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예린 Apr 18. 2023

'바람'의 아들

결혼하면 아이는 당연히 뿅! 하고 생기는 줄 알았다. 세상에 당연한 건 없다는 걸 서른이 넘어 깨달았다. 결혼 6개월째 세포분열은 일어나지 않았고 생명은 찾아오지 않았다. 일본 출장길. 겨울이면 두루미 수만 마리가 검은 점으로 빼곡히 논을 채운다는 가고시마 이즈미시를 찾았다. 예로부터 두루미는 건강과 복의 상징 아닌가. 계절을 비켜가 두루미를 만나지 못했지만, 두루미에게 소원을 빌었다. 두루미박물관 입구 소원 나무에 한글로 간절함을 꾹꾹 눌러쓴 종이를 걸었다.
"애기 생기게 해 주세요."
간절함은 통했다. 일본 출장에서 돌아온 다음 날, 내 몸에서 새로운 심장 하나가 뛰기 시작했다. '바람'이 이뤄졌다.

코딱지만 한 심장이 자라고 또 자라서 네 살이 됐다. '아야차자'하고 외계어만 쫑알대던 아이가 어느새 나랑 대화를 했다. 하동 섬진강에 둘이 앉아 모래를 만지작대던 날, 아이는 '바람'을 느꼈다.
"오니야, 여기 엄마랑 오니랑 둘밖에 없어서 좋다. 그렇지?"
"아냐, 엄마. 나랑 바람도 있잖아. 휭휭~."
"그러네, 바람도 있네."
바람이 섬진강 물을 밀 때, 바람이 아이 얼굴을 매만지며 지나갔다. 날리는 내 머리칼, 어디론가 달려가는 바람 소리, 반짝이는 윤슬이 시적인 시간을 만들던 순간이었다.

여섯 살. 돼지 꼬리처럼 둥글게 말린 선을 종이에 그렸다. 아이는 그것이 '바람'이랬다. 그네를 탄 자신을 그린 그림에는 바람이 11개나 있다. 그가 그린 바람은 종이 위에 돌돌 돌고 있다. 파란색 바람을 보다 바람이 어떤 모양일까 생각한다. 며칠 전, 대운산 도통골짜기에서 만난 바람은 나무 머리채를 잡고 세차게 흔들다가 '두두두두우우우' 소리 내며 달려왔다. 바람은 달려와 온몸을 순식간에 훑고 내달렸다. 느껴지지만 보이지 않는 바람. 아이가 그린 바람을 보며 바람을, 모양을 상상해 본다.

아이 그림에 채워진 바람을 보다, 간절한 바람으로 낳은 아이와 느꼈던 바람을 떠올려 본다. 바람, 바람, 바람. ‘오니는 바람의 아들인가?!’ 혼자 말장난하다 ‘풉’ 하고 웃음이 터졌다.


바람과 너와 나
매거진의 이전글 다시 봄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