가 쓸데없다고 하시더라고요. 너네 땐 그런 거 없어도 눈 잘만 보이지 않았냐고, 그런 게 정말 필요 있다면 너넨 다 사시 되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프로 불편러시네. 30년 전에 육아한 당신 기준과 당신 생각만 절대적으로 옳고, 자식이 혼자 알아서 하는 일은 단 몇 불짜리 초점책 구매까지 못마땅하고 못미덥고, 자식 내외는 타국에서 단둘이 첫 아이를 준비하며 초점책 하나도 고심하며 골랐을 텐데 그 조심스런 설렘에 '사시'란 말까지 투척하며 기어이 훈수를 두는 그 태도란... 하고 생각하는데 A가 이렇게 말했다. 


"모든 교육 산업이 그렇게 컸어요. 정말로 필요한지 아닌지 입증되지도 않았는데 필요하다고 선전하면서 수요를 만들어내죠. 그러니까, 좋다는 거 다 해줄 필요 없어요. 자식 그렇게 키워봤자 기억도 못하고, 나중엔 제 갈 길 찾아 떠난다고요. 저 보세요. 부모님 뜻과 상관 없이 이렇게 살고 있잖아요."


A의 말에 나는 절반 정도 맞장구를 쳤다. 좋다는 거 다 해줄 필요 없다는 말도 맞고, 자식은 결국 제 길 찾아 떠난다는 말도 맞다. 다만 '그러니까 대충 해도 된다'는 식의 분위기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신생아의 시력 발달에 초점책은 유의미한 효과가 없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까지 초점책을 구입한 전세계 수많은 부모가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할 수 있을까? 허공을 보는 시간보다 초점책을 보는 시간이 아기에게 즐거웠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나? 아기가 초점책을 바라보는 표정에 부모가 미소 지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나?


아이들이 기억을 잊는다고 해서 함께 동물원, 바다, 유적지에 놀러간 일을 모두 쓸데없는 짓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 혹자는 유아기에 접한 강렬한 기억 하나가 평생의 관심사로 이어진다는 지론(가령 동물원에서 본 사자가 인상적이었다면 사자와 관련된 그림책을 섭렵하다가 미술에 흥미를 키운다는 식)을 주장하기도 하는데, 그렇다면 관심사를 만들어내지 못한 여행은 쓸데없는 짓이란 건가? 여행을 통해 아이도 부모도 즐거웠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나?


흔히들 부모-자식 관계에서 부모는 '주는 사람'으로, 자식은 '받는 사람'으로 규정된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그렇다. 한없이 사랑을 주는 은혜로운 존재로 부모를 신격화하지만 현실의 부모들은 한없이 주는 일이 너무나 벅찬지 자꾸만 '소용'을 따진다. 초점책의 소용, 여행의 소용, 밤새 아기를 안아 달랜 에너지의 소용, 손수 이유식을 만든 정성의 소용, 매일 저녁 놀이터에서 함께 보낸 시간의 소용 등등. 


벅차다면, 즐겁지 않다면, 아이에게 모든 것을 해줄 필요는 없다. 하지만 자신은 아이에게 온전히 주기만 했고 받은 건 하나도 없는 마냥,


"초점책인지 촉감책인지 잔뜩 사줘봤자 아무 소용 없어."

"겨우 돌쟁이 데리고 무슨 여행? 어차피 기억도 못할 텐데."

"모유 먹인다고 애쓰지 말고 처음부터 분유 먹여. 애가 훨씬 잘 잔다니까."


라고 하는 말들은 머리로는 조금 이해가 가지만 마음으로 공감 가지는 않는다. 


맨질맨질하던 초점책과 바스락거리던 촉감책. 아이의 시각과 촉각에 도움을 주기는 했는지 어쨌는지는 모르지만 그 시절 아이와 그 책들을 들고 침대에서 뒹굴거리던 기억이 내게는 아직도 포근하고 따뜻하다. 


돌쟁이 아이와 매일 나섰던 산책길. 아이는 전혀 기억하지 못하지만 개미에게 손 흔들고 민들레 홀씨를 불던 아이의 얼굴은 내 마음 속에 보석처럼 반짝인다.


모유수유를 한 30개월의 시간. 아이는 젖 먹은 기억이 하나도 없다지만 한밤 중 젖을 찾느라 울고, 젖을 찾으면 웃고, 젖을 먹고 나면 곯아떨어지던 아이의 손과, 발과, 배냇머리가 아직도 눈 앞에 선해 아련하게 만져진다.


나와 아이의 관계에서 수혜자는 나다. 초점책도, 여행도, 산책도, 모유수유도, 이유식도 모두 온전히 아이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이기도 했기에, 단지 아이가 기억하지 못하고 가시적인 '소용'이 없었다는 이유만으로 '쓸데없다'고 후려칠 수는 없다. 마치 내 쪽에선 받은 것이 없는 마냥, 내 쪽에서 얻은 기억은 계산하지 않아도 되는 당연한 서비스인 마냥 그렇게 후려칠 수는 없다.




A와 만난 날은 아이 친구의 생일이기도 했다. 한국에선 누가 생일이라고 하면 "생일은 네가 축하 받는 날이 아니라 널 낳아준 부모님께 감사해야 하는 날"이라고 가르치려는 꼰대가 꼭 있었는데 이곳엔 다행히 그런 어른은 없었다. 앞으로도 내 아이가 그런 말을 듣는 일은 없으면 좋겠다. 지구상의 수많은 인간 중에 하필이면 나의 자식으로 태어났는데, 그걸 감사해하라니. "생일은 부모님께 감사하는 날"이라는 말, 대체 누가 지어냈는지, 그 사람도 만일 부모라면 그 면상이 얼마나 오만방자할지 한 번 구경이나 하고 싶다.  


감사하지 않아도 되고, 기억하지 않아도 좋으니 언젠가 아이가 제 길을 찾았을 때 가벼운 발걸음으로 떠나면 좋겠다. 그 때를 위해 나는 아이가 기억도 하지 못할 노력을 계속해 나간다. 같이 펜케이크를 만들고, 같이 보드게임을 하고, 친구를 집에 초대해주고, 불평불만을 들어주고. 아이를 위한 노력이 아니다. 먼 훗날 아이가 그리워지면 가슴 속에서 꺼내어볼 예쁜 추억을 늘리기 위한, 나를 위한 노력이다. 늙어서도 혼자 잘 지내는 엄마가 되기 위한, 나를 위한 노력.


덧. 혹여 자식이 어린 시절 떠났던 여행을 통해 적성을 찾고 성과를 얻는다면 내심 그 성과에 본인 지분이 들어 있다고 여길 부모도 어딘가에 있을 테다. 자식의 성과와 자신의 성과를 분리할 줄 모른 채, 받은 것은 잊고 준 것만 계산하며 자기 효능감 챙기려는 노력이 징글징글해서 눈물 날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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