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드저널, 이거 왜 좋아요?
소설보다 한 사람의 진솔한 이야기가 담긴 인터뷰집을 좋아한다.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살아있는 이야기라서 좋다. 그래서 손에 잡힐 듯 생생하고, 내 옆사람 이야기처럼 가깝게 여겨진다. 이야기를 읽을 때면 머리가 찌릿찌릿하며 감탄하게 된다. 감탄한 문장을 만나면 그냥 두지 않는다. 밑줄을 긋고 작은 메모를 한다. 감동을 오래 기억하고 싶어서 다시 찾아보고 필사한다. 이런 취향 덕분에, 서점에서 저절로 눈이 가는 책은 모두 사람들의 생각을 담은 에세이, 인터뷰집이다. 독립서점에서 일하는 사람들, 작은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오너셰프, 여러 프로젝트를 설계하는 기획자들의 인터뷰 책, 브랜드의 가치와 철학을 말하는 잡지까지. 이번 해에만 사모은 책이 10권 남짓이다.
그런데 지금 이 잡지는 직접 고르지 않았다. 어쩌다 지인의 선물로 내 손에 쥐어졌다. 이전에 접한 적은 있지만 내가 읽을 잡지는 아니라고 여겼다. 바로, '아빠를 위한 잡지'라는 카피를 보고 말이다. 그저 '힙한 잡지네! 그런데 이런 걸 보는 아빠들이 많으려나?' 하고 가볍게 넘겼다. 첫인상이 낯설었기에 모든 게 어색했다. 어두운 분홍빛 표지사진, 한국어와 영어 텍스트가 함께 실려있는 콘텐츠. 글을 읽기도 전에 묘한 경계심만이 자리했다.
그런 경계심이 한 번에 풀어헤쳐진 건 한 편의 인터뷰, 한 남자의 이야기였다. 일에 지쳐 허덕이다 아무 계획 없이 퇴사하고, 아내와 아들과 살을 부대끼며 새로운 곳에서 오래 살아보다가 다시 돌아와 함께 살 집을 직접 짓고, 끝내 그 일로 되돌아왔지만 행복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단지 '아빠'로 사는 이야기가 아니라 한 사람이 살아온 긴 여정을 듣는 기분이었다. 몇 페이지 안 되는 인터뷰였지만, 문장 하나하나가 가볍지 않았다. 외형의 집뿐만 아니라 튼튼하고 견고한 마음의 집을 짓게 됐다는 그 말이 글과 사진에서 그대로 묻어났다. 이걸 처음 읽었을 때가 퇴직한 시기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라, 그 마음을 깊이 공감했는지도 모르겠다. 일을 잘 해내야 한다는 압박감, 주위의 평가, 기한 내에 빠르게 끝마쳐야 하는 업무들. 그 압박감을 내려놓고 뉴질랜드에 잠깐 머무르며 여유를 맛본 경험은 말도 못하게 좋았다. 그때 비로소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지기도 하고, 이제껏 보지 못했던 모습을 발견해서 새롭게 느껴지기도 했다.(그때부터 기록과 표현의 욕망이 스물스물 나온듯하다.) 많은 생각을 교차하게 만드는 글이라 자꾸만 곱씹게 됐다.
그 한 편의 글을 계기로, 볼드 저널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접한 이슈는 5호 집(house; 달라진 집에 대한 생각들)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다양한 방식의 '집'을 말하고 있었다. 보통 살고 있는 집을 떠올려보면 '아파트'라고 말하나, 여기는 조금 다르게 사는 사람들이 존재했다. 밴에서 사는 부부, 아파트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개조해서 사는 가족, 코하우징(Cohousing)을 이루는 이웃들까지. 그들에게는 집이 단순히 먹고사는 공간으로, 부동산의 투자처로 자리하지 않았다. 소중한 인연들을 만나고 추억을 쌓고 정성을 들이는 보금자리였다. 그런 진솔한 생각이 잔뜩 담겨있던 탓에 페이지마다 밑줄이 많아졌고 한참을 음미하게 됐다. 그제야 내 책을 만난 기분이 들었다.
정감이 가니, 목차도 달리 보인다. 다른 잡지는 주제가 통일되지 않아 내용과 깊이가 들쑥날쑥인데, 볼드 저널은 주제가 하나라, 시야가 얕았다가 점차 깊어진다. Eyes, Portraits, Ideas라고 목차 부제를 달아놓은 것도 재밌다. 처음에는 가벼운 이야기로 시작하다 어떻게 생각하는지 넌지시 물어보더니(Eyes), 다양한 양상의 집과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고(Portraits), 내 상황에 맞게 고려할 수 있는 다양한 선택지와 귀여운 에피소드를 소개한다(Ideas). 내게 맞는 집을 테스트할 수 있는 시험지도 있었다.(생각보다 어려워서 풀다 보류했다.) 이쯤 되니 다른 이슈도 궁금해졌다. 상상력이 부족한 터라 어떤 이야기로 콘텐츠를 풀 수 있을지 가늠이 되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의외의 주제들이 많았다. 예를 들면 Puberty(아빠의 사춘기), Lifelog(일상의 작은 기록), Gender(아빠의 젠더 감수성) 같은 이슈들. 사람과 삶을 오래 고민하지 않으면, 나오지 않을 법한 주제라 더 들춰보고 싶게 만들었다. 조만간 서점에 들러야겠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위로를 받는다. 여행을 하며 낯선 풍경과 사람을 보며 '이런 세상도 있구나'하고 눈을 뜨는 것처럼 책에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겪어보지 못한 상황, 사람을 만나며 흠칫 놀라기도 도전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고 내 생각이 이상한게 아니라고 나를 다독이게도 된다. 소설처럼 허구의 인물이 아니라, 나처럼 하루하루를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라 정겹다. 그 이야기에는 수천 가지 갈래의 답이 있어서 더 좋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나에게 어떻게 살고 싶냐고 되묻는다. 덕분에 일기장에는 소중한 순간을 미리 그려놓는 기록들이 차곡차곡 쌓여간다.
[이거 왜 좋아요?]
저만의 취향 리스트를 디테일한 이유와 함께 하나씩 공유합니다. 그 좋았던 경험을 차근차근 살펴보며, 왜 그런 감정이 들었는지 기록하려 합니다. 계속 발길이 가는 가게, 구독하며 꼭 챙겨보는 웹툰, 사용하기 편하고 좋아 자꾸만 손이 가게 되는 물건들. 살아가는 작은 방식을 조잘조잘 풀어나가려고요. 문의는 언제든지 환영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