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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린 Sep 22. 2023

활자에 갇혀있더라도

인스타 스토리가 활발해지고 페이스북 글이 올라오는 날. 내가 어김없이 활자에 갇혀있는 날이다. 모니터에는 어학사전, 지도, 한글문서, 지리지 등이 떠 있고, 왼손은 Alt+tab(화면전환) 단축키를, 오른손은 마우스를 수시로 클릭한다. 책상 위는 인쇄한 지리지, 신문기사로 어지럽다. 지루하고, 재미없는 창작 시간. 40분쯤 견디고 나면 화면 안 커서는 혼자 깜박인다. 커서는 앞으로 나아가질 못한다. 인터뷰가 재미있으면 타자는 거침없이 쳐지지만 안타깝게도 그러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마실 물 없이 삶은 계란 노른자를 삼키듯 꾸역꾸역 타자를 친다.


멍하니 화면을 보고 있다가 '에랏 모르겠다' 하고 방바닥에 드러누워 허연 천장만 한참 바라본다. 화면을 본다고 머리가 빠릿빠릿하게 돌아가냐? 그것도 아니다. 허구한 날 밖으로 나가서 사람 만나고 이야기 듣다 보니, 활자에 갇힌 날 유일하게 사람 만나는 통로가 SNS인 거다. (인스타 스토리가 활발해진다? ‘이 사람 또 원고 쓰고 있구나’ 이렇게 생각하시라.)

천장만 바라보다 여태껏 인터뷰 한 사람은 몇 이나 될까. 취재한 사람은 얼마나 될지 싶다. 손으로 꼽을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느는 건 넉살뿐. 하지만 이 넉살도 때와 장소에 따라 제 기능을 발휘할 때도 못 할 때도 많다.


A 마을은 원전이 가까이 있어 돈이 많은 동네였다. 원전은 원전에 땅을 내준 지역 민심을 달래기 위해 매년 마을 발전 기금으로 몇천만 원씩 지원해 준다.돈은 조용하던 어촌마을 사람 마음을 이기심으로  들끓게 만들었다.정이 넘치던 마을은 물에 젖은 휴지처럼 찢어졌고, 마을은 찾아온 외지인은 경계 1순위였다. 마을회관 입구서부터 ‘외부인 출입 금지’가 적혀 있던 A 마을. ‘난 취재해야 하니깐.’ ‘마을 이야기를 들어야 하니깐’ 빨갛게 쓰인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을 회관 문을 열었다. 어르신 두 분의 눈빛은 경계심이 가득했다. 아니나 다를까. ‘마을 이야기 좀 들으러 왔다’는 질문에 돌아온 답은 “우리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이장한테 전화해서 물어보소.”

취재 10년 차. 누울 자리 앉을자리를 바로바로 알아챈다. 더 들이대봤자 구차해질 뿐.

“예~ 어르신”하고 돌아선다. 오랜만에 당해 본 거절, 어쩌겠는가 ‘모든 사람이 내게 친절할 이유가 없다.’ 취재하며 몸소 깨달은 생각을 되뇌며 취잿거리를 찾아 떠났다. 마음의 생채기가 생겨도 흉은 아물 터니 흉터를 훈장처럼 생각하면 된다.


한 달 후 다시 마을 취재. 배산임수 지형에 살기 좋았던 B 마을은 고속도로와 국도 건설로 세 조각났다. B 마을회관 앞에 섰다. 낯선 공간에 문을 여는 일. 매번 하는 일이지만 문 앞에선 순간은 익숙해지지 않는다. 문을 열자마자 기름 냄새가 풍겨온다. ‘점심으로 부추전을 구워드셨군’ 생각하며, 구구절절  이곳을 찾아온 이유를 사투리로 설명한다. (빠른 시간 내 어르신 마음을 열려면 사투리가 필수다)


“어르신 여기 배 밭들이 어데 있었습니꺼?” 운을 한 번 띄우자 여섯 분 어르신이 일동 합창한다.

“여, 천지가 배 밭 이었제.” 대답에 경계심이 없다. ‘좋았어, 인터뷰가 술술 풀리겠군’

“한창 배 재배하던 시절 이야기 좀 해주이소”

“근데 이야기해 주면 뭐 줄 건데!?”

“제 사랑을 드립니다.”


어르신들 말에 1초 당황했지만 엄지와 검지를 교차에 하트 모양을 주머니서 꺼내는 시늉을 했다. 손녀 재롱 보듯 어르신들 얼굴에 함박웃음이 지어졌다. 이 분위기를 몰아 두 손으로 하트 모양을 만들어 날려드린다. 케케묵은 옛이야기라고 들어주는 이 없던 어르신들.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던 자신의 삶을 들어주는 사람이 반가운 어르신들은 옛이야기를 술술 풀어놓는다.


미국에 수출했다던 배, 봄이면 배꽃향이 넘실대던 옛 마을을 상상하며 귀를 기울인다. 한참 이야기를 듣는데 어르신 한 분이 일어나셔서 부추전 한 판에 물 한 잔을 은쟁반에 들고 오신다.

“안 그래도 문 열자마자 정구지 찌짐 냄새가 났었는데 이거 였네예.”

“냄새 맡았으면 좀 달라하지 그랬노.”

“아따 참말로 남아 있는지 우쨌는지 제가 우예 압니까. 잘 먹을게예.”

내 뻔뻔한 대답에 어르신들은 또 웃음이 터졌다.


86년 동안 B마을에 사셨던 임 할머니. 한 시간 동안 옛이야기에 추억 소환을 하시더니, 마을 우물과 빨래터를 알려주겠다며 길을 나서자 했다. 발을 맞춰 걸으며 우물, 빨래터를 본 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할머니는 할머니 댁으로 나는 다시 내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됐다.

“새댁, 김해서 왔으면 갈 길이 멀겠다. 조심히 가고 건강해야 돼.”

임 할머니가 꼭 안아주신다.

“어르신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세요.”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 만남. 여든이 넘은 어르신들과 만남 앞에서 나는 언제나 오늘이 마지막 날처럼 어르신들 대한다. 눈은 반짝, 귀는 쫑긋, 마음은 활짝 연다. 인사 후 돌아섰는데 또 마음이 꿈틀댄다. 임 할머니의 따뜻한 말에 돌아가신 외할머니 생각이 교차한다. 청승맞게 길바닥에서 눈물을 훔친다.  


거절과 환대를 오가며 생채기 난 마음은 딱지가 앉고 흉터가 생긴다. 흉터를 어루만져주는 건 결국 사람이다. 활자를 오가는 지루한 원고작업을 끝끝내 완성해 나가는 건, 눈을 반짝이며 옛 자신의 치열한 삶을 읊던 어르신들 빛나는 얼굴 덕분이다. 활자 속에 갇혀 있어도 내 일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결국 사람이다. 끓는 물이 냄비 위로 넘치듯 글 쓰며 울컥하고 올라온 마음을 활자에 녹이는 일, 그 일을 잘 해내는 게 나의 일이니깐. 오늘도 마감의 늪에 허우적거리며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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