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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일상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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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린 Oct 05. 2023

잘 되어왔고, 잘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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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대로라면 오늘 아침 이삿짐 나르는 소리에 집이 요란했을 테다. 이사 계획에 맞춰 두석 달 전부터 버릴 짐들을 하나씩 정리했고,
끊임없이 나오는 장난감, 옷감 더미를 없애며
‘다시는 쓸데없는 소비는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이사 2주를 앞두고 계획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돌연 임대인은 ‘보증금을 돌려줄 돈이 없다’하고 연락이 두절됐고, 추석을 앞두고 나와 신랑은 변호사, 은행 대출 상담하며 해결책을 찾느라 정신이 없었다. ‘전세 사기’는 뉴스나 나오는 일이라 여겼는데, 내가 닥친 일이 돼 버렸다.

 속상했지만 감정에 빠져있을 수 없었다. 최선의 해결 방법을 찾아야 했고 다양한 경우의 수를 두고 대비책을 마련했다. 다행히 해결 방법을 찾았고, 이사 계획은 늦춰졌으며 임대인과 채무 관계가 됐다.

아마 10년 전 나였다면, 울고만 있었을지 모른다. 겪어보지 못한 일에 대한 두려움, 막막함에 휩싸여 몇 날 며칠 눈물만 닦고 앉아 있었을 테다. 이 일을 겪으면서 새삼 지난 기자 생활이 고마웠다.

 매일 경찰서로 출근했고, 에스프레소보다 더 진한 현실을 봤다. 명예훼손 건으로 경찰서서 참고인 조사를 받았고, 한창 선거법 위반 재판이 열릴 때는 법원서 몇 시간이고 앉아 노트북을 쳐댔다. 아저씨들이랑 목청 높여 싸우며, 손끝이 떨려 와도 어쩔 수 없이 할 수밖에 없던 기자 일상에 마음은 나도 모르게 단단해졌다.

무엇이든 쓸모없는 경험은 없다.

나이를 먹을수록 현실의 농도가 진해진다. 짙어진 현실은 벽처럼 우두커니 앞에 서 있다. 나는 뒤로 도망칠 수 없고, 벽을 넘어서야 한다.

‘벽을 하나씩 넘을 때마다 깊어졌으면 좋겠다.’
문득 든 생각을 붙잡고, 방 안에서 나는 홀로 읊조렸다.

‘잘 되어왔고, 잘될 거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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