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ee Park Sep 18. 2018

04. 사랑스러운 여행지를 다시 추억하는 방법  

시티 큐레이션 매거진 DOR가 좋은 이유

여행을 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직접 경험하는 일뿐 아니라 그곳을 잘 아는 사람에게 이야기를 듣거나 여행지를 담은 콘텐츠를 접하는 일도 해당된다. 이제껏 보이지 않은 매력이 하나둘씩 드러난다. 나에게는 멜버른이 그랬다. 멜버른 이야기를 듣자마자, '여기다'라는 생각에 비행기 티켓을 끊어버렸으니.



어딜 찍어도 아름다운 곳, 멜버른

처음 이 도시를 마주하게 된 건 2017년 7월, 여행 설명회에서였다. 유럽은 친구들이 다 가는 듯해서 싫고 아시아는 몇 군데 가봤으니 다른 곳은 없을까 하는 호기심에 ‘영감을 주는 도시, 멜버른’ 설명회 카피를 보고 불쑥 신청했고 도시에 반해버렸다. 너무도 애정하며 소개해준 사람들 덕분에 그 감정이 그대로 나에게 전해져서 그런가 보다. 여행 설명회는 매거진 <DOR>에디터들이 창간호 멜버른 편을 소개하는 자리이자, 그들만의 감성이 담긴 여행법을 공유하는 시간이었다. 남들이 가니 나도 꼭 가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각자의 취향에 묻어나는 여행법 같은 것들을 소개해줬는데 여행지에 어울리는 책을 가져가 읽는다는 한 에디터의 취향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잔잔했지만 꽤 진한 울림과 설렘이 느껴졌던 분위기에 취해 나는 별다른 고민 없이 멜버른을 행선지로 택했다. 그리고 그 해 12월, <DOR>는 까맣게 잊은 채(왜 그때 살 생각은 안 했는지 아직도 의문스럽다.) 사랑스러운 도시 멜버른에 다녀왔다.



멜버른에 다녀온 지 한참 뒤에야 작은 동네책방, 땡스북스에서 그 매거진을 재회했다. 내가 기억하는 멜버른이 여기에는 어떻게 담겨있을지, 어떤 교집합을 발견하게 될지 궁금해 그제야 구매했다. 내리쬐는 햇살, 잔디에 누워 한낮의 여유를 맛보는 사람들, 생활이 예술인 도시 멜버른을 한 권의 잡지로 만나는 일은 또 다른 여행 같아 구석구석 살폈다. 책은 또 어찌나 조심스레 보게 되는지 아직도 남의 책 인양 하나하나 아껴보는 마음으로 읽게 된다.



DOR 소개
도어는 연간 네 번 발행되는 시티 큐레이션 매거진입니다. 매 호, 한 도시를 선정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삶과 그들이 지닌 문화, 생활 속 가치를 세 가지 키워드로 풀어냅니다.

여기에는 편집장의 말도 없다. 그저 누구의 틀도 없이 멜버른의 삶을 그대로 느껴보라는 메시지처럼 여겨진다. 펼치니 <DOR> 소개글, 한 장 더 펼치니 CONTENTS 소개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콘텐츠 소개를 보니 눈을 오랫동안 머무르게 만드는 카피다. 하나하나 눈여겨봐주길. 카피만큼 내용도 훌륭하다.(물론 감성적인 디자인도 한몫한다.) 멜버른의 삶을 'ART, NATURE, COFFEE'로 말하며 콘텐츠를 풀어내는데, 호기심을 끌어들이는 카피 제목에 영어와 한글을 같이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단어를 조합하는데 꽤 고심했을 에디터 모습이 그려진다. 디테일이 어마어마한 잡지다.   

NOT LIMITED BUT FREE FOR EVERYONE
고상하지 않고 자유로운 모두의 것

LIGHT AND SIMPLE YEARS
가장 단순한 장면을 지나올 때 우리 모습은 달라지고

FOR THE PERFECT DAY OUT
우리의 사적인 천국

<콘텐츠 카피 일부>





이번에는 아름다운 문장이 반긴다. 세줄이지만, 여운이 깊은 글이라 자꾸만 곱씹게 된다. 몇 장 안 넘겼지만 에디터의 취향이 더 궁금해진다.



이제는 텍스트가 아닌 사진으로 삶을 담았다. 화려하진 않지만 모조리 붙잡고 싶은 일상의 기억을 카피(응시의 시간; Splendid glance)와 함께 잘 담겼다. 내가 누렸던 일상이 사진에서 보였다. 사색에 마음껏 잠길 수 있는 숲, 직접 만든 파스타, 생기가 감돈 마켓과 거리의 기억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했다.            



무엇보다 멜버른에 푹 잠길 수 있게 된 건 키워드 시작마다 보이는 짧은 소설이었다. 3개의 키워드(ART, NATURE, COFFEE)뿐이라 3편의 소설밖에 맛볼 수 없지만, 이야기는 뒤에 이어질 키워드와 긴밀하게 연결되기도 하고 내 시선을 한껏 대입하게도 만들었다. 아티스트 A가 멜버른에 잠시 살며 자신과 이를 둘러싼 생활을 들여다보고 A다운 삶과 작품을 찾는 이야기다. 한 달간 동료 아티스트 B의 집이 비어있어 그곳에서 살며 전혀 다른 일상을 보내게 되는데, B가 남긴 메모들은 하나같이 인상적이다.   


멜버른에서 일할수록 무엇이 예술인지 아닌지 가끔은 구분이 어려워. 설명하기 어렵지만, 조이 헤스터의 작품 앞에서 보내는 시간과 로열 보태닉 가든의 그늘에서 일광욕하는 시간이 다른지 모르겠어. 난 시드니 놀런의 그림을 좋아하지만 오후 네 시쯤 거리의 나무가 멜버른의 낮은 주택가 건물에 만드는 그림자와 우열을 가릴 순 없을 것 같아. 내가 어네부터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걸까. 아무래도 이곳은 전혀 고상하지 않고, 자유로우니까. 또 여기서 보는 것들은 모두의 것이야. 내 것도 아니거 네 것도 아니지. 하지만 여기서 지내다 보면 넌 너만의 것을 만들 수 있을 거야.   

<B가 남긴 편지 중 일부>

B의 편지로 인해 쫓기듯 사는 A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간다. 강변을 따라 러닝을 해보고, 동네를 살펴보고 작품을 만들어나간다. 결말은 흐릿하게 마무리해 아쉽긴 했지만, 분명 A다운 삶을 찾았을 거라 생각한다.    



소설과 소설 사이에는 멜버른 사람들의 삶이 담겨있다. 브랜드 매니저, 큐레이터, 조각가, 바리스타, 푸드 라이터까지 하는 일은 모두 다르지만, 그들 모두 자신의 삶을 소중히 여기는 태도가 글에서 뚝뚝 묻어났다. 글에서도 사진에서도. 여기서도 디테일이 살아났는데, 인터뷰이 사진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자막을 삽입했다. 이런 아날로그 감성은 다른 페이지에도 스며들어있다. 너무 많아서 다 말하지도 못하겠다.   



인터뷰 말고도 재미있는 콘텐츠가 많았다. 평소 여행에서 주목하지 못하는 것들을 뒤집어보고, 흔들어보는 에디터들 덕분에 이렇게도 여행하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든다. 미술관에서 작품을 보는 일보다 그 작품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멀리서 지켜본 글, 그곳에서 생활하며 친숙하게 사용하고 아끼던 물건들을 소개하는 코너, 영감을 어디서 받냐고 물었을 때 각자의 개성 있는 손글씨로 답한 사람들의 쪽지들. 내 예상을 뛰어넘는 이야기가 여기저기 뒤섞여있어 잡지 읽는 맛이 난다.


다시 멜버른을 여행하는 기분이었다. 기분 좋은 날씨와 사람들이 그대로 녹아들어 있어 더 그리워졌다. 깨알 같은 디테일이 있었기에 추억의 향수가 마구 뿜어져 나오는 듯하다. 이런 설렘을 다시 느끼고 싶은 마음에 타이베이편을 연이어 구매했는데, 이 편은 좀 아쉬웠다. 표지는 천으로 덧대 고급스러워졌고 영문판으로 같이 번역돼서 읽는 편의성은 높아졌지만, 이전보다 디테일은 많이 사라졌다. 매력적인 카피, 콘텐츠를 보는 재미가 그 도시의 매력을 살려줬는데 사진에서 느낀 감성도 반감됐다. (이건 내가 유독 멜버른을 좋아해서 그런 걸 지도)


무튼 한 권의 책을 통해 리프레시한 기분이다. 그 사람들이 먹고사는 방식을 먼저 들여다봤기에 매력적인 매거진이 나왔겠지. 나 또한 하루를 여행하더라도 잠시 발도장만 찍는 게 아니라 그 도시를 느끼고 살아보고 싶은 거니까.  자신만의 생각을 올곧이 이어나가는 책과 사람 그리고 공간을 속속들이 더 많이 알고 싶다. 더 알려주고 싶다. 좋은 건 공유할수록 기쁨이 배가 되는 법.




[이거 왜 좋아요?]

저만의 취향 리스트를 디테일한 이유와 함께 하나씩 공유합니다. 그 좋았던 경험을 차근차근 살펴보며, 왜 그런 감정이 들었는지 기록하려 합니다. 계속 발길이 가는 가게, 구독하며 꼭 챙겨보는 웹툰, 사용하기 편하고 좋아 자꾸만 손이 가게 되는 물건들. 살아가는 작은 방식을 조잘조잘 풀어나가려고요.

매거진의 이전글 03. 매력적인 향을 팝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