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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린 Mar 23. 2023

서른다섯, '그림'에게 배웁니다 1화

 전국대회 '대상'이 심은 어떤 씨앗


그날 기억은 어렴풋하다. 다섯 살 나의 온전한 기억인지, 엄마에게 전해들은 이야기가 그려 낸 상상인지 헷갈리지만. 그날 난 무언가 잘했다는 만족감에 차 있었다.

1993년은 어린이집이 흔하지 않았다. 나는 어린이집이 아닌 미술학원에 갔다. 미술학원에서 그렸던 그림 한 점이 전국어린이미술대회에서 대상을 받게 됐다. 다섯 살이 전국어린이미술대회는 무엇이며, 대상이 무슨 상인지,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 턱이 있나. 엄마는 내 손을 꼭 잡고 할머니는 포대기에 동생을 업은 채 길을 따라나섰다. 부산 성지곡수원지로 향했다. 그곳에 내가 그린 그림이 전시돼 있다 했다. 나는 엄마랑 어디 가는 것만으로도 신나서  폴짝폴짝 뛰었다.


“여기가 맞는데, 왜 없지?”


엄마 손을 잡고 얼마나 걸었을까. 엄마는 전시돼 있다는 내 그림을 찾지 못했다.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 학원에 전화를 걸어 되물을 수도 없었다. 허탕을 친 채 집으로 돌아왔다.

얼마 뒤, 큰 방 방문을 열면 가장 먼저 보이는 화장대 위 내 증명사진과 그림이 박힌 상패가 놓였다. 전시된 내 작품을 찾을 수 없었지만, 다섯 살 예린이는 뿌듯했다. 적어도 ‘난 그림을 잘 그려’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초등학생 때는 미술학원에 다니며 사생대회도 참여했다. 결과는 수상과 거리가 멀었지만. 중학교 때 미술 수업에는 친구 대신 그림을 그려주기도 했다. 언제나 미술 성적은 ‘우수’였다.


문제집과 씨름하는 시간이 늘면서, 아르바이트에, 먹고 사는 일에 바쁘면서, 그림과 내 거리는 닿을 수 없는 곳까지 멀리 떨어진 기분이었다. 마음만큼은 그림그리기 언저리에 뱅뱅 맴돌았다. 서점에 가면 ‘예술’ 코너를 서성였다. 그림 그리기 기술이 적힌 책들을 꺼냈다 넣기를 반복했다. ‘시작만 잘하는 내가 과연 할까?’에서 ‘일단 해보자!’ 로 마음이 바뀌면, 책을 품에 꼭 안고 왔다. ‘나의 첫 크로키’, ‘쉽게 그림 그리는 법’. 해보자는 마음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책은 두 페이지 이상 넘어가질 않았다. 책은 앞장만 푼 새까만 문제집처럼 앞부분만 너덜너덜했다. 연필을 잡아 고작 선 몇 개를 그리고 책을 닫기를 반복했다. 그림 실력은 당연히 한 걸음도 나가지 않았다.


재미가 없었을까. 열정이 없던 걸까. 그리기에 대한 미련을 운동화에 흙을 툭툭 털어내듯, 털어내지 못했다. 고스란히 책장에 모셔 있는 책들을 보며, ‘언젠가 그려야지’ 1분간 마음을 굳게 먹은 채 계절이 여러 해 바뀌었다. 그러다 또 그림 작품을 보면,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라는 말도 안 되는 착각에 그림 그리기 책을 여러 권 주문했다. 풀지 않은 문제집처럼 책장은 그림 그리기 책들은 쌓여갔다. 사계절이 몇 번이고 돌고 돌아 어느새 나는 서른다섯 살. 어르신들이 ‘아이고, 고생했네’하며 위로의 말부터 건네는 연년생, 애 둘 엄마가 됐다.


‘엄마를 위한 그림책 학교.’ 차 시동을 걸다 도서관 입구에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다. 출산과 육아 속에 항상 그림책이 있었다. 그림책 읽기가 자연스레 일상이 된 엄마였다. 아이를 위한 그림책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훗날 엄마가 없어도, 내 마음을 고스란히 담은 책을 아이에게 남겨주고 싶었다. 도서관 수업 신청일. ‘오예 성공!’ 수업 접수가 시작된 지 1분 만에 수강생이 다 찼다. 멈춰버린 화면을 보며 마음 졸였지만, 수업을 들을 수 있게 됐다. 그림 언저리만 맴돌던 내가 나를 그림그리기 속에 던져버렸다. 다섯 살 어린 마음에 심어졌던, ‘나는 그림을 잘 그리는 아이’라는 자신감 씨앗이, 삼십 년간 묻혀 있다가 움트기 시작했다. 내가 아닌 누군가를 ‘위한다’는 목적의식, 이왕이면 잘하고 싶은 욕심이 씨앗을 비추는 햇살이 됐다. 비로소 씨앗이 꿈틀거렸다.


‘엄마를 위한 그림책 학교’ 수업 첫날.  뭐든 할 수 있을 거라고 마음먹은 내게 두려움이 스멀스멀 다가왔다. 그림책 지도를 해주는 작가님이 계셨지만, 6개월간 스토리보드를 짜고 그림을 그리기까지. 이 모든 걸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스스로 해내야 한다.

 ‘아…. 나 그림책 완성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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